요즈음 이웃분들이 달아주시는 댓글들을 보며 미숙하고 투박한 내 글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점에 많은 감사함을 느낀다. 특히 전국의 의대생들이 내 글들을 읽고 있었는데, 내 글을 읽으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학생들의 댓글을 보면 내 의대 시절이 떠오른다. 재미있는 일도 많았고, 미숙했던 점들도 많았던 나의 지난 6년 그 기나긴 시간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성숙할 수 있었던 소중한 기간'이다. 많은 부분에서 성장을 했고 그만큼 미숙한 부분들도 지워냈지만, 무엇보다도 스스로 인생을 대하는 태도를 명확하게 정립할 수 있었기에 나의 의대 생활은 가치가 있었다. 그 태도를 스스로 정했던 계기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작은, 아니 그 당시에는 결코 작지만은 않았던 고민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 선배들도 그랬고, 나도 그랬고, 후배들도 그렇듯 의대생들에게는 늘 따라다니는 고민 바로 성적과 공부에 대한 고민들이다.
학생시절 치열하게 공부했던 해부학
이 글을 보는 학생들은 성적과 공부에 대한 고민과 스트레스가 꽤 클 것이다. 그러니 본인 스스로도 답답하고 막막해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려 노력하다가 이 글을 보게 되겠지 선배들에게 물어보고,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에게 물어보고, 또 그러고도 마땅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아서 답답한 마음에 검색을 하다가 이 글을 보게 되겠지
그 누가 뭐라 해도 의대는 전국에서 공부로 방귀 깨나 뀌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내가 입학했을 때보다 지금 들어오는 신입생들은 성적이 더더욱 좋다고 하던데
빨리 태어나서 빨리 의대에 입학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절로든다.
내신이 좋아 수시전형으로 입학한 사람들은 아마 학교에서 전교 5등 안에 들었을 것이고
수능 성적이 좋아 정시전형으로 입학한 사람들은 성적표에 1등급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주위의 칭찬과 격려를 듬뿍 받고 본인 앞에 놓일 창창한 미래를 상상하며 어깨를 한껏 치켜세우고 의대에 입학했을 테지
입학한 뒤 의대만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는 예과 생활을 마음껏 즐겼을 것이다.
난생처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시험을 치렀을 테고 내 성적표가 맞는지 의심되는 성적과 등수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과는 원래 그런 거라며, 유급만 피하면 된다는 선배들의 조언으로 예과 2년을 본인의 인생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며 그 2년을 만끽하였을 것이다.
해외 방방곡곡을 누비던 나의 예과시절
하나 본과에 올라가면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인턴과 레지던트에 지원할 때 제출하는 의대 성적은 본과 1학년부터 4학년까지의 성적이니까 본과에 올라가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열심히 공부를 하겠다며 다짐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이 생각을 전국에 있는 모든 의대생들이 한다는 데에서 생긴다. 예과 때 [SELF] PO alcohol QD 처방 내왔던 학생들도, 유급 당하지 않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저공비행을 했던 학생들도 결국은 모두 의대생이다. 의대는 결코 주사위 굴리기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입학했던 모두가 성적에 대한 욕심이 있고 또 그 욕심을 충족시킬만한 두뇌와 끈기가 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예과 시절 잠시 잠재웠던 공부에 대한 열정과 노력 그리고 집착 비스름한 것까지 본과에 들어가는 순간 모든 의대생들의 마음속에서 되살아난다. 그렇게 본과 생활이 시작되면 모두가 본인의 미래를 위해 수업을 성실하게 듣고 악착같이 공부할 것이다. 지금껏 늘 그래왔던 것처럼 우수한 성적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영상의학과를 공부했던 흔적
나는 의대에 입학할 만큼 우수했으니 열심히 하면 좋은 성적을 받을 것이다.
아니라고 부인할지라도 모두가 마음에 품고 있을 것이 분명한 저 생각이 깨져버리는 순간이다.
성적표를 받는 순간 두 눈을 의심했을 것이다. 눈이 휘둥그레질지도 모른다. 내가 이 성적을 받았다고?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평생 생각지도 못해봤던 평범한 성적을 받는 순간 느꼈을 당혹감, 절망감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모두가 느꼈을 테지
아인슈타인 100명을 모아놓아도 상대평가를 적용하는 순간 누군가는 1등의 기쁨을, 누군가는 100등의 고배를 마셔야 한다.
바로 상대평가의 잔혹함이다.
요즘은 의대생들의 학업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절대평가로 바꾸는 학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 학교들은 상대적으로 스트레스가 덜할 테지만 아직까지 대다수의 의대는 상대평가를 적용하고 있다.
가족들에게 성적을 말하기도 민망하고, 가족의 반응을 보는 본인의 마음도 아플 것이다.
일가친척의 자랑거리였던 내가, 동네에서 공부로 방귀 깨나 뀌던 내가 의대에서 평범하거나 혹은 그 이하의 성적을 받다니
처음이라 아직 적응을 잘 못했겠지, 내 공부법이 잘못되었겠지, 내가 노력을 덜했겠지
본인의 성적에 대한 원인을 어떻게든 찾아보고, 다음 한 학기는 더더욱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피 땀 눈물을 비웃기라도 하듯 올라가지 않는 성적을 보고 무력감과 허탈감이 찾아왔겠지
비슷한 만큼 공부하는 것 같은데 저 친구는 성적이 좋고 내 성적은 왜 이럴까
내 공부법이 잘못되었나? 노력이 부족한 건 아닐까?
이런 성적으로 원하는 병원에 갈 수 있을까?
소위 말하는 '인기과'에 갈 수 있을까?
해결책이 안 보이는 앞날들에 걱정만 더더욱 커져갔을 테지
열심히 살았던 지난날의 흔적들
나도 그랬다. 가벼운 마음으로 보냈던 예과 생활 끝에 찾아온 본과 생활 정말 잘해보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시작했지만 본과 1학년 1학기에 중간보다 못한 등수를 받았다. 처음 느낀 감정은 당혹감 이었다.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나와야 하는 건 당연한데 왜 이런 결과를 받았지? 지금에야 그땐 그랬지 하며 웃어넘길 수 있지만 당시에는 성정 때문에 꽤나 맘고생을 했었다. 내가 잘하고 싶은 분야에서는 반드시 잘해야 한다는 강박 아닌 강박이 있었기 때문에 참 답답하고 막막했다.
시골에서 자고 나라 그저 우쭈쭈하는 환경에서 성장했던 나에게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따라온다는 건 마치 '낮에는 밝고 밤에는 어둡다' 와 같았다. 너무나도 당연해서 의심할 여지도 없는 말 그래서 열심히 해도 결과가 안 좋을 수 있다는 사실을 더더욱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밤에도 낮처럼 밝은 백야 현상이 내 인생에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느꼈다. 학구열이 뜨거운 동네에서 나고 자란 동기들, 또는 자사고나 특목고를 졸업한 동기들은 어렸을 때부터 이미 느꼈다고 한다. 세상에는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것도 있고, 주위에는 나보다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이 사실을 처음 느끼는 시기가 언제일지는 모두가 다르겠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다음 단계로 성장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형광펜을 쳐도 머리에 들어오는게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나는 특별하지 않다. 평범하다. 그러니 좋은 결과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만족의 기준을 결과에 두지 말고 과정에 두자 세상 모든 사람들이 결과에 집중하더라도, 나만큼은 과정을 보자 과정에 후회가 없으면 결과는 그저 받아들이자 열심히 한 만큼 결과가 안 나오면 아쉬운 건 당연하다. 세상 사람들 모두 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데나만 비운의 주인공처럼 궁상떨 필요 없다.
물론 하루 만에 생각이 바뀐 건 전혀 아니다.
생각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 동안 여전히 답답하고 먹먹했다.
시간은 약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마음이 안정되었고 덤덤히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내가 노력을 한 것의 결과가 어떻든지는 내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나는 늘 스스로에게 묻는다. 과정에서 아쉬움이 없었냐고
놀랍게도 이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된 무렵부터 내 성적은 수직 상승했다.
과정에 대해 후회하지 않으려는 생각으로 객관적으로 공부에 쏟는 시간이 늘었고, 시험에 대한 부담감이 적어져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내신이 1등급도 아니고 국가고시가 1등급도 아니다. 1등, 1등급을 목표로 효과적인 공부법을 찾고 있는 학생들이게는 이 글이 전혀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이 글은 그저 나 스스로 나의 지난날을 반추하고 나의 이야기를 읊조릴 뿐이다. 하지만 경쟁에 지치고, 본인에게 실망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로 인해 좌절하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이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지금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고 있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안다. 잘해왔고 잘하고 있다. 그 고민을 지난 시간 동안 수많은 의대생들이 함께 해왔다는 사실에, 의대를 졸업하기까지 꼭 거쳐야 하는 과정임에, 더욱 성숙해질 수 있는 기회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