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긴대로 산다는 오래된 옛말, 나에게는 무슨과가 어울릴까
"내과 학회에 가면 딱 너같이 생긴 사람들밖에 없다. 넌 무조건 내과 와야 할 얼굴이야"
때는 바야흐로 학생 실습을 하던 본과 3학년 시절
신장 내과 실습을 하던 중 함께 회진을 도시던 교수님께서 내 친구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며 하셨던 말이다.
실제로 내과에도 뜻이 있었던 내 친구는 교수님의 말씀에 허허 웃으며 감사를 표했고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생각했다.
'와 둘이 진짜 닮았다'
내가 생각해도 내 친구는 내과와 퍽 잘 어울린다.
내 친구는 차분하고, 잔잔하고, 똑똑하다. 또 착하고 배려심이 깊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서로 상담도 하고,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이 있을 때 함께하던 내 친구
이런 성격에다 외고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의대를 올 정도의 총명함, 게다가 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까지
왜 내과 교수님께서 그렇게 탐을 내셨는지 마음속 깊이 공감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는 왜 내 친구가 내과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을까?
하나하나 따져보며 ' 이 부분은 내과와 잘 어울리는구나' 하며 분석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 내 친구는 내과랑 너무 잘 어울린다. 왜냐고 물어보면 이유랄 게 딱히 없다.
잘생긴 걸 보고 잘생겼다고 느끼는 것, 예쁜 걸 보고 예쁘다고 느끼는 것, 귀여운 걸 보고 귀엽다고 느끼는 것
내과에 잘 어울리는 걸 보고 내과에 잘 어울린다고 느끼는 것. 그저 그뿐이다.
추측해 보자면 내가 그동안 보아왔던 내과 전공의 선생님들, 교수님들께서 갖고 있던 여러 점들이 내 친구에게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또 놀라운 점은 내과 전공의 선생님들께서는 그분들끼리, 또 교수님들께서는 그분들끼리 느낌이 비슷하시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내과뿐만이 아니다.
정형외과 선생님들은 정형외과 선생님들끼리, 마취과 선생님들은 마취과 선생님들끼리 분위기가 비슷하시다.
마치 무협지에 등장하는 여러 문파가 고유의 특징을 갖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나는 하루에 매일 읽어야 할 양을 정해두고 틈이 날 때마다 읽을 만큼 무협지를 좋아하는데, 이 취미 덕분에 일상에서 보고 느끼는 것들을 무협지와 비교하는 비밀스러운 취미도 있다.
무협지 덕후인 내가 보았을 때 문파와 의국은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도를 닦는 도사이면서 동시에 속가적인 성향이 강하고, 쾌속하고 화려한 검술을 사용하는 화산파는 왠지 성형외과를 연상케 한다.
담대하고 낭만 있는 백색의 검사들, 명예를 중요시하고 소나무처럼 우직하며 곧은 창천 남궁세가는 외과와 잘 어울린다.
명석한 두뇌와 지략을 바탕으로 전쟁의 판도를 제 손위에 올려놓은 모래알처럼 휘어잡는 제갈세가는 영상의학과
호탕한 성격에 거침없고 날카로운 패도의 길을 걷는 하북팽가는 흉부외과
부처의 말씀을 바탕으로 중생을 어여삐 여기며 살생을 금하지만, 대의를 위해서라면 평소 단련하였던 강력한 무의로 자비 없이 적을 섬멸하는 소림은 정신과
맹독과 외상의 절대강자인 사천당가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응급의학과를 떠올리게 한다.
하여간 무협지에 등장하는 문파들이 이렇게 각각의 특징이 있는 것처럼 병원의 과들 역시 특유한 분위기가 있다.
비슷한 분위기의 사람들이 같은 과에 모이는 걸까 아니면 같은 과에서 수련을 받다 보면 분위기가 비슷해지는 걸까?
비슷한 사람들이 비슷한 과에 모여있는 건 확실하지만 그 선후관계에 있어서는 사람들마다 묘하게 의견이 다르다.
마치 닭이 먼저일까 계란이 먼저일까 하는 논쟁처럼 말이다.
병원생활을 하면서 수도 없이 받는 질문이 있다.
"선생님은 무슨 과 어플라이예요?"
어플라이 (apply)는 지원을 한다는 뜻으로, 어떤 과에 지원을 할 생각이냐고 묻는 질문이다.
때로는 오히려 내가 지원할 것 같은 과를 맞춰보겠다고 하시는 선생님들도 계시는데, 내 관상을 보고 어느 과가 어울리는지 추측해 보는 이런 작은 이벤트는 맞추는 사람도,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꽤나 흥미롭다.
사람들이 말하는 나와 잘 어울릴 것 같은 과는 지금껏 여러 개가 있었다.
외과, 정형외과, 비뇨의학과, 그리고 성형외과
죄다 수술하는 과인 걸 보면 내가 왠지 수술할 것 같은 관상인가 보다.
그래서 내가 성형외과 어플라이라고 할 때면 "오 성형외과와 잘 어울리는 모폴로지예요" 라는 대답이 들린다.
모폴로지 (morphology)
'형태'라는 뜻을 가진 학문적인 용어와 동시에 병원에서는 흔히 환자를 눈으로 보았을 때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정도 내지 느낌으로 통용된다.
하지만 사적인 장소에서는 조금 다른 뜻으로 사용이 된다.
모폴로지는 관상, 외모, 이미지, 풍기는 분위기 등등 많은 뜻을 담고 있는데, 처음 이 단어를 배우고 사용했을 때는 뭔가 의료인들만의 슬랭(Slang)인 것 같아 왠지 모를 동질감과 끈끈함이 느껴졌다.
입에 익숙해져 버린 지금은 툭툭 아무런 생각 없이 쓰고 있지만 말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누군가가 '너는 컨타된 모폴로지야' 라고 한다면 한다면, 그 자리에서 드잡이질을 해도 무방하다.
컨타 (Contaminated) 된 모폴로지 (Morphology)
해석은 각자의 뜻에 맡기도록 하겠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 있다. 사람은 관상대로 살아간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께서 내게 자주 하시는 말씀들이다.
시간이 흐르며 젊은 의사들이 선호하는 인기과는 계속 변하고 있지만, 본인의 모폴로지에 맞는 과를 선택하는 게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던 '관상대로 살아간다' 가 아닐까
또 그런 식으로 과를 선택한 사람들을 보면 훨씬 마음이 편해 보인다. 마치 제 체격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말이다.
주변을 보아도 그렇다.
영상의학과에 합격한 동기들은 하나같이 똑똑하고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며 차분하다. 전공의 시험을 준비할 때 모르는 걸 물어보면 마치 그 순간을 위해서 그동안 공부를 해온 것처럼 막힘없이 술술 대답해 주었다.
내과에 합격한 동기들은 새로운 지식을 알아가는 것을 즐겨 하고 술기를 굉장히 잘한다. 비위관(L-tube) 삽입이 잘 안될 때 내과 어플라이에게 부탁하면, 내가 끙끙대었던 시간이 무색해질 정도로 손쉽게 성공한다.
그리고 본인이 보고 있는 환자들에게 상당히 애정을 가지는 것 또한 특징이다.
정형외과에 합격한 동기들은 깡다구가 있다. 그 어떤 힘든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버티고 이겨내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특유의 능글맞음이 있고 운동을 좋아하며 듬직한 체격을 가진 것 또한 특징이다.
소아과에 합격한 동기들은 정이 많고,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같이 이야기하고 있으면 어느새 내가 힐링이 되는 따뜻한 에너지를 갖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한 모든 이야기는 과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전형적인 뇌피셜에 의한 주절거림이다.
애초에 관상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할 리가 없으니까
과가 사람을 만드는지 사람이 과를 만드는지, 어떤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여 같은 과 의사가 된다는 건 재미있고 또 낭만적인 현상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