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과 의사가 되고싶어요?
의대생들은 학교에 갓 입학한 순간부터, 아니 합격 통지서가 날아온 순간부터 졸업할 때까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게 되는 질문이 있다.
마치 '의대생을 만났을 때 대처하는 법'이라는 매뉴얼이 전국에 배포된 것처럼,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심지어 오랜만에 뵙는 부모님마저도 이 질문을 물어온다.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지, 아니면 딱히 다른 할 말이 없어서 물어보는 건지
눈을 반짝이며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뭐라고 말할지, 또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전국 의대생들이 공감해 못지않을 질문" 나중에 무슨 과 의사 하실거예요? "
의사라는 직업을 한번 상상해 보자
어떤 의사가 떠오르는가?
머리에 반사경을 쓴 채 진료실에서 환자의 입안을 들여다보고 배를 꾹꾹 눌러보며 귀신같이 병을 진단해 내는 내과 의사
컴컴한 수술방에서 촌각을 다투는 응급상황을 유수한 손놀림으로 어김없이 해결해 내는 흉부외과 의사
공여자의 간이나 신장을 떼어내어 수여자에게 이식하여 환자들에게 새 생명을 주는 외과의사
어른의 배꼽만치 오는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을 달래가며 우리나라의 새싹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소아과 의사
의대생들, 그리고 인턴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의사가 될 수 있다.
메타몽이 모든 포켓몬으로 변화하듯, 줄기세포가 모든 세포로 분화할 수 있듯 예비의사, 그리고 파릇파릇한 의사들에게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다.
찬란한 앞날만이 그려지는 이 말은 달리 해석해 보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너무나도 많아서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도 될 수 있다.
하나의 길을 선택하자니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이 있고
마음을 좆자니 현실적인 면이 아쉽고
현실적인 면을 좆자니 마음이 아쉽고
끝내 하나의 과를 선택하더라도 이 과가 나랑 정말 잘 맞을지, 잘한 선택을 한 건지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 걱정들은 놀랍게도 레지던트 원서 접수 당일까지도 계속된다.
하여간 의대생들은 무슨 과 의사를 할 거냐는 질문에 대비를 해야 한다.
아직 모른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가는 ' 에이 그래도 생각해놓은 몇 개는 있을 거 아니에요'라던가 혹은 '요즘에는 무슨 과가 좋다던데 거기 가요!' 등의 이차 질문 폭격에 노출되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럴 때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라는 애매한 말보다는 평소에 흥미가 있던 과중 당장 생각나는 것 하나를 말하는 게 차라리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질문을 건넨 그 사람들은 당신의 머리 아픈 고민과 선택의 기로 앞에 선 스트레스를 일일이 듣고 싶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학생 실습, 즉 PK를 돌면서는 더욱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게 된다.
이제부터는 무슨 과 가고 싶어요?라는 말이 밥 먹었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학생 실습을 하던 때에는 몰랐지만 이 질문을 PK에게 던지고 있는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 아니지만 약간은 궁금하고, 처음 보는 학생에게 딱히 물어볼 것도 없고, 또 학생들이 대답을 하면 대화를 이끌어 가기 쉽다.그래 이건 그저 마중물 같은 질문이다.
3월에 학생 실습을 시작하고 나서 약 3달 정도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가 허용된다.
질문을 회피하기 위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 신분을 이용하는 것도 없지 않지만 정말 무슨 과를 가고 싶은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동안 공부를 하면서 재미있었던 과들은 있었지만 실제로 그 전공을 선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몰랐다.
그렇게 3개월을 버티다가, 6월 즈음이 되면 '아직 잘 모르겠다'라는 대답이 안 먹히기 시작한다.
이제는 적어도 환자를 직접 보는 과를 원하는지 아닌지 정도는 골라야 한다.
환자를 직접 보지 않는 과, 소위 서비스과는 보통 실습을 돌기 이전부터 어느 정도 마니아층이 있다.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특히 그런 것 같다.
새로운 환경보다는 익숙한 환경을, 사람들과의 약속보다는 혼자만의 시간을 선호하는 사람들 조용하고 정적인 것을 선호하는 내 주위의 사람들이 보통 그랬다.
핵의학과, 진단 검사의학과, 병리과, 직업환경의학과, 영상의학과, 조금 더 나아가면 마취통증의학과까지 포함될 수도 있겠다.
비의료인에게는 꽤나 낯선 과 들이겠지만 병원에서 없어서는 안 될 정말 필수적인 과 들이다.
본인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는 경우 학생 실습을 돌기 전부터 이러한 과에 가고 싶어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있었다.
한 9월 즈음 되면 환자를 보는 과 중에서도 골라야 할 선택지가 생긴다.
그때부터는 적어도 내과계열, 외과계열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선생님들의 압박질문에 대답을 해야 해서도 있지만 제일 큰 이유는 나 자신을 위해서이다.
나를 포함한 주위를 둘러보면 수술과, 특히 소위 필수과라고 불리는 과중 외과계열인 외과나 산부인과를 경험하고 나서 얼추 자신의 성향이 파악이 되는듯하다.
수술방이 나와 맞는지 안 맞는지
이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수술방과 잘 맞았다.
내가 수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고, 결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매끄럽게 이어지는 수술을 보고 있으면 마치 한 곡의 음악을 듣는 것 같았다.
기승전결이 있고 중간중간 포인트들이 있는 그런 흥미로운 음악
누군가는 수술방 특유의 분위기, 또 오래 서있어야 하는 게 싫어서 수술과가 본인과 맞지 않는다고 했다.
또 누군가는 수술을 하기에는 본인의 손놀림이 좋지 않다고 했다.
이렇듯 9월 즈음이면 각자만의 이유로 수술과 와 비수술과를 얼추 선택하게 된다.
그렇게 내과계열과 외과계열을 정했으면 그 안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이다.
바이탈을 보고 싶냐, 바이탈을 보고 싶지 않냐
즉 환자의 생명과 직관되는 일을 하고 싶은지를 결정하면 된다.
난 학생 실습을 돌면서 딱 이 정도까지 정하면 상당히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를 논하기엔 아직 경험한 것들도 적고,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다.
본인의 가치관, 의사로서의 최종 목표, 성적, 기타 현실적인 여건 등등 많은 것들을 고려해서 하나의 과를 정해야 하는데, 인턴을 시작하고 나서 조차도 생각을 끝내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나도 인턴을 시작하고 나서까지도 3가지 과중에 결정을 못 한 상태였다.
그간 내가 경험했던 것들로는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았기에 인턴으로 근무를 해보며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상반기 인턴을 마무리하는 8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의 과로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그러니 의대생들 그리고 곧 국가고시를 치를 예비 의사 선생님들은 본인이 원하는 과를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너무 스트레스 받을 필요는 없다.
대신 대학 생활을 하면서 또 학생 실습을 하면서 본인 스스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 보고 실습에 성실하게 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결국 본인이 해왔던 생각과 경험해 왔던 것들로 전공을 선택하게 된다.
좋은 요리를 만들기 위해선 좋은 재료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