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직하게 읊조리는 나의 경험
인턴들은 3월부터 12월까지, 총 10개월을 근무하면 인턴 성적을 받을 수 있다.
피땀을 흘려가며 노력해왔던 지난 10개월이 종이 단 한 장으로 요악되는 인턴 성적
마치 콜로세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검투사의 명운을 결정짓는 황제의 엄지손가락과 다를 바 없다.
인턴들은 A, B, C 3개의 등급 가운데 하나를 받게 되는데, 병원마다 비율의 차이가 있지만 인턴 성적은 대략적으로 A 30%, B 40%, C 30%의 비율로 정해진다.
10개월 동안 근무하는 10개의 과에서 각 과의 과장님, 의국장님, 그리고 인턴에게 공개되지 않은 기타 평가자들이 당월 인턴을 평가한다.
수련교육부는 10개월동안 누적된 평가점수를 취합하여 인턴을 일등부터 꼴등까지 나열한 후 비율에 따라 A, B, C 등급을 결정한다.
인턴에게 인턴 점수는 이마에 새겨진 낙인과도 같아서 모든 인턴들은 좋은 인턴 점수를 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운이 좋게도 나는 A턴이 되었다.
A를 받았지만 내가 무엇을 잘해서 A를 받았는지, 어디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는지 알 길이 묘연했다.
인턴 평가기준은 우리에게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는지 명쾌하게 알 방법이 없다.
모든 평가가 끝난 지금, 나의 지난 경험을 돌이켜보며 좋게 보였을거라 추측되는 점들에 대해 앞으로 인턴 수련을 할 후배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턴표]
제일 중요한 것은 인턴 시작 전에 받는 턴표이다.
평가자의 입장에서, 본인이 점수를 잘 주었다고 생각하는 정도는 지극히 주관적이다.
100점 만점에 90점을 잘 주었다고 생각하는 평가자가 있을수 있고, 매우 낮게 주었다고 생각하는 평가자도 있을수 있다.
본인이 근무하게 될 과에서 나를 평가하는 교수님들 및 의국장 선생님께서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저 운이 좋으면 객관적으로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는 과에서 근무를 하게 되고, 운이 나쁘면 그 반대가 될 터이다.
인생은 운칠기삼 이라고, 어떤 과에서 근무하게 되는지는 온전히 운이다.
막말로 턴표가 나오는 2월, 이미 인턴 점수가 나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턴표는 인턴 점수에 큰 영향을 미친다.
병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근무했던 병원은 턴표를 수정할 수 없었고,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턴표를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었다.
[성실함]
성실함은 모든 인턴들이 지녀야 할 기본 덕목임과 동시에 인턴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무기이다.
나는 특출나게 머리가 좋지도 않고, 말을 청산유수로 잘하는 것도 아니다.
눈에 띄게 성격이 좋은 것도 아니고, 시선을 앗아갈 정도로 외모가 뛰어나지도 않다.
스스로를 객관화해보자면 무엇 하나 특출나지 않으면서도 또 그렇다고 크게 모난 점이 있지도 않은, 어디에나 한 명쯤 있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다.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런 생각을 해왔었지만 나에게는 자존심과 야망이 있었다.
나는 쟁쟁한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만의 무기를 찾아야만 했다.
내가 선택했던 무기는 바로 성실함 이었다.
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에 꽤 시간이 걸린다.
시간이 걸려 일에 익숙해질만하면 새로운 과에서 근무를 해야 하는 인턴생활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면서 기억력도 좋지 않은데, 때로는 내 IQ가 세 자리가 맞는지 진지한 고민을 하기도 했다.
지능검사를 하면 진짜로 두 자리 결과가 나올까 봐 IQ는 중요하지 않다고 스스로 위안하며 검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두려워서 같은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해야만 머릿속에 남는 타고난 능력이 아쉬울 때가 많았다.
하지만 아쉬워해봐야 달라지는 건 없기에, 내가 가진 성실함으로 부족한 부분을 메꾸기 시작했다.
다음 달에 근무할 과에 대해 인계받을 때는 늘 영상을 촬영했고, 혼자 있는 시간에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았다.
형광펜을 쳐가며 인계장을 읽었고, 턴을 하기 전에 한번씩 일을 해보았다.
새벽에 수술방을 한번 차려보기도 하고, 문서작업도 미리 한번 해보는 등 업무가 시작되는 첫날 업무에 구멍을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미련했지만, 나는 나의 단점을 잘 알았고, 그 단점을 메꾸고자 하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이런 행동들을 주위에선 성실한 모습으로 봐주었고, 역설적으로 꼼꼼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판단력]
급한 일과 급하지 않은 일을 구분하는 것 또한 인턴이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이다.
인턴으로 근무하다 보면 동시에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반드시 생기는데, 나름의 판단으로 급한 일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
아침 회진 때 필요한 혈액검사 결과, 심전도 검사 결과를 우선적으로 해치웠고 정규 드레싱은 급한 일이 모두 끝날 때까지 뒤로 미루었다.
단 급하지 않다고 해서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 핵심이다.
급한 일이든 급하지 않은 일이든 간호사 선생님들이 인턴에게 노티 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레지던트 선생님들 혹은 교수님들께서 지시한 사항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급한 일을 모두 끝내면 숙소로 들어가서 드러눕는 게 아니라, 급하지 않은 일을 하러 병동에 가야 한다.
물론 귀찮고 피곤하겠지만 우리는 월급을 받고 일하는 근로자이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환자를 위해서라는 걸 늘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나는 어차피 병원생활을 하면서 운동시간을 안배하기 어려우니, 일을 하면서 일일 유산소 운동을 끝내자는 생각으로 쉬고 싶은 욕구를 극복했다.
[적극적인 자세]
일이던 우정이던 사랑이던, 모든 것은 적극적인 사람이 쟁취하는 법
나같이 타교에서 온 사람에게 적극적인 자세는 집단에 적응하는 데에 필수 요소였다.
처음 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했을 때 병원에는 나를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맨손으로 흙바닥에서 건물을 쌓아 올려야 하는 막막한 상황에 겁도 나고 두려움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이 집단에서 무언가 얻고자 하는 게 있으면 그 집단에 잘 녹아드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입을 벌리고 누군가 떠먹여주기를 기다리면 안 된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 한다.
모르는 게 있으면 동기, 레지던트 선생님, 교수님을 가리지 않고 물어보았고 한번 배웠으면 두 번 물어보지 않도록 반드시 체득하려 노력했다.
병동이던 수술방이던 병원의 모든 곳에서 인턴은 늘 막내이고 모르는 것이 제일 많다.
일을 잘하기 위해서, 그리고 의사로서 성장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자세가 반드시 필요하다.
[어필하기]
우리 인턴들은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정규 업무를 시작하고, 끊이지 않는 간호사 선생님들의 콜도 제깍제깍 처리한다.
그런데 당최 나를 평가하시는 교수님을 뵐 기회가 없고, 심지어 레지던트 선생님들까지 뵐 일이 없다.
교수님은 나의 어떤 모습을 보고 평가를 하시려는 걸까?
외과나 산부인과처럼 수술방에서 교수님을 직접 뵈어야만 하는 과들은 논외이지만 내과처럼 분과가 많고 일이 바쁜 과는 교수님을 뵐 일이 손에 꼽는다.
그래서 인턴들은 교수님을 직접 뵐 수 있는 얼마 없는 기회에 나의 능력을 최대한 어필해야만 한다.
보통 그 순간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발표 자리가 되곤 한다.
또박또박한 발음, 큰 목소리, 유수처럼 흘러가는 발표
한 번의 발표로 유능한 인턴의 이미지를 심을 수 있다.
'언젠간 나의 진심을 알아주겠지'라고 생각하며 묵묵히 일만 하기에는 1달이라는 시간은 너무나도 짧다.
'내가 이 정도로 능력이 있어요'라며 본인을 어필하는 것 또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필수다.
발표 이외에도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급하게 부탁하신 일을 잘 처리하거나, 선생님들께서 너무 바쁜 나머지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들을 센스 있게 챙기는 것도 방법이다.
[역지사지]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일수록 실수의 빈도도 높다.
내가 실수를 하는 것처럼 다른 인턴들, 다른 간호사 선생님들도 실수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근무하는 과를 착각해 다른 인턴에게 노티 하거나, 당직이 아닌데도 새벽에 전화를 하거나, 이미 한 일인데 해달라고 재촉을 하거나
그 자리에서 바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실수부터, 순간적으로 짜증이 솟구치는 실수까지
간호사 선생님들과 인턴의 관계는 함께 일하는 동료이자 수면 아래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는 애증의 관계이다.
인턴의 입장이 그러하듯 간호사 선생님들의 입장도 그럴 것이다
급하게 필요한 처방은 내줄 기미도 안 보이고, 노티 한 일을 인턴이 안 해주는 바람에 환자는 스테이션으로 나와 컴플레인을 하고, 또 일을 대충해서 똑같은 일을 계속 요청하게 만드는 등등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답답해하는 상황이 매일같이 생겼었고, 앞으로도 생길 것이다.
인턴의 입장에서는 내가 잘못한 일을 인정하고, 다음부터는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 기왕 할 일이면 한 번에 잘해야 하고,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은 미루지 않고 해결해야 한다.
또 간호사 선생님들이 하는 실수도 '사람이 실수를 할 수 있지' 내지는 '내가 앞으로 실수할 일이 생길 테니 그때를 생각하자'라고 생각하며 넘어갈 줄도 알아야 한다.
매번 예민하게 반응하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도 크게 만들 뿐이다.
그리고 내가 도움을 받았으면 당연히 도움을 줄줄도 알아야 한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급할 때는 그렇게 도움을 요청해놓고 내가 여유로울 때는 나 몰라라 하는 태도는 반드시 지양해야 한다.
도움을 요청했을 때 도와주는 인턴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다른 인턴이 도움을 요청할 때는 여유가 되는대로 내일처럼 함께 해결해야 한다.
나도 인턴이 처음이고 동기도 인턴이 처음이다
또 내가 술기가 미숙하고, 미숙한 면이 많은 만큼 동기도 마찬가지이다.
내 입장이 저쪽의 입장과 다르지 않다.
역지사지 마음가짐 성공적인 인턴생활 그리고 인간관계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외관]
병원은 사람을 만나는 곳이다.
치료도 그리고 평가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떻게 보이는가'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잘생기고 예쁘면 좋은 점수를 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풍기는 외관 즉 이미지가 중요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보이는 것의 힘은 절대 약하지 않다.
늘 퀭하고 떡 진 머리, 커피 얼룩이 이곳저곳에 있는 가운을 입고 다니는 인턴보다는 멀끔하고 깔끔한 인턴에게 긍정적인 마음이 드는 것은 결코 이상하지 않다.
평가에 영향이 있었을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나는 밤을 새우고 다음날 출근까지 30분이 남았으면 자는 것 대신 씻는 것을 선택했다.
운동도 비슷한 맥락이라 생각한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특유의 밝은 에너지가 있다.
우락부락한 근육이 있고 없고, 3대 중량을 몇을 치고의 문제가 아니다.
[친절함]
친절함은 윤활유와 같다.
빡빡하게 맞물려있는 기계에 기름칠을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작동하듯이, 친절한 태도는 그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조금은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게 해준다.
실수를 하더라도 이해받을 수 있고, 같은 말이라도 두 배의 효과를 낼 수도 있다.
친절함은 물물교환처럼 하나를 주면 하나의 효과를 받는 게 아니다.
친절함은 마치 물에 떨어진 잉크 한 방울과도 같아서, 작은 행동으로도 큰 파급효과를 낼 수가 있다.
한번은 이런 적이 있다. 항암치료를 위해 주기적으로 입원을 하며 치료를 받는 환자분이 계셨다.
나는 반복적인 입원을 하는 환자분들에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더 쓰여서 평소보다 좀 더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간호사 선생님이 오셔서 선생님이 그렇게 친절하다면서요?라며 말을 건네었다.
네? 누가 그러시던가요?
알고 보니 그 환자의 보호자분이 간호사 선생님들을 볼 때마다 내 칭찬을 입이 닳도록 해주셨고 칭찬카드도 몇 개나 작성해 주셨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는 친절한 인턴이라는 이미지가 생긴 것이다.
그 사건 덕분인지 나는 상반기에 우수 인턴상을 받을 수 있었는데, 여전히 어떻게 받는 상인 지는 모르겠다.
그저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환자들의 칭찬카드, 간호사 선생님들의 추천, 교수님들의 추천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할 뿐이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이 모든 건 그저 나의 개인적인 생각들이다.
교수님들, 의국장 선생님들께서 어떤 기준으로 나를 바라보셨고, 어떻게 평가했는지 영원히 알 길은 없다
그저 뒤돌아 생각해 보았을 때 이런 점들이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할 뿐이다.
인턴 평가는 너무나도 주관적인 영역이기에 인턴 점수로 이 인턴을 결코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상대평가의 맹점이다.
열심히 안 하고 A턴을 받을 수는 없겠지만 열심히 해도 A 턴이 아닐 수 있다.
턴표처럼 인턴 점수에 굉장히 중요하지만 개인이 어쩔 수 없는 영역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 점을 모두가 알기 때문에 B턴도 C턴도 능력 여하에 따라 본인이 원하는 결과를 충분히 얻어낼 수 있다.
A 턴을 받는 것을 인턴생활의 목표로 하기보다는, 성적을 받고 나서 뒤돌아 보았을 때 후회가 남지 않을 인턴생활을 목표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