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문의 Dec 19. 2023

[병원인턴] 인턴 야유회

합법적으로 근무시간에 놀고 먹고 할수 있는 시간, 인턴 야유회

대학병원은 365일 24시간 불이 켜져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중 한 곳이다.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고 누가 그랬던가

그런 명언을 남기셨던 분조차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아프게 될지 예측하는 것만큼은 단연코 불가능하다고 말할 거라 확신하기에, 대학병원의 형광등은 깜빡거릴지언정 결코 꺼지지 않는다.

그러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 수많은 의료진들이 순서를 바꿔가며 당직을 서고 있는데, 보일 듯 말 듯 작긴 하지만 그러한 시스템의 제일 아래에는 우리 인턴들이 있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대학병원


근무시간, 당직 날, 오프, 휴가

이 모든 것들이 각기 다른 우리 인턴들이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전부 모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데, 병원의 규모가 클수록, 또 인턴의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가능성은 더더욱 낮아진다.

그렇다 보니 같은 과에서 근무하는 짝턴들, 룸메이트들 등등 늘 만나는 사람들과 만나게 되기 십상이고 근무를 하는 내내 얼굴은 알지만 대화 한마디 섞어보지 못한 인턴들이 생기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인턴들이 서로 내외하는 걸 두 눈 뜨고는 못 보는 우리 수련교육부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인턴들이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모일 수 있도록 공식적으로 야유회 자리를 만들어준다.

그 말인즉슨 무슨 과에서 근무를 하던지 상관없이 합법적으로 병원의 허락하에 놀러 갈 수 있다는 뜻인데, 이런 천금같은 기회가 무려 상반기에 한번, 하반기에 한번 총 두 번이나 주어진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진행되었던 하반기 야유회(1)

아쉽게도 인턴들이 직접 야유회 장소를 선택하지는 못한다.

만약 야유회 장소를 직접 고르라고 한다면 아마 백이면 백 알아서 자유시간을 갖게 해달라는 요구가 빗발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일까

솔직한 심정으로 하루 근무를 빼준다고 하면, 편안한 침대에 누워서 들입다 누워,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퍼질러 자는 게 제일 좋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잠을 자라고 근무를 빼주면서까지 야유회를 보내주는 게 아니라는 수련교육부의 말에는 백번 동의하는 바이다.

그래서 수련교육부에 속한 여러 직원분들, 교수님들께서 회의를 통해 야유회의 장소를 정하고 일정을 짜주시면 결정을 하면 인턴들은 쫄래쫄래 따라간다.

그렇게 해서 나는 상반기에는 롯데월드로, 하반기에는 경주로 야유회를 떠나게 되었다.

롯데월드면 어떻고 경주면 또 어떠한가

적어도 나에게는 야유회 장소는 결코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병원 안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일하고 있을 시간에, 병원의 허락 아래 날씨 좋은 날 병원밖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다.

개인 사비를 써서 놀라고 해도 넙죽 감사하다고 할 마당에, 먹고 싶은 것들, 마시고 싶은 것들을 말만 하면 다 사주시기까지 하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장소가 중요하지는 않지만 병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야유회를 가는 것 역시 좋았다.

휴가 때나 오프가 2개 연속으로 붙어있지 않는 이상 다른 지역으로 놀러 간다는 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보통 오프가 2개 붙어있는 행운이 찾아와도 전날 당직인 경우가 많아서 당직을 끝내고 잠시 자고 일어나면 해가 중천에 떠있곤 하는데, 그렇게 눈을 뜨게 되면 다른 지역으로 놀러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가 사라지기 부지기수이다.

이런 인턴들을 어떻게든 등 떠밀어 다른 지역으로 데려가 주시는 야유회 덕분에 즐거운 경험도 많이 하게 되고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새로운 추억도 만들 수 있다.

야유회가 아니었다면 얼마 없는 휴가나 오프를 결코 롯데월드나, 경주에서 보내지는 않았을 것 같긴 하다.


야유회가 좋은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도 안 하고, 바람도 쐬고, 먹고 싶은 것도 다 먹을 수 있고...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을 꼽자면 모든 인턴들이 같은 시간에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점이다.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인턴이라도 스케줄은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응급실 인턴들은 늘 응급실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인턴들이 쉬는 휴게실에서조차 얼굴을 거의 비출 수가 없다.

심지어 우리 병원은 응급실 인턴이 24시간 연속근무이기 때문에, 우리가 응급실 인턴을 볼 수 있는 경우는 응급실에 근무하고 있는 과 진료가 필요하여 환자를 보러 가야 하는 순간 말고는 거의 없다.

또 정형외과처럼 수술방에서 하루 종일 있어야 하는 과에서 근무하는 인턴들 역시 얼굴을 볼 틈이 없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면 햇빛을 못 봐서 그런가 얼굴이 뽀얘져있는데, 참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헷갈린다.


이렇게 자주 못 보는 얼굴들을 볼 수 있는 기회도 되고, 또 병원 안에서 매일같이 보는 얼굴들이라도 병원 밖에서 보면 또 감회가 새롭다.

우선 병원 안에서는 서로가 기억하는 모습은 매일 초록색 하늘색 파란색 근무복에 커피 자국이 묻어있는 가운을 걸친 그러한 모습들이다.

그러다가 사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면 왠지 낯설게 보이기도 하고, 우리도 여러 가지 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대화의 주제도 사뭇 달라진다. 주제가 다양해지고 폭이 넓어진다고 해야 할까

병원 안에서는 늘 보는 게 보는 거다 보니 주로 병원에 관련한 이야기들을 하게 된다.

지금 무슨 과를 돌고 있고, 그 과는 어떻고 .. 매일 비슷한 레퍼토리이긴 하지만 또 지금 우리의 인생에서 병원이 차지하는 정도가 큰 만큼 또 그만한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찾기 어렵다.


하지만 병원밖에 서는 탁 트인 시야, 새로운 공기가 끊임없이 새로운 대화 주제들을 만들어낸다.

좀 더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꺼내게 되고, 또 그러면서 서로 몰랐던 부분들에 대해 많이 알게 된다.

동기이자 친구인 인턴

병원 안에서는 친구보다는 동기의 느낌이 좀 더 강하지만 병원 밖에서는 동기보다는 친구의 느낌이 좀 더 강해지는 것 같다.


인턴 야유회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모든 일정이 끝나고 저녁 회식자리이지 않을 수 없다.

늘 술과 고기에 목말라있는 우리 인턴들에게 부어라 터져라 마실 수 있는 시간이니까

인턴 야유회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우리 인턴들이다.

오늘만큼은 병원장님이 오셔도 당당한 우리는 병원생활의 필수조건인 눈치라는 걸 살포시 내려놓고 고기와 술을 부르는 목소리의 볼륨을 높여본다.

평소 같았으면 가격을 보고 조심스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을법한 메뉴들도 오늘만큼은 우리의 레이더 안에 있다.

고기도 종류를 가리지 않고, 출신 국가도 가리지 않는다.

왜? 오늘은 인턴 야유회이니까



야유회를 다녀오면 동기들과의 관계가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음을 느낀다.

확실히 이전보다 동기들과 더 가까워졌고, 서로에게 더더욱 스스럼없이 대화를 건넨다.

다양한 사람들을 알아가는 것 자체도 즐거운 일이지만 이렇게 친해진 동기들은 인턴생활을 헤쳐나가는데 더없이 든든한 등불이 되어준다.

어떠한 일이 안 그렇겠냐마는 특히 병원 일은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갑자기 해야 할 일이 생겼는데 전에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이라든지

평소에는 너무나도 잘 되던 술기가 갑자기 안된다든지

아니면 내 몸은 하나인데 동시에 해야 할 일이 두 개 세 개가 생긴다든지

막막하고 답답한 상황이 시도 때도 없이 생기기 마련인데, 야유회 전에도 물론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지만 야유회 이후 더욱 가까워진 인턴들끼리 주고받는 도움은 이전과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야유회의 끝에는 결국 사람이 남았다.

AI가 발달하고, 언택트 기술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모든 일들의 핵심은 사람일수밖에 없다.

전화를 하는것이 부담스러운 걸 넘어 전화 공포증까지 대두되고 있는 요즘 시대에, 병원 안의 주요 의사소통은 면대 면 또는 전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교수님들과 매일같이 회진을 하며 노티 드리고, 주말에는 전화를 통해 노티를 드린다.

레지던트 선생님들께 부탁드릴 일이 있을 경우 숙소든 의국이든 직접 찾아간다.

급하게 영상의학과 판독이 필요하거나, 응급 시술이 필요한 경우는 영상의학과 의국이나 인터벤션실에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가 고진 선처를 부탁드린다.

그래 결국엔 사람이다.

만족스러운 삶을 이루어 나가는 것도, 일에서 성공을 이루는 것도 모두 주변 사람들의 존재 덕분에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먹고 마시고 취했던 인턴 야유회는 내 마음속에, 그리고 곁에 많은 사람들을 남기며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다.

이전 25화 [병원인턴] 레지던트 결과 발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