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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물젤리 Aug 29. 2023

할머니, 비밀로 하기로 약속했잖아요

여섯 살 미남이

종일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미남이를 데리러 나가는 시간에 비는 그쳐있었다.

그래도 변덕 심한 요즘 날씨라  혹시 몰라 검정 우산 한 개를 챙겼다.

집 밖으로 나갈 때 한 두 방울씩 내리기 시작하더니

미남이가 도착할 때쯤에는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같이 쓴 우산은 미남이 쪽으로 바짝 기울어져 나는 머리만 겨우 덮을 정도였다.

"할머니, 우산을 할머니한테만 가게 쓰면 어떡해요. 미남이 다 젖잖아요"

억울하다.

"미남아, 우산 봐봐. 미남이 쪽으로 완전!! 기울어져있잖아"

"그러니까 할머니, 미남이 거랑 우산을 두 개 가져와야죠 "

",,,,,,,,,,,"

나한테 잔소리 쟁이라더니 나 못지않게 잔소리 많은 녀석이다. 난 미남이가 잔소리하지 말라는 잔소리가 젤 듣기 싫다.



아파트 오르막 길에  빗물이 모여 흘러내리고 있었.

당연한 듯 방향을 틀고 물이 흘러내리는 곳으로  간 녀석은 크록스 신은 발로 물길을 막고 폭포를 만들고 찰방찰방 물장난을 다. 비가 오면 매번 하는 놀이다.

우산 든 내 팔이 미남이 젖을까 움직일 때마다 이쪽저쪽으로 바쁘다.


집으로 들어가는데 놀이터를 지난다.

젖은 미끄럼틀 끝에 물이 고여 있다.

우리 미남이 신나겠다 생각하는데

"할머니, 미끄럼틀 탈래요"

미남이와 나는 이런 건 죽이 참 잘 맞는다.


어제는 다섯 번  탔지만 오늘은 딱 한 번만 타기로 했다. 미남이 콧물 때문이다.


어깨에 맨 가방을 벗겼다. 미남이는 단숨에 비가 내리는 우산밖으로 쪼르르 뛰어 젖은 미끄럼틀 계단퍽퍽 소리 내며 올라갔다.


~~

물에 젖어 있는 미끄럼틀은 속도가 무섭다.

미남이는 미끄럼틀 끝에서 멈추지 못하고 바닥까지 튕겨져 나오고  사진 찍느라 근처에  있는 나한테까지 물이 튀었다.

'한 번만 더요'

협상이 들어오면 두 번 정도는 "좋아!!"  쿨하게 허락해 줄 참이었는데  얼굴까지 물이 튀어서 그런지  말이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 곧장 따뜻한 물로 목욕을 시켰다.

 맞으면서 미끄럼틀 탔다고 엄마가 할머니한테 이놈~~ 하고 할머니랑 미남이 못 만나게 할지도 모르니까 우리 둘이 비밀로 하자고 했다.

대답은 시원했고 새끼 손가락 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남아. 진짜 비밀 지켜야 돼?"

"할머니는 맨날 엄마한테 말하면서.  할머니나  조심하세요"

나한테 핀잔까지 주고 저는 얼마나  입단속을 잘하는지 두고 보기로 했다.


미남이 염려대로 난 하루도 못 넘기고 미남이 엄만 한 테 말했다.

다음날까지도 미남이는 비밀유지 중이라고 다.


이틀 후,

미남이네 가족이 우리 집에 왔다.


"미남아 비 맞으면서  미끄럼들 타면 엄청 재밌는데 혹시 타봤어?"

입을 꾹 다물고 팔로 큰 X자를 만들어 보였다.


어제도 오늘도 비가 내렸고 젖어 있는 미끄럼틀을 또 탔다.

집에 오는 엘리베이터에서 물었다.

"엄마한테 미끄럼틀 탄 거 왜 말 안 했어?"

"할머니, 비밀로 하기로 약속 했잖아요오. 그리고 할머니 못 만나게 할까 봐 말 안 할 거예요 "

미남이는 아직 약속을 잘 지켜내고 있다.

더 이상 입 가벼운  미남이라고 흉보지 말아야겠다.


---------       그리고 뒷 이야기       --------


미남이 엄마가 이른 퇴근을 한 날

미남이 미끄럼 타는 영상이 내 카톡창에 도착했다.

빗물에 젖어있는 미끄럼틀 꼭대기에서 미남이는 주저주저하고 있었다.

"엄마 추워, 무서워 무서위"

아래에 서서 지켜보고 있는 엄마를 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엄마가 있어서 어리광을 하나보다 생각했다.


또 하나의 영상을 열었다.

두 손으로 윗도리 끝을 잡고 고개를 아래로 숙인 채로(나에게는 정수리만 크게 보였다) 몸을 까딱까딱 흔들며 마침내 고해성사를 하고 있는 미남이가 나타났다.

엄마의 유도신문에 꼬리가 잡힌 건지 그동안 엄마 속이느라 마음이 부대꼈는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모르겠다.

왜 얘기 안 했냐고 다정하게 묻는 엄마에게 볼을 부풀리고 입을 비죽 내밀면서 오랜만에 듣는 혀 짧은 소리로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히잉, 할머니 못 오게 할까 봐떠"


다음날 저녁이었다.

"미남아, 어제는 미끄럼틀 탈 때 추웠어? 엄마한테 춥고 무섭다고 하던데"


"아니이 처음 타는 것처럼 할라고 그랬죠오 할머니"


미남이도 다 생각이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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