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선인 관계에 대하여
같은 동네에 오래 살다 보니, 여기저기에 오랜 단골집이 있다. 새로운 곳들을 찾아다니는 것도 재미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익숙한 곳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인지라, 한 번 정착(?)한 곳이 생기면 다른 곳에 잘 가지 않게 된다. 특히 동네에서는 카페는 물론이고, 와인집과 밥집, 칼국숫집 같은 곳들은 단골집이 있다. 자주 오가다 보니, 그곳의 사장님들과 소소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이런저런 궁금한 점들을 넌지시 물으며 조언을 얻기도 하고, 날씨나 동네 이야기 같은 가벼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같은 건물에 사는 이웃들보다 대화도 훨-씬 많이 한다. 퍽 가까운 마음이 든다.
생각해보면 대체로 내가 단골이 된 그곳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파는 곳이다. 커피, 와인과 맥주, 솥밥과 칼국수. 내가 좋아하는 것을 사러 간 그곳에서는 마음이 훨씬 너그러워지고 다정해진다. - 그러고 보니 다 먹을거리뿐이네 - 마음의 벽이 쉽게 허물어지고 작은 대화를 건넬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사실은 낯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벽이 한없이 높아지는 사람이라, 무얼 사러 갈 때 직원들이 나에게 다가오지 않기를, 아무 말도 걸지 않기를 속으로 빌곤 하는데 말이다. 그리고 단골집이 있다는 것은 어딘지 멋지고 성공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의 손님들처럼.
동네를 왔다갔다 하다 보면 가끔 모처에서 사장님들을 만날 때도 있다. 솥밥집에 갔다가 식사 중이신 카페 사장님을 만나거나, 반대로 카페에 커피를 사러 온 솥밥집 사장님을 만나거나, 출근 중이신 와인집 사장님을 만나거나.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를 나누면서 나와 그이들이 한 동네의 이웃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들이나 성당 사람들을 우연히 만날 때와는 좀 다른 결의 반가움이 생긴다. 내가 이곳에, 이 동네에 발 붙이고 살아가는 생활인이라는 생각이 담뿍 들면서 말이다.
인연인 사람들은 실로 이어져 있다는 어느 노랫말(*홍연, 안예은)을 떠올린다. 같은 맥락에서 누군가와의 관계를 선(線)으로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관계가 무언가들을 '잇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선'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점선의 관계', '실선의 관계', '이중선의 관계' 정도? 물론 우리가 지니고 있는 수많은 관계의 연결을 세 가지만으로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서로가 아주 끈끈하게 이어져 있는 이중선, 끊김 없이 잘 이어져 있는 실선, 이어져 있기는 하지만 쉬이 끊어질 수도 있는 점선 같은 관계들.
그래서 단골집과 나의 관계는 아마 '점선의 관계' 쯤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어져 있기는 있지만 너무 타이트하지는 않은, 조금은 경계가 모호한, 그래서 오히려 더 친절할 수 있고 더 쿨할 수 있는, 서운할 일도 없고 서운하게 할 일도 없는 그런 정도. 그이들에게 나는 많고 많은 방문자 중 한 명일 것이고, 많고 많은 단골들 중 한 명이므로 내가 대단히 그분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 테니, 역시 '점선쯤의 관계'가 적당하겠다. 우연히 만나면 반갑고, 오래 보이지 않으면 조금은 궁금한, 그렇지만 사실 서로의 삶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닌 관계.
그리고 감사하게도 '점선의 관계'는 나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고 마음에 바람이 통하게 해 준다. 내 삶의 모든 관계가 실선이거나 이중선이라면, 그 선이 끊어질까 봐, 스크래치가 생길까 봐 아등바등하느라 자주 버거울 것 같다. 하지만 점선에 있는 그 공백은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 동네에 나와 이어진 점선들이 여기저기 성글게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 참 좋다. 나도 그이들에게 숨 쉴 틈이 있는 다정하고 친절한 점선 중 하나이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