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지지 않는 통증에 대하여
1.
월경통이 심한 편이다. 20년 가까이 자궁 내벽의 생성과 파괴를 겪었지만, 안타깝게도 아픔을 없애는 방법은 찾지 못했다. 다만 통증을 빨리 가라앉히는 노하우(?)는 몇 가지 생긴 것도 같다.
- 월경을 시작하면 통증의 유무와 관계없이 약을 바로 먹는다.
- 월경통이 시작되고 이틀 정도는 통증의 유무와 관계없이 6시간에 한 번 씩 약을 먹는다.
- 나는 이부프로펜이 제일 잘 든다. (이부프로펜 성분인 이지엔6는 한 번에 살 때 세네 통씩 산다. 두어 달이면 다 먹는다!)
약에 대해 잘 모르던 때엔 왠지 진통제는 자주 먹으면 안 될 것 같았고, 아프지 않을 때 통증을 미리 예상해서 약을 미리 먹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에 걸쳐 터득한 경험과 약에 대한 지식이 생기고 나니, 저 세 가지는 매달 월경통을 진정시키는 나의 루틴이 되었다. 초기에 잘 잡으면 큰 아픔 없이 지나간다. 하지만 저 루틴 중 하나가 삐끗하면 여지없이 엄청난 통증이 찾아온다. 그때만큼은 정말 죽을 맛이다.
잠에서 깨어있을 때 월경이 시작되는 경우에는 그나마 아프기 전에 약을 바로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전체 루틴을 잘 지키게 되지만, 잠든 사이에 그 손님이 찾아오면 여지없이 통증 때문에 깬다. 그런데! 집에 진통제가 없다?! 그날은 급하게 휴가를 쓸 수밖에 없다. 출근을 할 수가 없다. (통증이 온 새벽에 침대에 누워 휴가 결재를 올린 적도 몇 번 있다.)
2.
매달 찾아오는 통증이 있다는 것은 당연히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나는 이 정도의 가벼운 통증도 무척 힘든데... 고된 투병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찾아오는 통증은 어떨까 상상해보면, 작은 알약 하나로 빠르게 제어가 가능한 내 통증은 그 근처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제약업계에서 일하면서 세상의 많고 많은 약을 알게 되었고, 나는 세상의 온갖 치료제와 치료제 후보물질을 매일매일 들여다보고 조사하고 보고서를 쓴다. 일할 때의 나에게 치료제는 그저 과학적 기준을 적용시켜 평가해야 하는 대상이 되고, 약의 적응증*은 우리 회사의 관심 영역인지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버린다. 또 투약 부작용을 볼 때면 ‘음~ 이 정도면 마일드(mild)하네. 이건 좀 시비어(severe)한데?’라는 평가를 먼저 하게 된다. 실험 결과를 보며 독성을 판단하게 되고, 임상시험 결과를 가지고 이 후보물질의 허가 가능성을 예상하기도 한다.
(*적응증: 어떠한 약제나 수술 따위에 의하여 치료 효과가 기대되는 병이나 증상)
나는 환자와 직접 이야기 나누거나 직접 약을 처방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매일매일 약의 기전을 공부하고 약의 정보를 조사하면서도, 정작 그 약을 투여받는 사람들의 모습은 볼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이따금 다큐멘터리나 기사에서 보는 그이들의 모습은 참 새삼스럽다. 글씨로만 보던 것의 실체를 마주하는 기분이다.
어쩌다 꽤나 혁신적인 신약이 나와도, 터무니없는 가격 때문에 혹은 너무나 엄격한 허가 사항 때문에 사용해보지도 못하는 환자도 많다. 세상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약들이 있지만, 모든 병에 치료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적절한 약을 써도 병세가 나빠지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내가 이론적으로는 마일드하다고 판단할 법한 부작용임에도 사실 그네들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워하고 삶의 질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이론과 실제는 대체로 다르다. 이상으로 가기 위한 과정은 절대 이상적이지 않다.
몇 년 전 석사를 졸업하고, 제약업계로 취업을 준비하면서 내가 배운 지식이 조금이나마 세상을 이롭게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생활 직장인이 되어버린 지금은, 어쩌면 그냥 그때그때의 일을 해치워버리는 타성에 젖은 5년 차 월급쟁이겠지만, 그래도 매체를 통해 만나는 그네들에게 언젠가는 내가 조금이나마 영향을 끼친 약이 쓰이게 된다면 얼마나 감사할까, 하는 마음을 늘 한구석에 지니고 있다.
3.
특히 오늘은 좀 힘든 날이었다. 희귀 질환 관련 세미나 중 케이스 스터디에서 본 희귀 유전병을 앓는 아이들의 영상에 눈물이 왈칵 솟았다. 목을 가눌 수 있게 된 것이, 자가 호흡이 가능하게 된 것이 너무나 기적 같은 일인 작고 여린 아이들. 뒷자리에 앉아 자꾸만 차오르는 눈물을 숨기느라 혼났다. 아무리 내가 이쪽에서 일을 하고 있더라도, 나는 이 세계의 너무나 먼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이 오늘은 유독 슬프고 무력했다. 훗날 나를 돌아봤을 때, 스스로 꽤 가치 있는 연구자로 일했노라 자부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밤이다.
4.
어쨌거나, 이부프로펜 만세! 이부프로펜만큼이나 값싸고 효과 좋은 약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