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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산 Apr 28. 2024

총액계약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일까

의새 하한가에 상폐각까지 나오는데, 그래도 의대 간다고? 와...

#1

살다 보니 벌써 2달이 지났습니다. 주인이 비운 가게에도 손님이 왔다 간 발자국은 남아있네요. 심지어 라이킷과 댓글을 남겨주신 분도 계시는데, 감사하면서도 답을 못 드려 미안합니다.


변명일 뿐이지만, 개인적인 환경의 변화 때문에 적응과 생존만으로도 하루를 다 소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시간이 없었고요.


아시다시피 한국 의료계가 매우 혼란하므로 브런치에 남기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습니다. 정 시간이 없다면 브런치라도 트위터만큼의 글은 남길까 싶었습니다만, 그것조차 막상 쓰려니 의욕이 안 나더라고요. 확실히 요즘은 뭔가 공허하고 우울한 기분이 늪처럼 기저에 깔린 느낌입니다. 그건 개인적으로 힘들어서인지, 의사 집단을 악마화하는 게 정의라는 정부와 허락된 집단 괴롭힘으로 쾌감을 느끼는 여론을 보며 PTSD가 와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둘 다이겠죠.


그래도 오늘은 글 써야지 싶은 의료계 사건이 어제 있었습니다. 서론은 잡설로 길지만, 본론은 간단히 가겠습니다.


#2

왜인지 모르겠지만, 언론은 아직도 '의대 증원'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데, 총선도 끝나고 벌써 '아무래도 좋을' 식은 떡밥이 되고 있다. 문제는 의정 갈등의 혼란 상황을 틈타 여러 의료 정책이 충분한 논의 없이 일방 통보식으로 기습 통과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제 대한내과학회 춘계학술대회가 있었다. 일반적으론 다른 과 선생님들은 내과 학회에 관심이 없었을 텐데, 의사 집단을 분노하게 만든 사건이 터졌다.


해당 학회에 초청된 보건복지부 관계자가 '총액계약제'를 내과에서 시범 도입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적진(?)의 한복판에서, 심지어 의사를 나무라는 투의 격양된 목소리로 자기 할 말만 하고 떠났다고 한다. 폭탄 발표 후 의사 커뮤니티는 난리가 났다.


#3

총액계약제는 왜 도입될 수밖에 없고, 왜 문제인가?


싸고 질 좋은 의료를 그것도 신속 정확하게 제공받는 건 환상이다. 한국은 그걸 어찌어찌 겉보기엔 잘 해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건보재정에 위기가 와서 일단 몇 가지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국민은 그동안 제공받던 의료 서비스에 관성이 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으니, 정부는 임시방편으로라도 파국을 다음 정권으로 미뤄야 한다. 그 과정에서 공급자(=의사)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 의사가 의료행위를 하고 보상받는 방식은 '행위별 수가제'이다. 의사가 이것저것 제공하는 서비스 하나하나에 값어치를 매겨 주는 것이다. 당연히 열심히 일 하면 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으므로 의사가 노력하는 요인이 된다. 하지만, 과잉 진료의 원인이 되기도 하므로 정부는 이를 심사하는 기관을 두고 매우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다. 자신만의 기준을 놓고 이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 의사에게 돈을 주지 않는다. 공무원과 의사는 항상 갈등할 수밖에 없지만, 어쨌든 잘 굴러만 간다면 이상적인 시스템이다.


하지만, 인구가 계속 감소하니 건강보험 재정도 위기가 찾아온다. 정부는 의사에게 주는 돈을 더욱 옥죌 필요가 생겼다. 급기야 "야! 의사 너희가 아무리 노력해 봤자 줄 수 있는 총액은 이것뿐이야! 이걸로 너희끼리 지지고 볶고 싸워서 나눠 가져!"라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게 '총액계약제'이다.


정부가 공급자(=의사 등) 집단에 줄 수 있는 의료비 총액을 계약하는 제도. 정부의 의료비 지출을 극단적으로 줄이기 위한 방법이다. 총액계약제 시스템에서 의사는 열심히 일하든, 말든 아무런 보상이 없다. 솔직히 그럼 누가 열심히 일을 하겠는가? 그래서 의사의 경쟁을 유발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한다. 그게 '가치 기반 지불제도'라고 발표한 제도이다.


가치 기반 지불제는 기본적으로 가치 있는 의료를 제공하는 의료기관에는 인센티브를 주고, 그렇지 않은 의료기관에는 디스인센티브를 주는 제도이다. 그런데 그 '가치'라는 게 굉장히 정부 편의적으로 주관적인 개념이라 큰 갈등을 유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열심히 일하는 의사에게 돈을 몰아주겠다는 건데, 어차피 총지줄은 고정되어 있으므로 상대적으로 덜 (?) 일한 의사의 몫을 빼앗는 셈이다. 회사로 치면 총인건비를 정해놓고 "열심히 일한 비율대로 월급 줄 거야"라고 말하며 직원끼리 싸우게 만드는 방식과 동일하다. 당연하지만 총인건비를 넉넉하게 준비한 것도 아니다. 문제는 인건비를 아끼는 회사인데, 직원들은 당장 내 월급을 뺏어가는 다른 직원을 시기하게 만드는 방식 (노동법으로 금지되어 있지 않나?). 말만 고상할 뿐 본질은 치졸하고 음습하다.


결국 '가치 있는' 의료를 제공할 수 있는 대형 병원이 총액계약제의 재원을 독식할 수밖에 없고, 지금도 남아도는 잉여 '전문의'들은 살아남을 길(=개원)이 더욱 없어졌다. 이걸 의사와 상의 하나 없이 진행하는 걸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데도 젊은 의사들이 필수과를 전공할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너무나 많이 건너버린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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