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키우는 사람들은 다 안다. 책이나 노트북, 식탁이나 택배 위 심지어 내 배위는 물론 TV나 모니터 앞에 고양이가 있다. 고양이는 내가 보지 않는 곳에 있지 않고, 내가 볼 곳에는 가끔 미리 먼저 가 있기도 한다. 시선이 머무는 곳에 고양이가 늘 자리하고 있다. 영상이든, 글이든 냥 몸뚱이가 콘텐츠의 절반 이상을 가리지만 나는 딱히 비키라고 하지 않는다. 어차피 또 똬리를 틀거나 오히려 그쪽에서 더 짜증을 내기 때문이다. 물론 놀다 지쳐 아님 간밤에 악몽이라도 꿨다면(고양이도 나이 먹을수록 정말 꿈을 자주 꾼다. 잠꼬대도 한다.) 그날은 조용한 곳에 숨어 깊이 잔다. 잘 때가 제일 이쁘다는 말은 고양이에게도 해당한다. 평소에도 이쁘지만 잘 때가 진짜 더 예쁘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내가 놀고 싶거나 안고 싶을 때는 굉장히 귀찮아하면서 캣타워 꼭대기로 올라간다. 어쨌든 집에서 뭐라도 할라치면 나는 반드시 고양이가 잠든 시간을 활용한다. 지금도 곤히 자고 있다.
도도하고 우아한 느낌을 주는 고양이는 근래 들어 더욱 잘 팔리기 시작했다. 각종 광고는 물론 카페나 식당, 지자체의 홍보 작업에도 고양이가 동원된다. '도둑'이라는 어두운 과거와 작별한 고양이들은 '냥이', '집사'라는 키워드를 달고 보다 귀엽고 또 지켜주고 싶은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멍청하고 어딘가 좀 비어 있는 모습을 통해 최근에는 인간미(?)까지 얻고 있다. 고양이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개가 가진 이미지와 비교할 때 더 뚜렷해진다. 주인에 대한 충성심, 어딘가를 지키고 있는 늠름한 모습, 조련 가능한 훈육 태도, 다른 개와 어울리는 사회성. 이런 모습이 개와 연결돼 있다면 정확히 맞은편에 고양이의 특성이 자리하고 있다. 자기 중심성, 독립성, 다른 것들에 대한 무관심. 이 같은 특징은 한때 고양이가 반려동물로써 적합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실제로 불과 10몇년 전까지만 해도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우리 집 고양이도 딱 10년 됐다.) 고양이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사랑, 그 역사적 유구함을 생각한다면 그 큐티 잭팟이 한참은 늦게 터진 것이다.
고양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보고 있으면, 달라진 사회 분위기도 함께 느껴진다. 형제자매 없이 가족의 무한한 관심을 받고 자란 아이들, 정해진 체계와 틀에 피로감을 느끼고 멀리 떨어져 지내는 독립적 스타일, 1인으로 수식되고 있는 각종 사회적 환경, 관심은 필요하지만 그건 언제나 내쪽에서 원할 때만 제공하라는 주도적 사랑관. 전반적으로 쿨하고 시크한 걸 추구하는 사회적 모습과 고양이들이 제법 잘 어울리는 형국이다. 그러니까 애정을 위해 내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내가 있는 곳에 관심이 따라와야 한다는 생각이 탑재된 것만 같다. 물론 이 같은 자의식은 부작용도 있겠지만 더 큰 가치를 낳을 수도 있다. 문화적으로 그 정서가 이어지면 풍성함을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적 패권을 위해서라도 지나치리만큼의 오만함은 필수 요건이기도 하다. 명품과 사유의 흐름을 지금도 꽉 쥐고 있는 서유럽의 문화자본도 그 오만함을 멋으로 추종하는 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그들의 깊은 우울도 한 몫했지만.) 따라서 이런 '필요한 무관심', '심리적 거리두기'와 같은 일종의 고양이 같은 성질이 우리 사회에 유통되고 있다는 것은 어두운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의 다양성이 발현될 수 있는 좋은 예후일 수도 있겠다 싶다.
어릴 적 장래희망을 말할 때면 나는 꼭 주위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직업을 골라 적었다. 일명 장래희망 4종 세트. 판사, 검사는 기본이고 의사와 과학자도 가끔 넣었다. 나중에는 교사와 회사원, 기업가 같은 직업도 포함됐지만 슬프게도 예술가나, 운동선수, 인플루언서 같은 직업은 당시 내 머리에는 없었다. 4지선다 같았던 장래희망 제출하기를 생각해보면 요즘 초등학생들이 '운동선수', '크리에이터', '가수', '제빵사' 같은 직업을 희망한다는 것은 다양성의 밴드가 확실히 늘었다는 느낌을 준다. 수익 있는 곳에 세금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정체성까지 포함돼 있기 때문에 이처럼 직업의 다양성은 정체성의 다채로움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물론 다양성은 기회비용 리스크를 더 크게 만들기도 한다.) 시선이 모인 곳, 사람들이 쳐다보는 곳,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곳에 자신을 놓고 싶었기에 그동안 우리는 사회의 소실점을 종종 나의 시점과 동일시했다. 하지만 전보다 넓어진 이 같은 소실점 확장 공사를 보고 있으면, 꽉 짜인 사회 시선이 좀 더 확대된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계지도를 볼 때도, 그림을 감상할 때도 우리는 누군가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짜여있는 시점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좀 다르다.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리다. 우리에겐 고양이가 있기 때문이다. 관점과 시점이 달라지면 스포트라이트도 움직인다. 저마다 자신만의 조명을 가질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양이를 키워야 한다. 아니 키울 수 있어야 한다.
(!) 민간요법 대유행 시기, 콘드로이틴을 대신해 살다 간 고양이들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