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면 승부

by 배준현

샤워를 마친 후 제 모습에 심취한 아저씨들은 헤어드라이어를 들고 거울 속 자신에게 찐한 인상을 날리며, 영화 <아저씨>의 원빈처럼 머리 깎는 몹쓸 시늉을 남발한다. 그리고는 급기야 자신 안에 밀봉한 영화 친구의 장동건을 꺼내어 하정우의 대사를 맛깔나게 친다. “살아있네” 하지만 옆으로 몸을 돌려 D라인을 확인하면 이내 고조된 기분은 금세 가라앉는다. 다시 흥을 돋우기 위해 얼른 티셔츠를 입고 곧장 장국영이 된다. 빰빠바바바밤.. 빰빰... 빠바밤!


누구나 어느 정도는 자기 모습을 미화한다. 많이 돌아다니는 짤 중에 남성과 여성이 거울 앞에서 자기 외모를 다르게 바라보는 삽화가 있다. 여성은 원래의 자신보다 더 살찐 것처럼, 남성은 더 근육질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걸 보면 확실히 자기 외모에 대한 후한 평가가 남성 쪽에서 더 쉽게 이루어지는 것 같다. 아마도 남성은 그런 류의 자신감까지 긁어모아야지만 직면했던 여러 일들에 맞설 수 있지 않았을까? 생존경쟁, 짝짓기 등 다양한 경쟁에 노출돼 있는 정도와 그 스트레스가 수컷 집단에 더 높았을 것으로도 예상한다. 특히 짝짓기는 개체의 생명을 좌우하는 중대사이기에 자기 주술과도 같은 착각이 더욱 요급했을 것이다. 원래 불안하고 약할수록 강력한 무언가를 더 갈구하기 마련이다. 자신에 대한 환상과 오인은 바로 이런 약점 보완을 위한 생존본능의 기제로 작동했으리라.


정면으로 응시한 내 모습이 환상을 자아낸다는 이야기는 사실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나르시시즘의 어원이 되는 나르키소스, 수선화의 꽃말인 자기애는 물속에 비친 자신에 대한 환상적 이미지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연못에 빠져 죽게 되었다는 슬픈 우화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 역시 거울이론을 통해 유아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서 신체의 통합감과 어느 정도의 자기애를 경험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분열된 자아관을 경험하며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구조 속에 림보처럼 갇히게 된다. 이걸 풀어서 정리하면 거울 속 정면으로 응시한 나 자신에 대한 우리의 환상처럼, 타인에 대한 우리 시선도 늘 정면을 볼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지닌다는 말이다. 때문에 우리는 타자에 대한 넓은 이해보다 그들이 연출한 환상만을 보게 된다. 심지어 보여주고 싶은 자신만을 전시하는 SNS나 여타 매체들은 타인에 대한 판타지의 비대함을 구축하면서도 동시에 왜소한 자기 관념을 만들 수 있다. 이는 다시 무차별적 무력감을 제공하는 원인이 된다. 그러니까 타자의 전시된 나르시시즘의 정면만을 응시한 채 우리는 환상 속에서 자신을 더욱 초라하게 재단하는 것이다. 정면은 환상을 제공하지만 실상을 제공하진 못한다. 세상의 다양한 일들도 자신의 이면보다는 정돈된 정면만을 보여주기 원한다. 매끄럽고, 부드럽고, 반짝거리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우리 모두는 세상과 나 그리고 타자에 대해서 일종의 정면의 환상을 품는다.


1700년대 중반 활동한 영국화가 조지프 라이트의 <코린토스의 소녀>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한 소녀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때 특이한 것은 소녀가 애인의 정면 얼굴이 아닌 벽에 비친 옆모습의 그림자를 따라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한 개인의 여러 정보를 프로필이라고 한다면 회화에서 이 프로필이라는 단어는 측면을 그리는 화풍을 의미한다. 즉, 사랑하는 사람의 진짜 모습은 정면이 아니라 오히려 측면에서 더 잘 드러날 수 있다. 이외에도 수감자의 모습을 촬영한 일명 머그샷도 정면과 측면 사진 모두를 기록한다. 흉악한 정면 모습과는 달리 측면 사진에서 그들의 위축과 불안, 정서적 심경 같은 것들이 더 잘 읽힌다. 일제가 찍은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의 사진을 보더라도 그 당당한 정면 모습과는 달리 측면의 모습에서 조금은 연약하고 불안해 보이는 10대 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측면이 정면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줄 때가 있는 것이다.


얼마 전 방송에서 남이 보는 내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이 잠깐 소개됐다. 사실 거울 두 개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거울 속 비친 내 모습을 다른 거울로 반사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입체감과 윤곽이 선명해지고 남이 보는 시점으로 나를 볼 수 있다. 그 어렵다는 자기 객관화의 손쉬운 비주얼라이징인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3차원적 시선으로 자신을 확인하면 낙담하거나 실망한다. '이게 진짜 내 얼굴이라고?' 평생을 알고 지내던 자신인데 무척 낯설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소리도 마찬가지이다. 녹음한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자연스럽게 뭉크의 절규처럼 포즈를 취한다. 그리고 이내 겸손해진다. 우리가 타인의 시선과 의견을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다. 나르시시즘과 자기 객관화 사이의 간극을 측면 시점으로 응시할 필요가 있다.


권투나 격투에서 아웃복싱을 구사하는 선수들은 측면을 중시한다. 야구의 사이드암 투수도 측면의 강점을 활용한다. 한국의 레전드 축구 선수들도 주로 윙어, 측면에서 두각을 드러낸다. 토트넘 최고의 윙어로 평가받는 손흥민도 측면 공격수다. 임진왜란 조선을 방어했던 이순진 장군의 학익진도 측면의 중요성을 살렸다. 측면이 정면보다 위협적일 때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통사고도 정면과 후면보다 측면 충돌이 가장 위험하다. 그래서 늘 측면 주시에도 신경 써야 한다. 사실 측면이 아닌 정면은 없다. 생각보다 꽤 많은 일들이 측면에 위치해 있다. 한국 사회의 측면, 문화적 측면, 정치적 측면, 사회적 측면, 경제적 측면 등등 이 모든 면들을 합치면 다시 정면이 된다. 때론 정면이 측면과 이면에 숨어 자신의 감추기도 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다시 하나의 측면을 이룬다. 우리가 측면에 대한 응시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정면에 비친 내 모습에 대한 환상도 비루한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현실도 모두 우리다. 그래서 사실 측면 아닌 정면은 없고, 정면 아닌 측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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