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유동성 파티

by 배준현

감정도 자원이다. 요즘은 감정이 꼭 화폐 같다. 사람들은 감정을 경제관념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주변을 보면 보편적인 '인간 감정'은 많이 사라지고, 매뉴얼 같은 '인공 감정'만이 부쩍 늘었다. 감정을 수식하는 용어도 달라졌다. '따뜻한, 친밀한, 행복한' 같은 말들은 줄고, '소모, 낭비, 쓰레기통' 같은 수식어가 주를 이룬다. 심지어 '감정적이다'라는 말은 상대를 모욕하는 언사로까지 받아들여진다. 소소한 정서교류를 사람들은 쓸데없는 감정 소모로 인식하기도 하고, 감정을 주고받는 행위 역시 극도로 자제하려고 한다. 이런 사회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나를 이상하게 여긴 적도 있다. 하지만 자조 섞인 태도로 일관하기에는 현실의 온도가 너무나 차다. 인간의 온도와는 맞지 않다. 인공지능 시대가 본격 펼쳐지기에 앞서 개개인은 미리 A.I. 같은 '심장 없는' 소프트웨어를 장착하고 있다. 물론 나도 크게 다를 건 없지만 말이다.


마트나 백화점, 식당이나 카페에 가면 예전과는 뭔가 달라진 느낌을 받는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문구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고객이 눈치를 보게 되는 '귀한 집 자식들'의 서빙을 보고 있노라면 이상한 시대의 이상한 상황을 이상하게도 자주 목격한다. 특히 톰, 앨리스, 앤드류, 매튜, 린디 등 외국계 프랜차이즈에서 일하는 수많은 '한국의 아들, 딸'들은 기계 같은 능란한 응대를 통해 자신의 유능함과 정서적 고양을 한껏 만끽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끔 고객을 나무라거나 훈계조로 대하는 태도를 볼 땐 아찔하기도 하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런 접객 문화에 항의라도 한다면 진상조사 없이 곧장 '진상'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다. 감정 없는 사회에서 감정을 유발하는 행위는 단죄 대상이 것이다.


고객센터도 마찬가지다. 가짜 감정과 기계음으로 처리된 ARS 멘트를 따라가다 보면 언제나 '인내의 협곡'에 도달한다. 잘 참으면 상담사와 통화하고, 못 참으면 이 과정을 또 반복해야 한다. 그나마 연결이 돼도, '사람인지 기계인지' 모를 정도의 매뉴얼을 상담사는 또다시 읊조린다. '통화품질향상'을 위해 녹음한다는 안내 메시지는 이미 고객들에게 자기 검열로 다가온다. 물론 감정노동 종사자들을 위해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필요하다. 하지만 이 같은 응대 시스템은 양쪽 모두에게 긴장과 과부하를 낳고 심하면 적대적 상황으로까지 이어진다. 긴 기다림 끝에 상담사와 연결이 돼도 수화기 너머 마주한 두 사람은 서로를 인격체로 느끼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쌍방이 피해자가 되고, 양방이 가해자가 된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해소되지 못한 감정은 위험하다. 억울함도, 답답함도 모두. 이런 정서적 응축 상태는 긴장을 유발하고 하나의 문제에 온 에너지를 쏟게 만든다. 심하면 신경정신적 질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벙어리 삼룡이'와 '백치 아다다'처럼 입은 있지만 말은 못 하는 '냉가슴'이 될 수도 있다. 표출해야 할 적절한 감정이 때와 장소를 찾지 못한다면, 표류 끝에 곪거나 썩을 수 있다. 그래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듣기' 즉, 의견 청취 때문에 높은 수가를 요구한다. 이해하면서 듣기란 이처럼 무척 힘든 일이다. 감정을 해소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돈과 시간 그리고 약을 써서라도 해결하려 든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사회적 감정이다. 이는 손쉽게 다룰 수도 없고, 진단과 처방을 내리기도 힘들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모든 구성원들의 소통과 감정의 기준이 된다. 사회적 감정은 개인의 친밀도나 대화 방식, 타자 감수성과 공동체에 대한 신뢰 수준을 규정하는 슈퍼파워를 지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속감정'은 모두 온라인에 외주를 주고, '겉감정' 만이 실제 만남과 사회에서 널리 유통된다. 그나마 긍정적 시선으로 보자면, 디지털 세상은 속감정 중에서도 '악감정'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하수종말처리장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 같은 감정의 대분기에 개인들은 새로운 만남 자체를 힘들어하고 타인을 스트레스 그 자체로 여긴다. 자기를 최대한 숨기고 날이 선 곳은 숱하게 연마하여 이견 없는 상태, 즉 매끄러운 상태를 유지하려 애쓴다. 다양한 공론이 오갈 거라는 정보통신기술에 대한 장밋빛 전망은 자극과 선전의 난무로 인해 이미 누렇게 변한 지 오래다. 중요한 사실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타인 없인 절대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자존도, 인격도, 고유함도 결국 타인의 존재를 통해 '나다움'을 형성하고 승인받는다.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개인들의 '자기만의 방'도 결국에는 타자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 위한 지극히 사(회)적인 공간이 되고 있다. 온갖 감정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 세상에서, 모두가 좁디좁은 '태풍의 눈' 안으로 피신하기 바쁘다.


감정과 물은 흘러야 썩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조건 많이 흘러도 좋지 않다. 언제나 그렇듯 적절함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감정을 해소하고 보충하려 애쓴다. 운동, 여행, 성취, 연속된 소비는 이런 고양된 정서를 일시적으로나마 보충한다. 그러나 결코 지속되진 않는다. 물이 그렇듯, 감정 역시 흘러가는 것이기에 가뭄과 홍수에 취약하다. 기쁨과 행복에 대한 강박, 과대 자기에 대한 망상을 채우기 위한 모든 노력은 중독성향을 띠고, 짧은 행복감과 고양된 정서는 플래시 메모리처럼 순간 번쩍했다 사라진다. 영원하고 확실한 행복을 갈구하며 새로운 자극에 눈을 돌린 끝에 쉽게 자존과 쾌락을 채울 수 있는 사치재 소비를 발견한다. 할부와 대출이 난무하는 이 같은 대환장의 머니쇼는 단순한 유동성 파티로 끝나지 않는다. 이는 곧 감정의 유동성 파티와도 연결된다. 그리고 이 같은 '감정 당겨 쓰기'는 필연적으로 '감정 가뭄'을 유발한다. 도파민에 중독된 뇌처럼 말이다.


다양한 감정의 전시장이라 할 수 있는 드라마, 영화, 각종 콘텐츠들은 우리에게 여러 감정을 제공하는 감정 보충제의 역할을 수행한다. 말라가던 정서적 구간에 일시적으로나마 물을 대준다. 하지만 새로운 길을 내지는 못한다. 즉각 보급, 즉각 소비라는 인스턴트 문화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수분공급은 해도 지속가능한 길과 골을 파기에는 역부족이다. 타자라는 실체, 공존이라는 실재가 없기에 그렇다. 의미 있는 타자와의 진실한 교류는 감정의 유동성을 지속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자, 가장 오래된 방법이기도 하다. 영원한 관계, 동화 같은 만남이 아니더라도 진실한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한 사람의 생에 큰 정서적 물길을 내어주기 때문이다. 물론 타인과 교류하고 친밀감을 쌓는 데는 큰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요즘에는 더 그렇다. 그래서 외려 더 큰 정서적 자원과 감정이 필요한 시대가 됐다. 그래서 나의 감정이 넘치거나 고갈되지 않게 잘 신경 써야 한다. 감정도 자원이기 때문이다.


(!) 부의 트리클 다운 효과는 이미 실체 없는 거짓으로 판명 났다. 하지만 정서의 낙수 효과는 가능하지 않을까? 부는 전염되지 않지만, 감정은 전염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기에 상황은 더 나빠질 수도 있다.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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