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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서율 May 17. 2023

나는 돈값을 하고 있을까?

좋아하는 일로 돈 벌기 시작하면서 생긴 고민


"서율씨, 일해보니 어때요?"

"너무 재밌어요! 노는 거 같아요"

입사하고 일주일이 지난 시점, 대표님의 물음에 나는 맑은 눈의 광인처럼 해맑게 대답했다.


지난 10년 동안 직장을 구할 때의 기준은 연봉, 워라벨, 복리후생 같은 현실적인 조건들 뿐이었는데

마지막 직장에서 생긴 분쟁으로 화끈하게 들이박고 퇴사했더니 제대로 현타가 와서 이번 직장은 오로지 ‘재미있는 업무’에 모든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예전엔 연휴 기간에 국내로 해외로 여행을 떠났는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집 앞 카페에 노트북을 들고 가서 갑자기 머릿속에 섬광처럼 떠오르는 재미있는 스토리를 워드에 옮기는 게 나에겐 '노는 행위'가 되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그냥 재밌으니까 혼자 써 내려간 스토리들이 이번 취업에 결정적인 포트폴리오가 되다니.. 놀이의 결과물로 밥벌이를 만든 셈이다.


게다가 방송 작가나, 유튜브 시나리오 작가들의 업무는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것 외에도 자료조사나, 기획안 작성 같은 자잘한 업무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나는 철저하게 재미있는 업무만 하는 직장에 취업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시나리오‘만’ 쓰면 되는 희귀한 업무 조건의 회사를 찾아냈다.


이 회사는 영미권 구독자들을 타겟으로 스릴러/공포 애니메이션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회사였는데 대표님이 그동안 채널을 열심히 키워놓은 덕분에 160만 명이라는 엄청난 구독자 수가 있어서 내 시나리오가 백육십만 명의 사람들에게 노출된다는 것도 매력적이었고, 내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스릴러라는 장르를 다루고 있다는 것도 너무나 적합한 조건이었으며, 훗날 최종 목표인 영화나 넷플릭스 시나리오의 포트폴리오가 될 수 있으니 이곳에서의 창작물들은 모두 나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었다.


게다가 번역도 따로 붙어서 영어실력을 걱정할 필요도 없이 오로지 시나리오만 하루 종일 쓰면 된다니. 나에게는 놀면서 돈을 버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와 똑같이 생각하는 작가들이 많은지 지원자가 꽤 많이 몰렸던 공고였는데 이 바닥에서 갓 태어난 신입인 내가 뽑혔다는 게 너무 기뻤다.


"와 놀면서 돈을 벌다니!! 이건 꿈같은 일이야!!"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고 기쁜 마음이 주체가 안 돼서 집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한참 동안 춤을 췄는데 카톡창을 켜놓은 핸드폰을 들고 춤을 췄더니 화면에 자꾸만 흔들기 기능이 뜨는 게 너무 웃겨서 조증 환자처럼 껄껄 웃어댔다.


대표님은 심지어 연봉도 내가 제시한 금액에 맞춰주셨다. 잡지사 에디터로 일할 때 배고팠던 기억 때문에 글쟁이로 전직을 하면서 걱정이 많았는데 재미있는 일만 하면서 배고프지 않아도 되니까

일하는 건 어떠냐는 질문에 노는 것 같이 재밌다고 대답할 정도로 행복한 광인이 되었다.


매일 목에 메고 다녔던 사원증을 10년 만에 내려놓고,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고, 나보다 어린 대표님과 호흡을 맞추고, 대부분 재택에서 근무하는 자유로운 분위기도 신선했다.


"급하지 않아도 돼요, 천천히 생각해서 쓰세요 결과물만 좋으면 되니까"


그러나 이곳엔 함정이 있었다.

"내가 돈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라는 의문이 매일같이 나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회사가 정해놓은 업무 포지션의 부속품이 되어 시키는 일만 하면 되니까 이런 압박감이 전혀 없었는데


이곳은 아무것도 없는 하얀 백지를 주면서 

"너가 좋아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려봐~ 그럼 원하는 연봉을 줄게! 급하지 않아도 돼 결과물만 좋으면 되니까" 라고 하니 정말 이 돈을 받아도 되는 건지 의문스럽고, 내가 마음대로 그린 그림이 돈값을 하는 건지 걱정되고, 나는 이 조직에서 필요한 사람이 맞는지 의심되는 것이다.


그동안 애니메이터 분들만 근무했고 시나리오 작가는 처음 채용한 거라 애초부터 없어도 되었던 직군일뿐더러, 채널이 가진 색깔과 전혀 다른 색깔을 가진 나의 시나리오는 대표님에게 도박과도 같은 시도였고


조회수가 떨어져서 응급조치로 시나리오 작가를 채용한 거라 나는 입사하자마자 구급 대원처럼 채널을 살려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숨이 막혔다.


"서율씨, 이번 주 내내 재택근무라 좋겠어요"

옆자리 애니메이터 분께서 이야기하는데 전혀 와닿지 않았다.


"아니요, 재택근무면 긴장이 풀려서 작업량이 더딜 때 가 있어요 마음 같아서는 대표님을 우리 집으로 모셔와서 3시간만 뒤에 앉혀놓고 글 쓰고 싶어요" 라고 대답했다. 몸이 편할 바엔 나를 압박해서 더 창의적인 결과물을 얻는 게 마음이 편했으니까


대표님은 오랜 고심 끝에 채널의 색깔을 바꾸는 도박을 선택하셨다. 이제 내 시나리오는 백육십만 명 구독자들이 보며 평가할 거다.

그건 조회수와 댓글로 바로 나타나고 곧 내가 돈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증명되겠지..


이건 마치 영화 '미드소마' 같다. 겉으로는 백야의 아름다운 꽃밭에서 순백의 옷을 입은 친절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즐거운 축제지만. 사실은 그 어느 곳보다 잔인한 축제.


하지만 나는 다시 마음 편한 과거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 두려움을 감당할 만큼 재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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