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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서율 Nov 14. 2023

고통의 대물림 끊기

부모는 과거고 나는 현재이며 내 자식은 미래다


유튜브에 요리 레시피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혼자 사는 30대 여자가 묵묵히 반찬을 만드는 영상이었는데 요리 레시피보다는 그저 소박한 브이로그 같았다.


영상의 화질도 좋지 않았고 얼굴도 내레이션도 없이 오직 자막으로만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나랑 비슷한 나잇대인데도 시장에 가서 만원 한 장으로 알뜰하게 장을 봐와서 이것저것 반찬을 만들어 내는 야물딱진 솜씨에 연신 감탄하면서 보았다.


그렇게 그녀의 요리 솜씨에 홀려 영상 몇 개를 더 보게 되었는데 그녀는 대인기피증이 있어서 사람을 마주하는 게 어려워 설거지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설거지가 힘들지만 사람과 마주 볼 일 없이 벽만 보고 일하면 되니 마음이 편해서 좋고, 거의 반 백수처럼 수입이 적은 상태지만 수입에 맞춰 소비를 줄이기로 했다며 자신의 힘겨운 삶에 대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자막으로 이어나갔다.


한창 사회 활동이 왕성해야 할 30대 청년이 어째서 사람이 두려워진 걸까?


그녀의 가정사에 대한 이야기 속에 모든 이유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폭력으로 툭하면 가족들이 두들겨 맞기 일쑤였고 어머니는 외상으로 머리 수술까지 하셨으며, 그녀도 아버지한테 목이 졸리는 강도 높은 폭력에 시달렸는데 참다못해 어머니에게 여러 차례 이혼을 권유해 보았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맞으면서도 결혼생활을 이어나가며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녀는 어머니의 박복한 성장과정을 이야기하며 세상 물정 모르는 가엾은 사람이라고 동정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용돈도 드리고 어머니가 부정적인 이야기를 자주 하셔도 꾹 참고 들어주고 있다며 자신이 어머니를 끝까지 지켜드릴 거라는 다짐으로 영상이 마무리되었고 영상 밑에는 그녀의 효심에 감동한 사람들의 댓글이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전혀 감동하지 않았다. 가난과 고통이 대물림되는 전형적인 케이스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폭력으로 생긴 트라우마가 대인기피증으로 이어져 일상생활이 어려워졌고, 자신도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어머니의 부정적인 신세한탄을 들어주는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야만 했으며, 설거지 파트타임으로 겨우 생계만을 이어가고 있는 처지에 특별히 거동이 불편하신 상태도 아닌 어머니의 생계까지 책임져한다니. 그녀에게는 부모라는 존재는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만드는 족쇄일 뿐이었다.


야무진 요리 실력만 봐도 대인기피증이 없었다면 자신의 인생을 충분히 잘 꾸려나갈 수 있는 사람이었을 텐데 가엾은 엄마를 지켜야 하는 딸이라는 역할에 인생의 프레임이 맞춰져 있으니 자신의 자아는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자식은 부모의 사상 속에서 자라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도 객관적인 시야로 부모를 바라보는 게 어렵다.  


그녀는 어머니를 자신의 인생을 희생해서라도 지켜야 할 존재로 여기지만, 사실 어머니는 자발적으로 결혼생활을 이어나가는 걸 선택하신 거고, 그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자식들이 폭력에 노출되었으며, 현재 경제 활동을 하시는데 지장이 없는 상태다.


그녀가 현시점에서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효도가 아니라 부모를 당분간 멀리하고 자신의 정신건강 치유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나부터 올바르게 설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효도도 제대로 할 수 있다.  


부모는 과거고 나는 현재이며 내 자식은 미래다. 잘못된 과거를 수습하기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생긴 리스크는 미래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이것이 몇 대에 걸쳐서 세습되는 고통과 가난의 대물림이다.




이런 비극의 악순환을 끊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타임 루프처럼 영원히 반복되는 세습을 나를 기점으로 완전히 끊어버리겠다는 굳은 결심부터 필요하다.


이런 결심이 섰다면 부모가 만든 세계관을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관을 건설해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이 필요한데 이제부터 그 방법을 간략하게 나열해 보도록 하겠다.


1.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 비교집단을 경험하라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내가 속해있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기 객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주관적인 기준으로 만들어진 인수인계서로 삶을 배워나가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시야를 갖기 위해서는 또 다른 비교집단이 필요하다. 내가 성장한 지역, 내가 성장한 환경, 내가 성장하면서 알아온 인맥들을 벗어나 전혀 다른 집단과 커뮤니케이션을 해봐야 비로소 내가 속해있는 집단을 객관적인 시야로 볼 수 있게 된다.


매일같이 모여 소주를 두세 병씩 마시는 집단에 있던 사람들은 그게 당연한 일상인 줄 알지만, 최대한 술을 멀리하는 웰빙인 집단과 어울리다 보면 원래 있었던 집단이 알콜 중독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2.  그릇된 죄책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인생부터 개척하라

대인기피증을 앓는 그녀는 '어머니를 지키는  딸' 이라는 역할을 삶의 목표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의 삶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부모가 만든 세계관에 종속되게 된다. 자신의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버리는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는데도 부모가 족쇄가 되어 발목을 잡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성적이 좋은 인재가 어려운 집안 형편에 보탬이 되기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생업에 뛰어드는 경우가 과거를 위해 미래가 희생당하는 비극의 예로 들 수 있다.  


가정을 부양하는 건 가장의 몫이다. 아직 사회에서 자리도 잡지 못한 자식이 부양의 의무를 강요받는 건 잘못된 구조를 가진 가정이다. 이런 거꾸로 된 구조에서 자라온 자식들은 부모를 호강시켜드리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자신이 누군가를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기회조차 없었는데도 말이다.


성인이 되면 부모는 부모의 인생으로 가야 하고 나는 나의 인생으로 가야 한다. 가족은 서로의 인생을 갈아 넣어서 희생해야 하는 관계가 아니라 각자 독립적인 인생을 살되 정서적으로 기댈 수 있는 관계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릇된 죄책감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는데 온 힘을 다해야 한다.



3. 부모를 원망하는 마음을 깨끗이 비워내야 한다.  

부모를 부양하느라 부모의 삶과 분리되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부모를 원망하느라 부모의 삶과 분리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설사 부모복이 없어 상처로 얼룩진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해도 부모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부모님이니까 원망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철저히 자신의 미래를 위해 원망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나의 남은 인생과 나의 후손을 위해서 고통의 대물림을 끊으려면 지난날의 상처를 리셋해야만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다. 원망하는 마음을 품는 건 과거를 회상하는 행위이다. 아버지의 폭력에 분노와 원망을 품은 아들이 똑같이 폭력을 휘두르는 이유는 과거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받아본 사랑만큼만 타인에게 줄 수 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건 부모 또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에 대한 분노를 연민으로 바꿔보면 마음이 훨씬 편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라는 존재가 나를 너무나 괴롭게 하고 인생을 피폐하게 만든다면 차라리 절연하는 방법을 추천한다. 모든 고통의 히스토리를 끊어버리고 내가 1세대 조상이 되어 새롭게 가문을 건설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게 오히려 나은 경우도 있다. 그럼 아무리 고쳐봐도 손쓸 수 없이 망가져버린 삶의 굴레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부품들로 새롭게 인생을 창조하는 기분이 들면서 삶에 대한 애정이 샘솟는다.




이렇게 고통의 대물림을 끊어내는 건

한 사람의 엄청난 정신력과 노력이 들어가야만 하는 어렵고 힘든 일이다.


정말 무서운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통의 대물림을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모에게 받은 고통을 자식에게 그대로 물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대물림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고 나를 기점으로 모든 고통들을 끝내겠다는 각오가 되어있다.


사랑을 줄줄 모르면 다른 집단에 가서 배워올 것이고, 나라는 과거를 수습하기 위해 결코 미래를 희생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도 하루빨리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자신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이제 그만 어머니의 세계에서 빠져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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