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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서율 Jan 23. 2024

한 달 안에 백수탈출하기

매달 심장이 쫄깃한 인생


"실례지만.. 남편분께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거나, 부모님께 용돈을 받고 계신 상황인가요?" 

면접을 보시던 대표님께서 질문하셨다.


"아니요? 결혼도 안 했고 혼자 살아서 제가 모든 생계를 책임지고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퇴사를 결정하신 거죠? 당장 그만두면 생활비가 없잖아요"

"퇴사하고 한 달 안으로 취업하는 게 목표였는데 정 없으면 급한 대로 아르바이트라도 하려 했죠"


이번에 면접에서 오고 갔던 조금 독특한 질문과 답변이었다.




지난달, 입사한 지 6개월 만에 나는 스릴러 시나리오 작가로 근무하던 직장에서 퇴사했다. 연봉도 근로조건도 심지어 내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스릴러라는 장르마저 마음에 들었던 직장을 돌연 퇴사한 이유는 내가 생각하고 입사한 포지션과 대표님이 원하는 포지션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근무했던 기간 동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는데 평소 영상 한 개당 10~13만 회 조회 수였던 채널에 내가 투입되고 난 뒤 15만 회, 18만 회, 24만 회, 37만 회까지 고공행진하기 시작했고. 구독자들은 기존보다 새롭고 다채로워진 시나리오에 열광하며 압도적으로 많은 댓글을 달았다.


게다가 여러 외국인 유튜버들이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내 애니메이션을 보며 리액션하는 영상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이 정도 반응이면 채널이 전성기였을 때의 조회 수로 복구할 수 있겠구나"라는 희망에 가슴 설레는 나날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나의 시나리오가 실적에 비해 쓰임이 적었다는 것이다. 내가 쓴 시나리오는 총 19편인데 지난 6개월간 올라간 시나리오는 8편뿐이니 대표님께서는 절반도 활용하지 않은 것이다.  


"대표님, 단 한편이라도 시나리오 퀄리티가 떨어져서는 안 돼요! 올리는 족족 재미있어야 독자들도 믿고 다음 영상을 보죠"


하지만 대표님은 내 시나리오가 새로운 스타일이라 좀 더 두고 봐야 한다고 일관하며 조회 수가 안 나오는 다른 영상들을 계속 올리셨고 나에게는 이미 완성한 시나리오를 한 달 동안 무한 수정하라는 오더를 내렸다. 출근해서 하루 종일 4000자도 안 되는 짧은 원고를 들여다보며 한 문장만이라도 고치면 된다는데 그건 나에게 엄청난 시간 낭비였다.  


할 수 없이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글로 옮기지도 못하고 이미 완성된 시나리오를 숨은 그림 찾기처럼 하루 종일 들여다보며 한두 문장을 고치는 게 주 업무가 되었다.


내가 그렇게 뻘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내가 쓰고 있었던 시나리오의 소재가 들어간 다른 애니메이션의 영상이 올라왔다. 대표님이 쓰신 시나리오였다.


그때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아.. 나는 이 조직에서 완제품이 아니라 재료가 되어야 하는구나"

"대표님의 최종 목표는 채널의 수익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으신 거였구나"


내가 아무리 시나리오를 잘 쓰고 실적이 좋다고 해도 대표님이 원하시는 건 회사의 수익보다는 자신의 자아실현이니 이곳에서 나는 절대로 메인 작가가 될 수 없었다.


월급루팡에겐 한 달 내내 아무 결과물 없이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꿀직장이겠지만. 그렇게 편하게 일할 생각이었으면 나는 애초부터 작가로 전직하지도 않았다. 시나리오 작가는 시간을 들여 창작물을 만드는 직업이라 나에게 시간은 곧 금이었다.  


이곳에서 무기력하게 시간 때울 바엔 차라리 어디 나가서 알바를 하는 게 나의 에너지를 지키는 일이라고 판단하고 대표님께 퇴사 의사를 밝힌 지 한 달도 안 되어 퇴사했다.




퇴사 후 며칠간은 아침에 잠에서 깨면 연인과 이별한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 업무에 애정을 쏟아부은 만큼 이별을 받아들이는 시간도 필요했었나 보다. 회사 사람들과 정이 들어도, 업무가 익숙해졌어도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나는 이번 일을 계기로 철저하게 작품의 수입에만 중점을 두는 사업가 밑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작품의 평가는 오로지 대중에게 맡겨야 한다는 나의 기준에서는 훨씬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다가왔으니까.


[미션 : 퇴사 후 한 달 안에 취업하기]

회사를 나오자마자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주어진 미션이었다. 근무기간이 워낙 짧아 퇴직금도 없는 상태에서 당장 생활비를 감당하기에는 버틸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6개월 미만의 경력은 신입과 다를 바 없으니 나는 삼십 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신입 작가의 신분으로 좁고 치열한 시나리오 취업시장에  다시 뛰어든 거다.




백수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연락이 닿은 건 한 영화감독님이었다. 공포영화 제작을 앞두고 적합한 작가를 구하고 있었는데 나의 포트폴리오를 SNS에서 발견하시고는 먼저 연락을 주셨다.


미팅 날짜는 빠르게 잡혔고 제작사로 직접 찾아가 얼굴을 뵙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감독님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창의력과 기획력은 참 좋으신데 포트폴리오가 워낙 짧은 분량이라 방대한 영화 시나리오의 분량을 소화할지가 걱정이 되네요.."  


뒤이어 트리트먼트 원고 (1차 계약) 페이를 묻는 감독님께 나는 뚜렷한 금액을 제시할 수 없었다. 회사에서 월급만 받고 살던 월급쟁이가 이 바닥을 전혀 모르니 적합한 연봉테이블조차 몰랐던 것이다.


다음날, 경쟁 작가가 합격했다는 쓰라린 소식에 감독님께 실례를 무릅쓰고 합격한 작가의 스펙을 물었는데 공포영화감독 출신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당장 억대 예산이 들어가는 프로젝트인데 안전한 게 맞지" 감독님의 선택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두 번째 미팅은 게임회사였다. 새로 제작하는 게임의 세계관, 등장인물, 전체 스토리를 구현하는 시나리오 작가를 모집하는 곳이었는데 미팅이 시작되자마자 예상하고 있었던 첫 번째 질문이 날아왔다.


"게임 뭐해보셨어요?"

"사실 서든어택 해본 게 전부예요.."

"서든은 스토리가 없잖아요"

"게임 시나리오의 틀만 습득하면 자신 있어요 장르도 제 전문이고요. 결국 시나리오는 창의력 싸움이잖아요"

"게임을 많이 해보셔야 해요.. 생각보다 게임 스토리가 엄청나게 방대하고 배워야 할 게 많아요"

"최대한 빨리 익히겠습니다. 틀은 배움으로 습득할 수 있지만 창의력은 재능의 영역이라 경력자 보다 늦어도 결과물은 자신 있어요"

"하하하~ 자신감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호탕한 웃음 뒤로 합격 연락은 오지 않았다. 게임 회사 또한 당장 투자금을 받아 들어가는 대형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게임도 해본 적 없는 신입에게 맡길 수 없었을 것이다.




세 번째 미팅은 영화사도 게임사도 아닌 소프트웨어 기업이었다. 이곳 대표님께서는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기획하신 스토리를 시나리오로 구체화하여 사업으로 연결하는 과정에 있으셨다.


"실례지만.. 남편분께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거나, 부모님께 용돈을 받고 계신 상황인가요?"

"아니요? 결혼도 안 했고 혼자 살아서 제가 모든 생계를 책임지고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퇴사를 결정하신 거죠? 당장 그만두면 생활비가 없잖아요"

"퇴사하고 한 달 안으로 취업하는 게 목표였는데 정 없으면 급한 데로 아르바이트라도 하려 했죠"


다소 의도를 알 수 없었던 질문 뒤로 장장 2시간 반 가량의 기나긴 미팅이 이어졌고 대표님께서 기획하신 스토리를 들어보니 그전에 내가 써온 시나리오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복잡한 세계관과 과학, 의학, 철학, 종교 등의 방대한 지식이 들어가야만 완성할 수 있는 고난도의 SF 판타지 시나리오였다.


이어서 대표님께서는 질문 속에 숨겨진 의도에 대해 털어놓으셨다.

"사실 서율씨를 고용하는 거에 대해서 걱정이 많아요"

"어떤 걱정이요?"

"당장 생활비가 나올 곳이 없는데도 퇴사에 전혀 거리낌이 없다는 건 상당히 진취적인 성향인 거거든요. 저 같은 사업가들에게는 참 좋은 기질인데 직원으로 데리고 있기에는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죠"


대표님의 고민을 들어보니 고민거리인 나도 충분히 공감이 되었다.

"저는 최대한 저의 재능이 쓰이고 싶어요 그런 회사를 찾고 있고요 당장의 연봉보다 장기적으로 제가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이 중요해서 그것만 충족이 된다면 이탈하지 않고 모든 걸 쏟아부을 수 있어요"


결국 대표님은 많은 지원자들 속에서 도박을 선택하셨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대한 열심히.. 아니 열심히 말고 잘하겠습니다!"


아직 써보지 않은 장르라 잘 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최대한 나를 짜내어 어떻게든 만들어 볼 것이다.




2023년은 연애 한번 못해봤는데도 매달 심장이 쫄깃했다.  

2월 미션 - 취업사기 친 대기업과 싸워 떼인 성과급 받아내기

3월 미션 - 10년 넘게 일한 사무직 때려치우고 작가로 전직하기

3~9월 미션 - 내 시나리오로 유튜브 채널 조회 수 떡상시키기

10월 미션 - 퇴사 후 한 달 안에 시나리오 작가로 취업하기


연이어 이어지는 숨 막히는 미션들을 어떻게든 성공해 냈던 것처럼 11월의 미션은 [처음 쓰는 장르의 시나리오를 성공적으로 완성하기]가 되었다.


내가 이렇게 미션 속에서 사는 이유는 사실 재미있어서다. 어려운 미션을 성공할수록 재미의 크기도 비례하니까.


작은 성공의 추억들이 모이면 '한 달 안에 어떻게든 해내겠지'라는 무모한 생각으로 당장 돈 나올 곳도 없는데 퇴사를 지르는 어이없는 사고도 치게 되는데 이걸 또 수습해 낸 거 보니 이쯤 되면 일부러 나 자신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어 초능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것 같다.


이렇게 나에게 찾아온 고난과 시련을 게임 퀘스트처럼 생각하면 인생은 도장 깨기 미션처럼 재미있어진다.











- 2023년 11월에 작성된 에세이입니다.

   출간 하느라 업로드가 늦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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