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나를 만나다.
"사원님, 대충 짐 싸서 가셔도 돼요.. 나머지는 제가 정리할게요"
책상에 있는 개인 물품들을 박스에 넣고 있는데 인사팀 차장님이 오셨다. 그 누구도 섣불리 내 자리로 다가와 위로의 말 한마디조차 못 건네고 있는데 차장님은 혼자 짐을 싸고 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보다 못해 자리로 오셔서 말을 걸어 주셨다.
"아니에요 제자리는 제가 정리해야지요, 인수인계 파일들은 바탕 화면에 저장해 두었어요 빠진 내용은 없을 거예요"
순간 눈물이 차올라 앞이 뿌예졌지만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 참아내고 가까스로 대답했다.
"굳이 출근 안 하셔도 되는데 마지막까지 참 성실하시네요.. 휴... 나가야 할 인간들은 남고.. 왜 사원님이..."
차장님은 말끝을 흐리시더니 황급히 자리로 돌아가셨다.
2014년 겨울, 나는 결국 사직서를 냈다. 같은 팀 대리에게 성추행을 당했지만 가해자에게 아무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미개한 조직에서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사건의 발단은 매주 금요일 팀장이 강제적으로 주최하는 팀 회식에서 일어났다. 회식이 끝나면 문제의 대리와 집이 같은 방향이라 귀갓길에 동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그가 우리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내가 혼자 사는 걸 뻔히 알고 있었던 대리의 저의가 불순해 보여 그냥 가시라고 한참을 길에서 실랑이하던 도중 갑자기 그가 내 두 팔목을 잡아 포박한 후 강제로 입맞춤을 한 것이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뿌리치고 도망쳐 겨우 귀가했다.
대리는 불과 얼마 전에 아내가 출산을 해서 팀원들에게 축하를 받았던 새신랑이었다.
다음날, 나는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1층 로비로 대리를 불러내어 어제 사건에 대해 항의했다.
"미안해요 사실 예전부터 사원님을 쭉 좋아했어요 그날 술에 취해 저도 모르게 실수해버렸네요"
새신랑의 입에서는 이상한 소리만 나왔다. 그와는 더 이상 상식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곧바로 올라가 팀장님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그러나 당연히 대리에게 징계 조치를 내릴 거라 믿었던 팀장님의 입에서도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
"이사원, 기분 나쁜 건 알겠는데 최대리 아이 생긴 지도 얼마 안 됐고 가장이잖아.. 직장을 잃게 할 순 없어! 남자가 취하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야 한 번만 참고 넘어가 줘 응?"
최대한 이성적으로 이 일을 헤쳐나가려 했는데 믿었던 팀장님 마저 가해자 편을 들고 나서니 배신감에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이 상식 밖의 조치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알아봤더니 팀장 산하에서 이루어진 회식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다면 팀장이 모두 책임져야 했고 마침 인사고과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팀장의 승진 평가에 직결되는 일이라 내 입을 틀어막기 바빴던 것이다.
어리석은 팀장은 내가 감사팀에 이야기할까 봐 걱정이 되었는지 얼굴만 봐도 치가 떨리는 가해자와 나를 식사 자리에 함께 불러 화해시킨다는 최악의 솔루션을 제안했다. 나는 가해자에게 정당한 징계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재차 이야기했지만 팀장은 도리어 나에게 "좋게 좋게 넘어가지 기어이 일을 그렇게 크게 만들어야겠어?"라며 다그치기 바빴다.
그 와중에 같은 팀 남자 사원이 나에게 와서 귀띔을 해주었다.
"와... 어쩐지 최대리님이 그 사건 터진 다음날 아침에 저한테 와서 그랬거든요 형이 어제 재미있는 일을 만들었는데 이따가 이야기해 준다고요.."
내가 피눈물을 흘릴 동안 정작 가해자는 그 사건을 본인의 전유물처럼 여기저기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녔다.
오직 내 입을 틀어막기 위한 목적의 수많은 면담을 거칠 때마다 서러움에 북받쳐 엎드린 채 엉엉 울었지만 아무도 나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본인들의 안위와 승진이 중요할 뿐이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그들에게 더 이상 대화의 시도는 무의미했다.
나는 그들에게 마지막 히든카드를 꺼냈다. 혹시 몰라 증거 대비용으로 녹음해둔 그들의 녹취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대리와 팀장의 녹취록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리자 우리 본부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그깟 입술 좀 내줬다고 징징대는 귀찮은 말단 여사원에서 하루아침에 언론 한번 타면 본부 전체를 날려버릴 수도 있는 시한폭탄이 된 것이다. 누구나 아는 대기업이라 제보만 하면 언론에 오르는 건 시간문제였다.
만약 내가 언론에 제보를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럼 사이다같이 시원한 복수의 결말로 마무리 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작 27살 어린 여사원은 더 이상 싸울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거대한 조직을 상대로 철저하게 홀로 고립되어 맞서는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아끼던 사람들도 섣불리 나에게 다가와 위로의 말조차 건넬 수 없었다. 내 자리에 와서 말 한마디만 걸어도 모두가 고개를 빼꼼히 들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귀 기울였으니까
그들은 그저 팀장님의 눈을 피해 조용히 어깨를 다독여 주거나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식당에 데려가 밥 한 끼 사주며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 미안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질적으로 나를 지켜주는 건 오직 녹취록 파일 뿐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히히덕거리며 사무실을 활보하던 가해자는 내가 팀장의 녹취록까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우리 동네까지 찾아와 가증스러운 악어의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든 막아보라는 팀장 등쌀에 못 이겨 기어 온 게 틀림없었다. 나는 그와 말 섞는 행위조차 역겨워 대변인 역할을 해줄 친구를 데리고 나왔다.
그는 우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쥐어짜 내며 한참 동안 억지 눈물 쇼를 펼쳐보았지만 더는 먹히지 않자 친구에게 합의금을 제시하며 합의를 제안했고 친구는 나를 따로 밖으로 불러내더니 이야기했다.
"네가 아무리 피해자라도 여자기 때문에 저 새끼보다 더 가십거리가 될 거야 소문이 어떻게 와전될지도 모르고.. 그냥 합의하고 퇴사하자.. 할 만큼 다 해봤잖아 너도 회사에 정 떨어져서 다닐 수 있겠어?"
유부남인 성추행 가해자는 사건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니는데 도리어 피해자가 수치스러워 퇴사를 해야 한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세계가 지금의 현실이었다.
결국 취업 준비를 할 동안의 생활비를 계산해서 그와 합의한 후 퇴사하기로 했고 퇴사하는 마지막 날까지 다들 눈치를 보느라 멀찌감치서 어색하게 건네는 목례들을 뒤로한 채 홀로 쓸쓸히 떠났다.
해 질 녘, 붉은 노을이 내려앉은 마지막 퇴근길, 사옥 정문을 나서는데 같은 팀 남자 사원이 뛰어오더니 급하게 나를 붙잡았다.
"저... 퇴사 선물을 못 드려가지고 이거라도... 그리고 지켜주지 못해서 죄송해요 제가 힘이 없어가지고.. 흐윽..."
그는 회사 앞에서 급하게 사 온 스타벅스 텀블러를 건네며 이야기하다 말고 갑자기 눈물을 터트렸다.
출근하는 내내 마지막 날 만큼은 절대 울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는데 갑작스러운 그의 눈물을 보니 애써 눌러왔던 나의 눈물샘도 덩달아 터져 버렸다.
마지막 날 만큼은 제법 어른스럽게 떠나고 싶었는데.. 결국 정문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주저앉아 한참 동안 오열했다.
-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21년 9월
문득, 아무 목적 없이 그곳을 다시 찾아갔다. 내가 사랑했던 고즈넉한 종로 한옥마을의 기와지붕들 사이로 우뚝 솟아있는 익숙한 회사 사옥이 보인다. 세월이 무색하게도 한결같은 곳, 마치 과거로 다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심장이 아려온다.
나는 사옥 앞에 우두커니 서서 정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7년 전 이곳에서 주저앉아 오열했던 내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다.
양자물리학 이론에서는 우리가 과거라고 생각하는 지나온 시간도 다른 시공간에서는 현재의 시점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하던데 그 이론대로라면 또 다른 시공간 속의 나는 지금 이곳에 주저앉아 울고 있을 것이다.
가엾은 그녀를 찾아가 꼭 안아주고 싶지만 우리는 다른 시간 속에 살고 있어서 만날 수 없다.
만약 시공간을 모두 초월하여 울고 있는 7년 전의 나를 눈앞에서 만날 수 있다면 이런 대화를 하지 않을까?
"많이 힘들었지? 이제 그만 울고 일어나"
"누구세요?"
"나는 7년 뒤의 너야 2021년 미래에서 너를 찾아왔어"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믿기진 않겠지만 들어봐, 비록 지금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고통스럽겠지만.. 너는 고작 3주 만에 모든 면에서 여기보다 훨씬 좋은 회사에 취업할 거고 그곳에서 좋은 사람들과 인연이 닿아 함께 일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
"그게 정말이에요..?"
"정말이지! 너에겐 미래라 해도, 나에겐 이미 일어난 과거니까"
"그럼 저의 미래를 알려주시려고 여기까지 찾아오신 거예요?"
"아니, 단지 널 위로해 주려고 왔어 네가 사랑했던 이 예쁜 한옥마을이 오늘 이후로 너에게 평생 가슴 아픈 장소가 되어 버리거든.. 그러니 아픈 기억을 지우는 마지막 산책을 나와 함께 하지 않을래?"
그녀는 눈물을 손등으로 쓱쓱 훔치고는 이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