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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보르미 May 24. 2023

칠곡가시네와 엄마

오지게 재밌게 나이 듦


아름답다는 표현이 참 잘 어울리는 교복입은 그녀들


3년 전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랑 단둘이서 영화를 보게 됐다.

"칠곡가시나들"

경북 칠곡에 사는 할머니들 이야기이다.

십 대에 시집와서 칠십 년 가까이 우정을 나눠 온 할머니 일곱 분의 재밌게 나이 들어가는 이야기.

문맹의 할머니들이 문해학교를 다니며 글을 배우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삶에 대해 촬영한 다큐영화로 가난이라는 이유로, 딸이라는 이유로 공립교육을 받지 못했던 할머니들이 뒤늦게 한글 교육을 받으며 벌어지는 일들.

70대의 끝자락에 서있는 엄마의 삶과 비슷할 듯한데 그럼에도 너무 재밌게 살고 있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엄마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독립영화 특성상 상영관이 많지 않았고, 340km 떨어져 사는 내가 5시간을 달려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 영화를 그렇게 보여드리고 싶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엄마를 만나러 갔다.

이왕이면 아빠도 같이 가서 셋이서 영화를 보고 싶었는데, 아빠는 끝까지 동행을 거부했고, 엄마도 안 가겠다고 하는 걸 넷째 언니가 막내딸이 엄마랑 첨으로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하는데 못 이기는 척 좀 가주라고 전화를 해 준 덕분에 겨우 엄마랑 같이 갈 수 있게 됐다.

사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엄마가 엄마와 비슷한 처지의 할머니들을 보면서 뭔가를 좀 깨닫고 느끼길 바랐다.

물어물어 찾아간 영화관은 독립영화답게 작은 극장에 관람인원도 많지 않았다.

엄마가 이 영화를 무척이나 재밌게 볼 것이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영화가 시작되고 중반에 이르렀을 때 엄마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영화가 다 끝나고 첫마디가,

"느그 아빠 안 데려오길 잘했다. 쭈구리 할매들만 나오는구만. 맨날 보는 늙은이들 영화관까지 와서 뭐할라꼬 보노..."


몇 년이 지났지만 잊히지 않는 엄마의 그 첫마디.

시간을 내고, 영화관을 찾고, 어렵게 찾아와 엄마에게 품었던 그 기대함이 나를 더욱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만드는 것 같았다.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찮게

"오지게 재밌게 나이 듦"이란 책을 발견했다.

칠곡가시나들 감독이 영화를 책으로 엮었다.

감독님은 모친에게 바치는 영화고 글이라고 했다…

#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마지막 자존감을 내려놓는 일이다 - 오지게 재밌게 나이 듦 104P


책을 통해 조금은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엄마의 삶이 많이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한 년도 전화하는 년이 없다."

엄마는 딸들을 늘 년이라고 부르고, 레퍼토리는 늘 똑같다.

특히나 요즘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엄마는 싸움꾼이 되어서 아빠랑도 동네 사람들과도 그리고 딸들과도 싸움으로 내가 살아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엄마에게 내가 해 줄 것이 많이 없다.

한번 전화를 걸면 30분이고 1시간이고 아빠를 흉보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어쩔 땐 전화기를 들고 아빠랑 당장 무슨 일이 날 듯 싸우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내게도 우울감이 전이되고, 전화를 끊고 나면 그 하루는 뭔가를 해야겠다는 의지도 생기지 않고, 무기력하며 슬픔에 휩싸이게 된다.

그래서 한 번 전화하기가 사실 너무 어렵다.

두렵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 고맙다 화투야

오백 원만 있으마 하루 종일 즐겁다

니가 영감보다 낫다

-오지게 재밌게 나이 듦 - 박금분, '화투' 중에서 P20-


# 은행에 가서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눈치 보고 발만 보고 있었습니다.

내 아들 같은 키 큰 남자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합니다

이렇게 가 어떤 건데요

얼마나 망설이며 용기 냈는지 알까요

손가락에 반창고나

손목에 기부스를 하고 갈까

부끄러워 오만 궁리를 다했습니다.

-오지게 재밌게 나이 듦 - 김순자, '이렇게 가 어떤 건데요' 중에서 P113-


# 아홉 살 어린 나이

친구들 학교 가는 것 보고

눈물 흘렸다

네가 학교 가고 없으면

우리 집 살림 안 된다고

말리시던 울 엄마

돼지풀 쥐어뜯으며

눈물이 비 오듯

한없이 한없이 울었다

-오지게 재밌게 나이 듦 - 위준녀, '밝아진 세상' 중에서 P121 -


할머니들이 쓴 시를 읽으면서...

엄마 모습을 그려본다.

영감보다 낫다는 화투를 할 줄도 모르는 엄마.

이렇게 가 어떤 건지….지금도 혼자서는 어딜 나서길 두려워하는 엄마에게 밝아진 세상을 선물하고 싶은데 엄마는 마지막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했고,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다.


                                               -2022년 11월 어느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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