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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운 Aug 15. 2024

도서관에서 일어나는 일.

1) 살고 싶어서, 사서.

날이 좋은 어느 날 버스를 탔다.

햇살은 아름다운데 여전히 물러날 생각이 없는 추위에 약간의 불평을 하며 패딩과 솜바지를 챙겨 입은 3월 말이었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보통의 날이었지만, 그날 버스 안의 분위기는 새삼 생경했다.

뜨거운 햇살에 대항하여 보잉 선글라스를 멋들어지게 쓴 버스 기사는 기세마저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씩씩한 인사에 감사한 웃음이 났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차례차례 타는 승객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쌀쌀맞은 날씨를 아랑곳하지 않고 위아래 청청으로 맞춰 입은 어린 십 대 친구 두 명이 깔깔대며 버스에 올라탔다. 내가 어릴 때 유행하던 패션을 갖춰 입은 채 다른 세기에 살고 있는 알파세대라니. 새삼스러우면서도 귀여워 보였다.


그다음은 장성한 아들 둘과, 그 손을 잡고 버스를 탄 노할머니 두 분이었다. 아들들은 성인의 나이를 훌쩍 넘긴 모습이었지만 어린아이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노모들은 2인석의 첫 줄에 자신의 아들과 각자 나란히 앉아 바나나며 간식을 아들들의 손에 쥐어 주며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 애는 이제 혼자 집도 잘 찾아와. 그런데 그 집 아들은 잘 안 먹나 보네. 우리 애는 잘 먹어.”


어머니들은 이미 할머니가 되었지만, 아직은 어린아이를 키우는 마음으로 살아나가는 모습을  보며, 문득 그들의 시간은 생의 어느 즈음에서 멈춰있을까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어떤 삶도 내가 힘들고 피로하겠다고 감히 평가할 수도 없는 귀하고 거룩한 생일 것이다.


우리가 으레 평범하다고 여기는 일상의 형태와 고정관념에서 다소 벗어나 있던 그 버스 안의 풍경 속에서, 나는 사서가 되고 싶다는 결심을 굳혔던 것 같다.


어떤 형태로 어떤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든 간에, 있는 그대로의 삶들을 자연히 받아들이고, 세상에 무해하고 자신의 생에 열심인 모든 사람들을 당연히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싶다고. 그리고 그러한 마음으로 자신을 찾기 위해 도서관에 오는 사람들을 다정하게 맞이하고 싶다고.


큰 사고로 인한 육체적인 고통을 겪음과 동시에 곁에 있던 사람과의 깊고도 긴 이별의 과정을 겪은 뒤, 모든 것이 두려워졌다. 운전도, 공부도, 요리도, 일상의 소소한 것들마저 모두 자신이 없어진 시점이었다. 나를 나로 불리게 한 모든 것들이 공중분해가 돼버린 기분.

사람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나를 위축시켰고, 그 스트레스가 결국 내 척추를 비틀어 오늘날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는 생각에, 사람을 만나는 일이 무척이나 버겁고 무서워져 버렸다.


거의 반년 간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 팔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을지. 재활을 빙자하여 나는 도서관에서 서가의 도서를 배열하는 봉사 활동을 시작하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어쩌면 도서관에 들어섰던 최초의 목적은 도피가 아니었을까.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믿어지는 조용한 공간에서 찾아오는 평온. 이것도 결국 정말 내 업이 되어 사람들과 부대끼게 된다면 또 다른 슬픔이 찾아들 수도 있겠지만, 지금 어느 누구도 내게 관심을 두지 않는 이 공간에서만큼은 숨 쉬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나는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은 채 물도 마시지 않고 쉬는 시간도 가지지 않으며 3시간 동안을 내리 서가에 책을 부지런히 정리하였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도서관 계약 사서직에 지원하며 지원 동기에 나는 이렇게 기재하였다.


“저는 도서관이 주는 공간의 힘을 믿습니다. 도서관에서 사람들은 온전히 자기 자신과 마주할 수 있고 비로소 저마다의 삶의 분노와 상처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완벽하게 자신만을 바라보며 공부를 하고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을 사랑합니다.”


깨어있는 순간마다 머릿속을 온통 헤집고 돌아다니는 수많은 예기불안과 일어나지도 않을 미래의 고통에 대항하여 서가를 정리하는 데 온전히 시간을 할애하였다.

앉았다 일어나고, 수 십 권의 책을 들어보고 묵은 먼지들을 털어내는 등 성실하게 내 온몸의 근육을 써 가며 여전히 무딘 팔의 움직임과 감각을 조심스레 기억해 내려 애써보았다.

시간이 지남을 알려주는 앳된 막내 사서의 조심스러운 알림에 비로소 땀이 찬 장갑을 벗고 물을 마셨다. 


'이것이 바로 일한 뒤의 쉰다는 행동이구나.'


이 조차도 낯선 감각이었다.

20여 년간 나는 일 감옥에 갇혀 살았다. 매일같이 편의점의 간편식으로 점심을 때우고, 화장실을 가는 시간도 줄여가며 스스로 일의 노예를 자처하고 일이 주는 감사함을 알지 못했건만, 몸을 쓰는 일을 통해 업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쉬는 법도 배워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사람은 태어나서 이유가 있는 것인지, 이유가 있어 태어난 것인 지 그 우선순위를 알지 못하지만, 만약 숙명이 있다면 이것이 어쩌면 내게 주어진 과업일 수도 있으리라. 


‘대기만성형이야.’


3월의 추위로 불평했지만 어느새 줄기에 송골 하게 맺힌 방울을 느끼며 스스로를 이렇게 다독여 본다. 

나는 매서운 추위를 이겨낸 국화처럼 서서히 다시 꽃을 피워낼 수 있을 거라고.


책과 책을 지니고 있는 공간이 주는 힘은 친절하고 감격스럽다.

가난은 가까워졌지만 책이 주는 사랑과 평안으로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정말이지 살고 싶어서, 사서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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