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운 Sep 14. 2024

도서관에서 일어나는 일.

2) 세상의 모든 무해한 것들에 대하여.

뜻하지 않은 사고로 20년의 회사 생활을 중단하고 난생처음으로 실업자가 된 후, 나는 사서가 되기 위해 봉사활동을 시작하였다. 팔을 제대로 쓸 수 있을지 시험도 해보고 싶었다.

내가 처음 다닌 도서관은 호수가 있는 수목원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샛별을 보며 출근하지 않고 느지막한 아침에 버스를 타고 수목원으로 향하는 내 모습이 퍽이나 낯설게 느껴졌지만 이런 삶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였다.


도서관 봉사활동은 10시부터 시작이지만 20분 정도 먼저 도착해 수목원을 한 바퀴 산책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3월의 매화는 놀랍도록 풍성하고 수목원의 호수 덕에 습기를 품은 서늘한 공기는 마음을 맑게 해 주었다. 호숫가의 다정한 오리 한 쌍을 보는 것이나, 아침에 주변을 달리고 운동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좋았다.


오른 팔의 마비로 인한 재활 치료로 고작 몇 개월을 쉰 것뿐인데, 3년 전 이직을 할 시 느꼈던 취업 시장의 온도와 마흔다섯의 된 내 앞의 현실은 체감이 달랐다. 마치 내 체중은 아직 미들급이라고 생각하는데 세상이 너는 더 이상 그런 펀치를 날릴 수 없는 라이트급이라고 딱지를 붙여 버리는 것만 같았다. 팀장으로 퇴사를 시작해 과장급, 그리고 계약직으로 경력이 다운그레이드가 되었던 문제도 컸고 공대 중심으로 돌아가는 회사에 ‘문송’하고 물경력만 긴 중년 여성으로서 부딪치는 벽도 실감하였다. 오래 몸 담은 회사가 속한 시장은 좁디좁았고 내부 고발을 하고 나온 터라 입 소문은 빠르게 시장을 훑고 지나갔다. 물론 나 스스로도 다시는 그 바닥에 발을 디디지 않을 생각으로 나온 것이지만.


어쩌다 면접을 보면 하나 같이 퇴사의 이유를 물었다. 왜냐고? 그 오랜 세월을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까? 하지만 무슨 말을 해도 사람들은 번아웃이 왔고 능력 부족으로 자연스럽게 도태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미성숙한 인간 군상들이 서로의 마음 씀씀이만큼이나 작아진 회의실에 모여 앉아 서로의 불완전성에 대해서 비난하는 모습이 한심해 보 조직 생활이 의미없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더 많았으니까.


이런 생각을 하며 내가 자주 앉는 벤치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이미 비둘기들이 한 무리를 지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이제는 비둘기마저도 내 구역을 차지하다니.


발걸음을 옮겨 도서관에서 일을 시작하였다. 한 바퀴를 돌며 순서대로 서가의 책을 꽂는 일이 즐겁다. 처음에는 청구 기호 순으로 배열하느라 책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지만 눈에 익으면 도서명을 훑어보는 재미도 있다. 누가 짓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도서명도 아름답게 짓는다.

반납한 책을 정리하다 보면 가끔은 너무 슬픈 내용의 도서가 뭉터기로 나와 있는 경우도 있다. 성폭력이나 학대, 가정 폭력에서 살아남고 위로하는 내용의 책 말이다. 단순히 학교 과제를 위한 목적으로 이용자가 대출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럴 때는 이상하게 마음이 아파서 심장이 꼬집히는 느낌이 든다.


수목원의 도서관에는 특수학교의 아이들이 가끔 방문하기도 하였다. 책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어린이 자료실의 긴 의자에 누워있던 덩치 좋은 십 대는 막상 돌아갈 때가 되면 집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며 드러눕기도 한다. 달래느라 진이 빠진 선생님이 먼저 가겠다는 시늉을 하며 밖에 잠시 나가면, 나는 가서 그 소년을 붙들고 조곤조곤 달래기를 시도한다.


“학생은 책이 그렇게 좋아요? 너무 멋있다. 그런데 지금 나가면 선생님이 맛있는 간식을 주신다는데. 그거 먹고 다음에 또 오면 너무 좋겠다.”


그러면 소년은 멋쩍어하면서도 뿌듯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돌아온 선생님의 뒤를 마지못해 따라나선다.  


석 달간의 봉사활동을 마치고 나는 마침내 계약직 사서가 되었다. 계약직 사서라 대출, 반납 및 서가 정리, 약간의 수서(구매할 책을 고르는 일) 업무 이외에 특별히 중요한 일은 잘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일정하게 쉬지 않고 책을 받고 고르고 제공하는 부지런한 행위를 하며 타인을 돕는 서비스의 형태로 발현되는 것에 즐거움을 느꼈다.

도서관에서 일하다 보면 유독 나를 따르는 어린이들이 생긴다. 주변을 뱅뱅 돌다가 재미있는 책이 뭐가 있냐고 묻는 다던지, 책 반납하는 바코드 리더기가 궁금해서 한 번 해 보고 싶어 한다던지, 어린이들 눈에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 좁은 세계가 모조리 흥미로운 모양이다.


사고와 실직과 투자 실패와 이혼, 내게는 평범한 가난과 철 지난 원망만이 남아있었다.

직장 내 괴롭힘과 그로 인한 후유증이 꼬박 10년을 나를 짓눌러 불안과 공포가 나를 잠식하였지만 그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다. 알아차린 후에는 사람이 끔찍하게 무서웠다. 작은 일에도 너무 깜짝 놀라 심장이 터질 듯이 뜨거워져서 최근에는 심전도가 널을 뛰어 가슴에 침을 맞고 있다. 나는 그저 숨을 제대로 쉬며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도서관에 오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세상에 발을 디딜 힘을 얻었다.

작은 도움에도 정말 감사함을 느끼고 표현하는 한 없이 무해한 사람들을 본다.

이 것이 바로 정상적인 세계구나. 이것이 일상이고 평범한 것이구나.

하지만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누리고 사는 것들이 이상하게도 내게는 너무 새롭게 느껴져서 지금 이 현실이 현실 같지 않은 괴리감 증세로 또 불안해지기도 한다. 언제쯤 이 불안을 멈출 수 있을까.


최근 3일째 기상청에서는 뇌우 예보가 떴지만 단 한 번도 비는 오지 않았다.

역시 인생에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것은 예보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다시 살아내야지. 지금은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니까.

당신은 지금 자신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작가의 이전글 도서관에서 일어나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