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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자 Sep 09. 2023

비굴 레시피  안현미 시(詩)

시가 있는 공간  2023.08.30. 비가 깊은 날에




바람이 드세게 창문을 비집고 들이칩니다. 태풍이 오고 있답니다. 가을장마 소식도 있네요. 도시의 색이 잿빛입니다. 한낮의 시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어둑어둑합니다. 비도 내리고 있습니다. 바람과 비가, 닿는 자리마다 소리들을 얹어놓습니다.  




 





비굴 레시피

재료
비굴 24개 / 대파 1대 / 마늘 4알
눈물 1큰술 / 미증유의 시간 24h
 
만드는 법
1. 비굴을 흐르는 물에 얼른 흔들어 씻어낸다.
2. 찌그러진 냄비에 대파, 마늘, 눈물, 미증유의 시간을 붓고 팔팔 끓인다.
3. 비굴이 끓어서 국물에 비굴 맛이 우러나고 비굴이 탱글탱글하게 익으면 먹는다.
 
그러니까 오늘은
비굴을 잔굴, 석화, 홍굴, 보살굴, 석사처럼
영양이 듬뿍 들어 있는 굴의 한 종류로 읽고 싶다
생각건대 한순간도 비굴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므로
비굴은 나를 시 쓰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체하게 하고
이별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고
당신을 향한 뼈 없는 마음을 간직하게 하고
그 마음이 뼈 없는 몸이 되어 비굴이 된 것이니
그러니까 내일 당도할 오늘도
나는 비굴하고 비굴하다
팔팔 끓인 뼈 없는 마음과 몸인
비굴을 당신이 맛있게 먹어준다면
                                              - 안현미 -



 


당신 앞에서

나는 뼈가 없는 생물이어도 좋습니다. 자존심은 비굴에게 주어도 괜찮습니다. 뼈는 없어도 향기는 좋은 비굴이 MSG로 첨가되어도 좋습니다. 메인 요리이어도 좋습니다. 대파가 맵고 마늘이 매워 눈물이 그렁댄들 어떻습니까. 맛있게 미증유의 시간을 익어갈 텐데요. 당신의 피가 되고 살이 된다면, 그렇게 폭폭 익어간다면 더 진한 비굴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삶은, 늘 어디쯤에 비굴을 숨겨둡니다. 숨어있는 비굴이 내 앞에 당도하면 짭조름 눈물 한 움큼 볶아 넣어 간을 합니다. 그러고는, 비굴 앞에 더 비굴해집니다. 오늘도 내일도 비굴 따위에 비굴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당신 앞에서는 비굴도 즐거울 수 있습니다. 
비굴은 오늘도 상큼한 향내를 날리며 눈처럼 쌓여갑니다. 비는 내리고 바람은 정처 없고, 겨울은 아직 멀리 있습니다.
 
감이 탐스럽게 진홍색으로 변해가는 걸 보니, 때가 되었나 봅니다. 가을이라는 때가. 한량처럼 게으름에 길들여진 채 준비 없이 때를 맞습니다. 작별의 시간과 만남의 시간이 뒤엉켜 질척댑니다. 언젠가는 홍해 가르듯 나누어져야 할 계절. 
천둥이 웅웅대고 있습니다. 속절도 없이 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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