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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지 Nov 16. 2021

군고구마

세상에 맛없는 군고구마는 없다

내가 살고 있는 텍사스 남쪽은 위도상 제주도보다도 훨씬 낮다 보니 '겨울다운' 추위를 겪는 일은 거의 없지만, 한국이 더 추워진 날은 여기도 평소보다 더 추워지고 한국이 이상 고온을 보이는 날은 여기도 좀 더 더워지는 식으로 날씨가 비슷한 패턴으로 움직이는 일이 많다.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고, 나름 같은 북반구라서 그런가 하고 짐작도 해 보지만, 여하튼 그런 날은 한국의 가족이나 친구들과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11월도 어느덧 중반. 내일모레가 수능일이라서인지, 이곳도 날씨가 귀신같이 조금 쌀쌀해졌다. 이런 날은 군고구마가 생각나는 법이다.



짜장과 짬뽕, 찍먹과 부먹만큼이나 치열하게 의견이 갈리는 것이 찐 고구마와 군고구마가 아닐까 한다. 적어도 우리 집에서는 그렇다.

남편은 찐 고구마를 좋아한다. 아니, 찐 고구마'도' 좋아한다고 해야 하나. 구황작물을 좋아하는 남편은 고구마에 대해서라면 다소 박애적이어서 어떤 고구마여도 좋아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40분쯤 지나면 먹을 수 있다는 이유로 찐 고구마를 선호한다.

하지만 내 경험상 고구마는 찌면 맛이 없는 경우도 꽤 있었다. 덜 달다거나, 섬유질이 유난히 많은 고구마가 걸리면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그렇지만 단언컨대, 나는 지금껏 살면서 맛없는 군고구마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덜 단 고구마도 구우면 수분이 날아가고 단맛이 응축되면서 꿀처럼 끈적끈적해지는 '마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실처럼 생겨서 식감을 질기게 만드는 섬유질도 군고구마에서는 문제가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딱 한 가지 단점이라면, 조리하는데 최소 한 시간 정도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중간에 한두 번 고구마를 뒤집어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 다소 비효율적이고 귀찮은 과정을 거치더라도 나는 고구마를 구워 먹는 것을 좋아한다.


문득 궁금해져서 검색해 보니, 찐 고구마와 군고구마는 실제로 당도의 차이가 나며 이 차이는 전분을 당분으로 변화시키는 '베타-아밀레이스'라는 효소의 활동 시간이 고구마의 조리법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한다. 고구마를 구우면 고구마의 온도가 서서히 올라가 베타-아밀레이스가 오랜 시간 활발히 작용하며 엿당이 많이 만들어지지만, 찌거나 삶으면 짧은 시간에 고구마의 온도가 급격히 올라 엿당을 많이 만들 수 없단다. 군고구마는 찐 고구마 대비 당도가 10~20% 높고, 칼로리도 따라서 높아진다고. (하아, 역시 칼로리는 맛의 단위였구나.)


네 명의 개그맨들이 온갖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니는 예능 프로그램 <맛있는 녀석들>에 의하면 "튀기면 신발도 맛있고, 케첩에 찍으면 지우개도 맛있다."라고 하는데, 나는 여기에 "구우면 어떤 고구마도 맛있다."를 추가해야 한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겨울이면 종종 해 먹는 군고구마


고구마를 깨끗이 씻어서 에어프라이어 또는 오븐의 'Bake' 기능을 사용하여 구워 준다. 여러 가지 온도 조절 방법이 있지만 내가 안착한 것은 화씨 270도에서 20분간 구운 후 고구마를 뒤집어 320도에서 30분, 마지막으로 390도에서 10분간 구워주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고구마의 본성(?)에 관계없이 꿀이 떨어지는 맛있는 군고구마가 완성된다. 한 시간을 정성 들이며 기다릴 가치가 충분하다.



언제부터인가 찾아보기 어려워졌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드럼통을 옆으로 뉘어놓은 형태에 정면에서 보면 대여섯 개의 손잡이가 달려있는 도구를 리어카에 끌고 와서 동네 어귀에서 군고구마를 파시던 아저씨나 아주머니들이 계셨다. 손잡이를 당기면 구워진 고구마가 줄줄이 들어있는 서랍이 나오던 이 '군고구마 통' 근처는 언제나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맛있는 냄새가 났다.

몇 년 전, 아이들과 체험학습을 갔다 발견한 반가운 '군고구마 통'

몇 년 전부터 집집마다 에어프라이어도 흔해지고 오븐이 있는 집도 많아졌지만, 그 시절 군고구마는 집에서 만들기보다는 길거리에서 사 먹는 것이었다. 비교적 쉽게 해 먹을 수 있었던 찐 고구마보다 군고구마를 백만 스물두 배쯤 좋아했던 나는 어른이 되면 이 '군고구마 통'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것만 있으면 군고구마 아저씨가 오지 않는 요일에도, 아니 일 년 중 아무 때라도 군고구마를 만들어 먹을 수 있을 테니까.


이제는 내 소유의 에어프라이어도 있고, 오븐도 있으니 나만의 군고구마 통이 생긴 셈이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 꿈 하나를 이룬 셈인데 모르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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