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이>
실적 부족으로 허덕이는 보험회사 팀장 나제희(곽선영 분)와 그의 유일한 팀원 오경수(조현철 분)는 어느 날, 통영에서 등산을 갔다가 실종되어 사망 처리된 남자 A 앞으로 보험금 12억 원을 지급해야 하는 사건을 검토하게 된다. A에게는 소아 당뇨를 앓는 어린 딸도 있어 인간적으로야 보험금을 지급해 주고 싶은(?) 사건이지만, 이러다가는 팀이 날아가고 본인들도 잘릴 판. 무엇이라도 검토하고 수상한 점을 찾아야 하는 제희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보험 조사관 경이(이영애 분)를 찾아간다.
전직 경찰, 현직 보험 조사관으로 사람을 끝없이 의심하는 다소 몹쓸 성품을 지녔고, 평소 술과 게임에 절어 사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구경이는 이 사건을 파고 들어가다가 비슷한 시기에 A와 같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 두 명이 더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막힌 우연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글쎄, 정말 그저 '기막힌 우연'일까?
"의심스러운데."
경이가 '법망을 피한, 그러나 죽어 마땅한 짓을 저지른 사람'을 골라 사고나 각종 우연을 가장하여 죽이는, 심지어 죽은 사람과 이해관계에 있었던 사람이 의심받지 않을 완벽한 알리바이까지 만들어주는 살인마 K(김혜준 분)라는 인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바로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구경이>는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하기는 했으나 어딘지 이질적이어서, 마치 '평행 우주' 속 현대 한국처럼 느껴졌다. 배우 본인과 배역 간의 격차, 그러니까 떡진 머리에 운동복을 걸쳐 놔도 감춰지지 않는 빛나는 외모를 가졌는데(본체가 이영애니까 당연하다) 입으로 들어가는 건 술이요 나오는 건 험한 말인 주인공 경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드라마 <구경이>의 세계에서 제희와 경수, 경이와 경이의 게임 동료 산타(백성철 분), K와 K의 조력자 건욱(이홍내 분), 그리고 K를 잡으려 하는 의뭉스러운 인물 용숙 국장(김해숙 분)과 비서 김 부장(정석용 분)까지 모든 관계는 여성이 상급자이고 남성이 하급자인 구도로 짜여 있다. 남성 캐릭터들은 평소 여성의 지시를 이행하고 음식점에서 수저와 접시를 놓는 등 시중을 들뿐 아니라, 때로는 어질러진 집안을 정리하고 돌봄을 제공하기까지 한다.
주요 인물들 뿐 아니라, 검찰청 신(Scene)에서 단역으로 나오는 검사들조차 지시를 내리고 심문을 하는 검사는 여성이고 "나가 있으라"는 턱짓에 냉큼 나가서 밥을 먹으러 가는 부하 검사는 남성이다.
한결같이 여성은 냉철하게, 때로는 잔혹하게 큰일을 도모하고, 남성이 잔일을 처리하고 감정 노동을 제공하는 세계관이다.
또한, 보통 드라마에서 여성과 남성이 파트너로 등장할 때 흔히 엮이는 연애 감정은 이 인물들 사이에 표현되지 않는다. 이들 사이에 흐르는 감정은 존경, 우정, 동료애, 때로는 공포심, 그리고 인간의 인간에 대한 연민 같은 것들이다. <구경이>에서 썸을 타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오해하고, 삐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보통의 연애'를 하는 커플은 건욱과 건욱의 직장 동료 대호 커플이 유일하다. 건욱과 대호. 이름에서 짐작되듯이 이들은 남성-남성 커플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동성 커플이 등장하는 것은 드물기는 하지만 그동안 없었던 일은 아니다. 내가 <구경이>의 세계가 조금 더 특별하다고 느낀 것은 건욱과 대호 커플의 존재가 너무나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그간 드라마에서 동성 커플이 등장하면 이들은 '독특한' 존재로서 부각되었다. 이들이 친구가 아니라 연인임을 분명히 하는 장면-키스신이라든가, 사랑한다는 대사-을 비중 있게 넣고, 성 소수자라는 점이 그 캐릭터에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으로 다루어졌다. 다른 인물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 드라마틱하게 표현되고, 주변은 그들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사람과 반대하고 역겨워하는 사람으로 나뉘었다.
서글프지만, 이렇게 '성 소수자'라는 사실이 다소 지나치리만큼 언급되는 쪽이 현실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경이>에서는 조금 다르다. 그들은 그냥, '있다'.
대호는 건욱에게 "저녁에 운동해야 돼서 나랑 밥 먹을 시간 없으려나?"하고 데이트 신청을 하고, 둘은 자연스럽게 커플이 된다. 정체성을 가지고 고뇌하는 장면도 없고, 성 소수자라는 사실이 그 캐릭터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그려지지도 않는다.
대호를 처음 본 K는 건욱에게 대번에 "애인 생겼다고 이제 나는 찬밥이냐?"라고 짜증을 내고, 극의 후반에 경찰이나 의사들도 '친구라고 하기에는 좀 남달라 보이는' 대호와 건욱을 보게 되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신기해하지도, 징그러워하거나 이상해 하지도, 쑥덕대지도 않는다. 이성 커플을 두고 대개 '그런가 보다'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K는 잔혹한 살인마이다. 그야말로 생면부지의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인다. 증거 하나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죄책감도 당연히 없고 잡히지 않을 자신도 있고, 동기가 K 본인의 원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므로 살인을 멈출 이유가 하나도 없다.
이런 연쇄 살인마가 존재하는 <구경이> 속 현대 한국은, 실제 현대 한국보다 훨씬 공포스럽고 끔찍한 세상인가? 나의 생각은 '아닐 것 같다'이다.
K는 살인을 방조하고 범죄를 은닉한 사람을 죽인다.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풀려난 불법 촬영 가해자를 죽인다. 직장 내 왕따 가해자를, 동물 학대범을, 가정 폭력과 아동 학대를 저지른 사람을, 법과 공권력이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피해자를 대신하여 죽인다.
실제 현대 한국에 존재하거나 존재했던 살인마는 어떤 사람인가? 이춘재는, 유영철은, 강호순은, 김성민은, 김태현은 어떤 사람을 죽였나?
K는 "엄마가 나를 버렸으니까"라는 이유로 엄마를 닮은 여성이나 매매춘 여성을 죽이지 않는다. 노래방 화장실에서, 지하철 승강장에서, 길에서 처음 만난 여성을 "기분이 나빠서",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어서" 죽이지 않는다. 전 여자 친구의 부모나 형제를 찾아가 "나랑 헤어지라고 했다고" 죽이지 않는다. “왜 안 만나줘”라는 이유로 죽이지 않는다.
K는 두둔은 못해도 일말의 납득은 가는 범죄자, 그러면 안된다는 것은 알지만 가끔은 응원해 주고 싶은 구석이 있는 범죄자, 잡히더라도 무거운 처벌에 앞서 정신과 치료를 받았으면 좋겠는 범죄자이다. 나에게는 실제 현대 한국보다도 K가 존재하는 <구경이> 속 현대 한국이 차라리 안전하게 느껴졌다.
여기에 여성들이 사회의 요직을 차지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고, 동성 커플이 이성 커플보다 딱히 눈에 덜 띌 것도 더 띌 것도 없는 세계관이라니. 그야말로 '경이로운'(주인공의 이름 구경이가 '경이롭다'는 형용사와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평행 우주 속 세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사실 시즌제 드라마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소위 '데끼 마감'이라고 하던가, 시접 처리가 말끔하게 되지 않은 옷처럼, 드라마가 다음 시즌에 대한 투자를 받는 데 성공하지 못할 경우 깔끔하게 이야기가 마무리되지 못한 채로 끝나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몇 부작으로 계획된 것이 아니었는데 인기가 있다고 해서 없던 속편을 만들어 냈다가는 본편의 아름다웠던 기억까지 망칠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구경이>는, 계획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다음 시즌이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런 세계관이라면, 이런 평행 우주 속 대한민국이라면, 조금 더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