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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May 08. 2023

내가 니 애비, 아니 애미다!

땡볕에 망토 입고 달려봤수?

2023년 5월 6일 토요일


올해도 어김없이 'Star Wars Run' 이벤트가 태평양의 작은 섬, 사이판에서 열렸다.

2011년부터 시작됐다는 이 행사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전 세계의 스타워즈 광팬들이 매년 5월 4일, '스타워즈의 날' 번쩍이는 광선검을 휘두르며 영화 속 캐릭터들의 코스튬을 차려입은 채 축제처럼 즐기는 날이란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스토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요다, 오비완, 레아 공주, 다스 베이더, 루크 스카이 워커 등의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하필 5월 4일이 '스타워즈의 날'이 된 거냐고 묻는다면,

영화 속에서 제다이를 비롯한 많은 등장인물들이 자주 사용하는 인사말인,  "May the force be with you."가 (포스가 당신과 함께 하길) May the 4th be with you와 흡사하게 들린다고 해서  5월 4일을 스타워즈 데이로 정하게 됐다고 답할 수 있겠다.


사이판에서 올해로 세 번째 열리는 이 행사에는, 주로 가족 단위로 많이들 참가하고 각자 최선을 다해 개성을 뽐내는 코스튬 콘테스트와 더불어 , 성인들의 달리기 경주뿐 아니라 어린이들만의 레이스도 따로 열리는 등, 다양한 이벤트와 볼거리, 특별 제작된 메달, 푸짐한 상품들이 제공된다.

올해는 스타워즈 데이인 5월 4일이 목요일이었던 탓에 토요일인 5월 6일로 행사 날짜가 정해졌다.


일단 해가 완전히 뜨고 나면 갑자기 온도가 급상승하면서

이른 아침이라도 그 열기가 장난이 아닌 사이판 기후의 특성상, 거의 대부분의 레이스가 오전 5~6시 사이에 열리는데, 올해는 여러 가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무려 오후 4시 30분에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늦은 오후 시간이지만 여전히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식지 않아 후끈 달아올라있는 공원의 잔디밭 위로 무섭게 이글거리는 오후 햇빛이 무심히 쏟아지고 있었다.

집에서 여유 있게 출발한 덕분에 진작에 공원 행사장에 도착했지만, 선뜻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는데

이유가 단지 무더운 바깥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이 행사에 참가한 나는, 이번에는 나름 코스튬에 신경을 좀 써 보겠노라 작정하고, 온라인으로 주문해서 손꼽아 기다린 끝에 도착한 의상을  다시 수선집에 맡겨 업그레이드까지 하는 극성을 부렸다.

그렇게 선택한 캐릭터는 바로, 스타워즈 클래식 3부작의 주요 빌런인 Darth Vader.

이번 '스타워즈 런' 이벤트의 타이틀이 Revenge of the Sith (스타워즈 에피소드 3)이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 평소에 왠지 다스 베이더에게 끌리는 부분도 있었기에

The power of the dark side를 선택해 보기로 했다.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다스 베이더 코스튬이었으나, 막상 차려입고 보니 갑자기 민망하기도 하고  이 나이에 웬 주책인가 싶어 나도 모르게 자꾸만 쭈뼛거리게 돼서 선뜻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소심하게 차 안에서 바깥 동태만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 나름 정성껏 차려입고 꾸민 참가자들이 하나둘씩 공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소심한 아줌마는 드디어 차 밖으로 나와 주춤거리며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와~~ 너 이번에 신경 좀 썼구나!"

"니 코스튬 진짜 최고다!"

참가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찬사에 어쩔 줄 몰라하는 내가 스스로도 참 웃겼지만, 레이스가 시작되기 전까지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후훗~ 역시, 신경 쓴 보람이 있구만. 코스튬 1등 상도 한번 노려볼만하겠는데?'



우리가 달려야 할 코스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마친  Run Saipan의 회장, 에드워드의 출발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코스튬을 입은 참가자와 입지 않은 참가자들 모두가 동시에 출발선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무더운 토요일 오후.

다스 베이더 코스튬의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 오른손엔, 유난히 짧은 장난감 광선검을 쥐고 공원을 가로질러 죽기 살기로 달리는 방년 50세의 아줌마.

머리에 덮어쓴 후드는 출발선을 통과함과 동시에 벗겨져서

바람에 머리카락은 사정없이 너풀거리고, 총 6킬로미터 코스 중 아직 절반도 달리지 않았는데 이미 온몸은 땀으로 목욕을 한 듯 푹 젖어있다.


스타일을 생각해서 적당히 살살 달려도 되겠구먼

그놈의 몹쓸 승부근성이 나도 모르게 발동한 나머지, 굳이 이를 악 물고 내리쬐는 땡볕 아래서  스타일 구겨가며 헉헉 대면서 달리고 있는 내가 스스로도 참 신기하고 희한할 따름이다.


넓은 공원 내 곳곳에서, 가족이나 친구, 연인과 함께 토요일 오후를 즐기고 있던 사람들이 '스타워즈 런' 참가자들의 레이스를 흥미 있게 구경하며 응원을 보낸다.

'아, 6킬로가 원래 이렇게 길었던가...'


메모리얼 파크를 가로질러 3층짜리 Peace Park까지 달려가 가장 힘든 구간인 Peace Park의 2층 언덕을 뛰어오른 후, 2층 전체 바퀴를 돌고 내려와 아래층인 1층도 한 바퀴  달리고 빠져나온 후, 다시 출발 지점으로 돌아오는 코스가 참으로 힘들고 길게만 느껴진다.


달리다 보니, 출발과 동시에 나보다 앞서 치고 나갔던 참가자들이  더위와 뜨거운 태양 아래 서서히 지쳐가며 페이스가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고 사실 중간에 걷고 싶기도 했지만, 악착같이 페이스를 유지하려고 애쓰며 달렸고, 그러다 보니, 앞서가던 몇몇 주자들을 추월할 수 있었다.


드디어 저 멀리 피니쉬 라인이 보이고 응원의 함성이 들려온다.

땀에 절은 머리카락은 물미역처럼 얼굴에 찰싹 붙어 여기저기를 간지럽히고 스타일은 이미 망가져서 물 건너 간지 오래.

잔뜩 찡그린 얼굴은 일그러지다 못해 화가 난 듯 보이기까지 한다.

여자 1위, 남녀 토털 4위, 코스튬 부분 Top 3.

이번 행사의 개인 성적이다.

화가 많이 난듯한 얼굴로 골인하는 거북 맘


유난히 힘들었던 레이스 덕분에 피니쉬 라인에 골인한 후, 한동안 숨을 고르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어야 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옷매무새를 고친 후, 1등 메달을 자랑스럽게 목에 걸고  코스튬 콘테스트에서 받은 상품권을 손에 쥔 채, 흐뭇하게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고  로컬 신문 스포츠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여유도 부려본다.


다스 베이더의 명대사 중 하나이자, 수많은 개그 프로에서 패러디되기도 했던 "I'm your father."

스타워즈, '제국의 역습'에서 루크 스카이 워커에게 자신이 그의 아버지임을 밝히는 장면에서 나오는 너무도 유명한 대사이다.


며칠을 공들인 완벽한 다스 베이더의 코스튬을 입은 나도

어둠의 포스를 뿜어내며 묵직하게 한 마디 던져본다.

"내가 니 애비, 아니 애미다!"


그나저나, 땡볕에 코스튬 입고 달리는 건 정말 보통일이 아니었다.

내리쬐는 햇빛 아래 치렁치렁 망토 입고 달려봤수?

안 달려봤으면 말을 마셔!


힘들었지만 재밌고 특이한 추억을 하나 더 쌓을 수 있었던 오늘의 레이스.

내 나이 오십에 이렇게 주책맞게 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왠지 모르게 이런 분위기가 싫지 않고 오히려 은근히 즐기고 있는 듯하다.

내년 행사엔 어떤 코스튬을 준비할까...

벌써부터 고민하는 거북 맘이다.


스포츠 신문에 실린 인터뷰 기사 링크를 남기며, '내 나이가 뭐 어때서?"라고 슬며시 혼자 미소 지어보는 밤이다.


https://www.saipantribune.com/index.php/taflinger-bang-top-revenge-of-the-sixth-r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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