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남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달리기는 운동화 한 켤레만 있으면 되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달리기 그까짓 거 뭐 대충~ 신발장에서 잠자고 있던 운동화 하나 꺼내 신고, 집에서 입던 편한 옷으로 밖에 나가서 그냥 뛰면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건 러닝에 정식으로 입문하지 않은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다.
하긴, 나 역시 러너가 되기 전에는 달리는데 이렇게나 지출이 많을 줄은 몰랐었다.
헬스장 트레드밀 위에서 깔짝거리며 뛰거나, 간혹 혼자 슬슬 조깅만 하던 때와는 달리,
러닝 클럽에 가입하고 본격적으로 각종 레이스에 참가하면서 훈련량이 점점 늘어날수록, 자꾸만 필요한 것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1. 신발
처음 어설프게 달리기를 시작하던 때가 생각난다. 특정 브랜드에 대한 정보나 러닝화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조차 없던 때...
그래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재고정리 한다고 땡처리로 나온 싸구려 운동화를 사서, 그 신발을 신고 조깅도 하고 생애 첫 10킬로 대회까지 참가했었다.
그에 대한 대가는 발톱의 처참한 피멍들과 진물, 급기야 발톱 빠짐까지... 일제강점기 고문도 아니고... 나름대로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수차례 겪고 나서야 나에게 맞는 러닝화가 어떤 건지, 본격적으로 러닝화에 대해 공부하고 알아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달리기에서 가장 큰 지출을 차지하는 게 바로 러닝화 구입이 되겠다.
풀코스를 준비할 때는 한 달 누적 훈련량이 300km를 훌쩍 넘을 때도 있고, 기본적으로 일주일에 5일 이상은 항상 달리다 보니 새 러닝화를 구입해도 몇 달 안 가서 쿠션과 신발 밑창이 수명을 다하게 된다.
게다가 요즘은, 카본 플레이트가 삽입된 고가의 대회용 러닝화와 훈련용 쿠션화, 트레일 러닝을 위한 신발 등, 용도에 따라 신발을 구매하다 보니 신발장엔 온통 러닝화들로 가득하다.
훈련화도 하나만 계속 신으면 금방 닳아지니까, 구입한 시기가 각각 다른 여러 신발들을 돌아가며 신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나는 '지네 부인'이 되고 말았다.
지금 신발장에 있는 러닝화들을 얼핏 계산해 봐도 족히 몇 백만 원은 나오지 않을까...
문득 얼마 전 외국 러닝 사이트에서 본, 재밌는 사진 하나가 떠 오른다. 피켓을 들고 구걸하는 남자의 사진이었는데, 피켓에는 '돈이 필요해요! 노숙자 아님. 와이프가 러닝화를 계속 사고 있어요!'라는 문구가....
갑자기 우리 신랑에게 미안하고 고마워진다.
소임을 다해서 버린 신발들을 제외하고도 이렇게나 많은 나의 러닝화들
2. 러닝용 GPS 시계
사실, 2년 전만 해도 대회를 나가거나 훈련할 때 핸드폰을 들고뛰었었다.
페이스가 빠르지 않고 그다지 달릴 일이 많지 않던 때는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는데, 레이스 참가 횟수가 점점 늘고 달리는 속도가 빨라지자 휴대폰이 무척이나 거슬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당최 폼이 나질 않았다.
스타트 라인에서 출발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동시에 러닝 시계를 누르며 잽싸게 달려 나가는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 누가 봐도 거추장스러운 핸드폰을 들고, 꺼진 화면을 다급하게 다시 켜면서 러닝 어플의 시작 버튼을 누르는 모습은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부분을 떠나, 전혀 멋져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러닝 시계가 없으면 허전하고 불안할 정도로, 달리미들에겐 없어선 안 될 필수품이자 가장 중요한 친구라고 할 수 있겠다.
한 번 구입을 하면 최소 몇 년은 사용할 수 있으니 러닝화 보다 구입 횟수는 적지만, 한 번에 목돈이 쑥 빠져나가는, 액수가 큰 장비이기도 하다.
게다가 달릴 때 늘 파워풀하고 비트 있는 음악을 즐겨 듣는 나에겐, 블루투스 이어 버드나 골전도 이어폰 등도 필수 품목 중 하나이다.
어디 그뿐인가.
새벽이나 한밤중 같은 어두운 시간에 달리는 일도 많다 보니, 헤드 렌턴이나 플래시도 필요하고, 러닝 도중, 갑자기 불쑥 튀어나오는 떠돌이 개들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견공들만 들을 수 있다는 울트라 소닉 알람 제품도 구입했다.
사이판엔 유난히 무리 지어 다니는 길거리 개들이 많은데, 개를 그다지 무서워하지 않는 나도 신경이 바짝 쓰일 때가 있으니 말이다.
또한 열대 지방의 특성상, 강렬한 태양빛과 자외선 차단이 우수한 러닝용 고글 역시 필수품인데, 복장이나 대회 컨셉에 맞게 색깔별로 화려한 고글을 갖추는 건 스타일리시한 러너의 기본이라 할 수 있겠다.
시원한 푸른색 폴라로이드 렌즈의 고글이 필요하다.
3. 러닝 의류
수십 벌은 족히 되고도 남는 나의 싱글렛들 중 극히 일부
러닝 패션의 화룡점정 역할을 해 주는 선바이저 캡들
러닝의 완성은 패션이지!
이 말에 동의하는 러너들이 꽤 많을 거라고 믿는다. 수백 명에서 수천 명, 혹은 수만 명이 참가하는 마라톤 대회장을 가보면 흡사, 러닝 대회가 아닌 스포츠 의류 패션쇼 무대처럼 보이기도 하니 말이다.
당연히 땀흡수와 통기성이 우수한 드라이 핏의 기능성 원단으로 만든 의류여야 하고, 거기다 다양하고 화려한 색상은, 러너들에게 있어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 되어준다.
왠지 기분이 가라앉거나 의욕이 떨어질 때, 눈부신 형광 오렌지색 싱글렛에 깔맞춤 한 쇼츠를 차려입고, 짙은 네이비색이나 하얀색 선바이저 캡을 쓰고 나서면, 가라앉았던 기분이 희한하게 점점 올라오면서 달리는 게 즐거워짐을 느낀다.
'오늘은 여성의 달을 기념해서 달리는 대회니까, 컨셉에 맞게 아래위로 핑크핑크하게 입고 나가볼까?'
대회장에서 만난 동료나 친구들이 내 패션을 칭찬해 주면, 자신감과 흐뭇함은 두 배가 된다.
이 맛에 달리는 건지, 이 재미에 옷을 사대는 건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울적할 땐 나도 모르게 온라인 쇼핑몰에서 러닝 의류나 모자 등을 고르게 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다 화려해
4. 러너를 위한 뉴트리션과 경기력 향상을 위한 도구들
5킬로나 10킬로미터 정도의 단거리 러닝에서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지만, 하프나 풀코스, 울트라 마라톤 같은 레이스에서 뉴트리션은 러너에게 생명줄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적재적소에 얼마나 영양공급을 잘해 주느냐에 따라, 레이스가 지옥이 될 수도 있고 즐거운 소풍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파워젤 또는 에너지젤 등이 대표적인 스포츠 뉴트리션인데, 워낙 여러 회사의 다양한 제품들이 있다 보니, 자신의 입맛과 취향에 맞는 것을 찾는 일도 꽤 중요하다.
게다가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밤새도록 달리며 어마어마한 땀 배출과 에너지 소모 후에 나타나는 여러 증상들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포도당이나 나트륨 성분이 들어간 알약 타입의 제품도 필수이고,
레이스 도중 갑자기 예고 없이 찾아오기도 하는 허벅지나 종아리의 경련에 대처하기 위한 상품들도 있다.
또한, 힘든 훈련이나 대회 직후, 장경인대나 무릎 부상 등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바르고, 뿌리고, 먹는 타입의 제품들도 늘 상비해둬야 한다.
'폼롤러'나 '마사지 건' 등의 제품들 역시 필수품인데, 러닝 전 후로 뭉치고 피로가 쌓인 근육의 회복을 위한 스트레칭과 더불어 꼭 필요한 것들이다.
그밖에, 달리는 도중 무릎 관절이나 발목 등을 보호해 주는 보호대나 스포츠 테이프, 풀코스나 울트라 마라톤 같은 장거리 러닝에서 필수품인 러닝 재킷이나 벨트, 소프트 플라스크 물통 등도 없어서는 안 될 제품들이다.
그래서, 저것들이 정말 달리는 데 다 필요하다고? 물론! 당연히 꼭 필요한 것들이다.
저런 장비들 이외에도 매번 참가하는 대회 신청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가장 저렴한 대회가 3~4만 원선이고 메이저 대회는 10만 원까지도 하기 때문에, 대회 참가를 자주 할수록 신청비도 제법 드는 게 당연하다.
게다가 요즘은 국내 대회뿐 아니라, 일본, 미국, 독일, 호주 등 해외 마라톤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기 때문에 그 비용은 국내 대회 참가와는 비교도 안 될 것이다.
나 역시 작년 JTBC 대회 참가를 위해 사이판에서 새벽에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도 했고, 올해도 춘천 마라톤에 참가할 예정이며, 다음엔 일본 등 다른 국가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자, 이래도 달리기가 운동화 끈만 바짝 묶고 무작정 뛰기만 하면 되는 저렴한 운동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고가의 장비가 필요한 몇몇 운동에 비하면 저렴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절대 돈이 안 드는 운동은 아닌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옷이나 신발 등의 장비 자체보다, 달리기를 사랑하는 마음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히 실천하는 의지이지만, 운동이든 공부든 일이든... 요새는 특히 마음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