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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Jul 04. 2024

100km, 절반의 성공

폭우 속의 제4 회 문경 울트라 마라톤

6월 29일 오후 6시, 경북 문경 시민운동장.


하늘은 심술궂고 괴팍한 노인네의 그것처럼 잔뜩 찌푸려있고, 굉장한 물폭탄이라도 장전돼 있는 듯 예사롭지 않은 검고 짙은 비구름들이 낮게 깔려있었다.


하지만 어찌하랴.

이 날은 내 생애 첫 100킬로미터 레이스에 도전하는 의미 있고 역사적인 날인 것을...

게다가 전 주에 있었던 뚝섬 한강공원 에서의 하프마라톤에 이어, 한국에서의 두 번째 대회이기도 했던지라 나에겐 이래저래 중요한 이벤트였다.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경북 점촌 터미널까지 내려가야 했던 나는, 마치 소풍 가는 철부지 학생 마냥 들뜨고 신나 있었다.

얼마 만에 타보는 고속버스인지, 게다가 아이들 없이 오롯이 나 혼자라니!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버스에 오르니, 나와 목적이 같아 보이는 몇몇 남자분들이 보였다.

덩치가 크고 제법 무거워 보이는 배낭, 딱 봐도 평상시에 신는 신발이 아닌 레이싱화에 스포티한 모자를 눌러쓴...


그중 중년의 한 남자분이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옆자리에 앉았다.

예사롭지 않은 연륜이 느껴지는 그의 분위기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가 마라톤의 고수라는 걸 알아채기에 충분했고, 나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100km 울트라 마라톤이 무언지도 아직 잘 모르는, 첫 도전인 생초보가 주저하고 가릴 게 무에 있겠느냐 말이다.

박하고 아쉬운 건 나일테니....

내 머릿속엔 무조건 그에게 접근해서 약간의 도움이나 정보라도 얻어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역시 내 의도가 그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었던 걸까.

울트라 마라톤 참가만 90회, 게다가 이미 문경에서의 대회 경험이 있던 그는, 내게 이런저런 정보와 중요한 팁들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며,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자상하게 도움을 주려했다.

점촌 터미널에 도착해서도, 출발지인 문경 시민운동장에서도, 그리고 레이스 이후까지...

나는 그에게 다 갚지 못할 정도로 큰 도움을 받았고 이것은 내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출발지인 문경 시민운동장에 같은 목적으로  모인 200명이 조금 못 돼 보이는 러너들은, 처음 보는 사람과도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응원하고 격려하고 있었다.


드디어 출발.

빗방울은 기어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모두가 예상했던 일인지라 다들 동요 없이 묵묵히 비를 맞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선배님'이라고 부르기로 했고, 이제는 내게 '선배님'이 된 그가, 주로에서 나를 이끌어주고 도와주는 길잡이 역할을 해 줄 만한 사람을 찾아주겠다고 하더니 날렵한 체구에 안경을 쓴 그의 친구를 소개했다.

흔치 않은 나의 성씨와 같은 성을 갖고 있던 그는 내게 또 한 명의 선배가 되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동반주를 하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어쩌다 보니 나와 동반주를 함께 해 준 또 한 명의 초특급 울트라 마라톤 고수가 있었으니...

이번 대회가 그의 281번째 울트라 마라톤 대회라던, 그랜드 슬램만 무려 수십 차례 이상 세운 어마어마한 양반이었다.

참고로 울트라 마라톤 그랜드 슬램이란, 대한민국 횡단 308km, 종단 537km와 622km, 이렇게 3개의 대회를 모두 완주해야 하는, 울트라 마라톤의 최고 명예로 통한다.

그런데 그는 이 그랜드 슬램을 수십 차례나 달성했다고 하니... 가히 괴물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순식간에 세 명의 선배가 생긴 나는, 이들을 각각 '버스 선배', "안 선배', '괴물선배'로 부르기로 했다.


내 앞에서는 버스 선배가 끌어주고, 옆으로는 안 선배가 함께하며, 뒤로는 괴물 선배가 따라오며 밀어주는... 그야말로 고수들에게 둘러싸인 행복하고 든든한 동반주가 쏟아지는 빗속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비는 점점 더 세차게 퍼붓기 시작했고 제법 긴 시간 동안 폭우를 맞으며 달리다 보니 나중엔 정수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가로등도 거의 없는 칠흑같이 깜깜한 주로를, 6시간이 넘도록 장대비를 맞으며 달리다 보니, 나는 급격히 말수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10km마다 물과 간단한 간식을 제공하는 체크 포인트를 향해 이를 악물고 달릴 뿐이었다.


달리는 도중에도 틈틈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그들의 소중한 경험담과 지식을 내게 전수해 주는 선배들과 함께 하며 가슴 벅찬 감동과 감사함을 느꼈다.

"은호 씨, 딱 보니까 훈련이 제법 잘 돼있네! 자세도 잡혀있고, 이 상태로 쭉 가면 완주는 무리 없이 하겠고 기록도 나쁘지 않겠는데?"

몇 시간을 함께 달리며 매의 눈으로 나를 관찰하던 선배님들은 내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절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혹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 비를 맞고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밤새 달리는 거야,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어떻게 알겠는가.

풀벌레 소리만이 가끔 귓가에 들리는...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과 고요 속에서 장대비를 맞으며 달리다가, 문득 비릿한 비의 냄새와 섞인 쌉싸름한 풀내음을 느끼며 온몸에 소름이 돋아 본 적이 없을 테니 말이다.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따로 또 같이... 수백 명과 함께 같은 주로에서 달리고 있으나 결국 나 혼자이고, 나 혼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의 땀방울과 숨소리가 함께 하고 있음을 느끼는 그 묘하고 짜릿한 기분을 모를 테니 말이다.


하지만

40km 체크 포인트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되는데...

기상악화와 점점 나빠지는 주로 상태, 그리고 안전을 염려하는 수많은 민원의 쇄도로 인해 50km 지점에서 대회를 강제 종료 한다는 소식이었다.

이미 6시간이 넘도록 맞을 비는 다 맞아가며 지금껏 달려왔던 주자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결정이었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맥이 빠지고 실망스럽고 감정이 복잡했지만 달리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와 동반주를 했던 선배님들도 무척 안타까워하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은호 씨, 많이 실망스럽겠지만 마음 추스르고 다음 대회를 기약합시다. 나도 은호 씨가 꼭 100km 완주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는데... 미안하네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오히려 그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기어이 52km 지점까지 달리고 대회를 마무리한 우리는, 회송버스를 타고 다시 출발지로 돌아와야만 했다.

'역시 인생은 마라톤과 참 많이 닮았단 말이야.'

한 치 앞도 알 수 없고 항상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며 늘 변수가 도사리고 있는...


나의 100km 첫 울트라 마라톤 도전은 그렇게 끝났다.

그 험하다는 문경새재도 다 넘어보지 못하고 말이다.

하지만 난 이것을 '실패'라고 생각지 않으려 한다.

'절반의 성공'정도면 어떨까.

무슨 차이가 있겠나 싶겠지만 제법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절반을 성공했으니 나머지 절반만 이루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말이다.


비록 절반의 성공만을 이루었지만 돈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하고 귀한 인연을 만들 수 있었던 문경에서의 첫 울트라 마라톤 도전.

갑자기 내 인맥이 확 넓어진 느낌이다.

세 분의 선배님들 외에도 정말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연락처를 주고받다 못해 단톡방까지 만드는, 내 인생에서 흔치 않은 경험도 하게 됐으니 말이다.


"난 정말 운이 좋은, 복이 많은 사람이구나.'

감사한 마음이 드는 저녁이다.

그건 그렇고.... 나머지 절반의 성공을 위해, 다시 한번 도전! 아자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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