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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Jul 24. 2024

해피레그는 아니었지만...

나만의 행복했던 레이스

참가신청을 받기 시작한 지 53분 만에 정원 400명의 접수가 완료되었던 제9회 해피레그 울트라 마라톤 50k.

아이들 방학을 맞아 떠나는 두 달간의 긴 여행에 앞서, 사이판에서 등록에 성공했던 나는 이게 웬 행운이냐며 뛸 듯이 기뻐했었다.


폭우 속에서 6시간을 달리고도 레이스 도중에 대회 강제종료라는 쓴 맛을 느껴야만 했던 문경 100k 울트라 마라톤.

올 가을엔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춘천 마라톤을 뛰어보는구나 싶어서, 큰 기대를 갖고 한 시간 동안 접수에 매달렸지만, 어이없는 시스템 장애와 접속자들의 폭주로 인해 결국 허무하게 탈락.

그 모든 헛헛함을 달래 줄 대회가 해피레그 마라톤일 거라고 위로하며, 레이스 당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한강을 끼고 달리는 코스라 비교적 평탄한 코스겠지? 25km 반환점에서 준다는 수박화채는 얼마나 달고 시원할까?'

기대와 상상을 하면서 그날을 기다렸더랬다.


장마철이긴 해도, 대회 며칠 전부터 유난히 오락가락하던 날씨가 신경 쓰이고 불안하긴 했지만,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괜찮을 거야, 요새 일기예보 정확하지도 않던데 뭘...'

2024년 7월 20일 토요일, 대회 당일.

대회 시작은 밤 11시였지만, 그보다 훨씬 이른 시각인 늦은 오후부터 인터넷 게시판에는 대회에 대한 걱정과 문의글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폭우가 내린 다음이었고 새벽엔 강풍을 동반한 뇌우도 예보 돼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회를 강행하는 건 너무 위험하다, 아니다 대회 몇 시간 전까지 주로를 점검하고 확인했지만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다 등등...

게시판을 들여다보던 나는 당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고 불길한 예감마저 들기 시작했지만, 끝까지 희망을 버리진 않았다.

대회 시작 시간이 가까워 오자 운영진은 지금 대회 준비 중이라는 게시글과 함께 사진을 업로드했고, 만일을 대비해 최대한 숙소에서 늦게 출발하려고 버티던 나도 드디어 대회장으로 향했다.


대림역에서 한 번 갈아타긴 했지만 오래지 않아 도착한 철산역. 딱 봐도 한 밤중에 달리러 가는 티가 팍팍 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열심히 쫓아가며, 설레는 마음으로 그들과 인사를 나누는 여유도 부렸다.

"해피레그 가시는 거죠? 아유~조마조마했는데 드디어 하긴 하나 보네요."

어색한 웃음과 함께 인사를 나누며 대회장으로 가는 도중, 일행 중 한 명이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를 받더니 갑자기 안색이 바뀌며 말한다.

"아니 무슨 이런 일이... 지금 막 대회가 취소됐다는데요..."


농담이겠거니 생각했다. '아니 이 양반이 초면에 농담이 지나치시네...'

그런데 농담이 아니었다. 행정기관의 통제로 급작스럽게 대회는 취소됐으나 현장에 오면 메달과 간식은 나눠준단다. 어이가 없고 화가 나다가 갑자기 헛웃음이 났다.

'아니 도대체 올해 왜 이러지? 뭐 잘못된 게 있나? 나한테 왜 이러세요 정말~~!'


어쨌거나 대회장엔 가보자 싶어 현장에 도착했더니 그야말로 대환장 파티였다.

그래도 이왕 온 거 메달이라도 가져가겠다고 줄 서 있는 참가자들, 화를 내며 따지고 항의하는 사람들, 삼삼오오 모여서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상황인지 파악 중인 사람들, 운영진들의 신속한 철수를 독촉하며 마땅치 않다는 듯 매의 눈으로 감시하는 경찰 관계자와 관할부서 공무원들, 그 모든 걸 어떻게든 정리하고 수습해 보려는 운영진들과 자원 봉사자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고 무지하게 실망스럽고 씁쓸한 나머지 속상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또 한 번 내게 닥친 어이없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주최 측에서 사전에 설치해 둔 듯한 현수막 앞에서 메달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은 후, 지하철도 끊긴 늦은 시간에 택시를 타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에잇 화딱지 난다 정말! 올해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냐!" 맥주 캔을 들이켜고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눈이 떠졌지만 속상한 마음에 그냥 자리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러다 문득 가슴속 저 밑바닥에서부터 슬금슬금 올라오는 오기가 느껴졌다.

'아니 뭐, 대회에서 못 뛰면 나 혼자라도 달리면 되지! 내 오늘, 혼자서라도 꼭 50km 달리고 만다!'

아쉽게도 숙소 근처에서 종종 달리던 조깅 코스 역시 폭우로 인해 통제된 상태. 현재 상황에서 야외 달리기는 트랙 같은 장소가 아니면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면, 숙소에서 가까운 헬스장이 가장 만만하겠군.'


이렇게 해서, 예전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트레드밀 위에서 50km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실내라서 야외보다 쾌적하고, 달리는데도 상대적으로 힘이 덜 들며, 음료나 간식 같은 보급도 훨씬 수월하다는 장점이 있으나, 혼자서 벽을 쳐다보며 4시간 이상, 50km라는 장거리를 트레드밀 위에서 달려야 한다는 건, 단순히 지루함을 떠나 정신력 싸움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 이온 음료와 간단한 간식을 손에 잡히기 쉽도록 트레드밀 위에 놓아두고, 타월도 양쪽 손잡이에 하나씩 걸쳐두었다.

달리는 도중 물을 마시거나 간식을 먹을 때도, 속도를 줄일지언정 멈추거나 걷지는 않으려는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혼자만의 해피레그 마라톤이 시작됐다. 음악도 듣고 이런저런 생각도 하면서 비교적 즐겁게 25km까지 달렸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마음속 갈등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적당히 30km까지만 달려. 그래도 충분히 잘한 거고 훌륭해.' '뭔 소리야, 한 번 결심했으면 끝을 봐야지! 원래대로라면 50km를 달렸어야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닥치고 계속 달려!'


그래도 결국엔 기어이 50km를 끝냈다.

'저 아줌마는 하루종일 저 위에서 달릴 건가' 하는 표정으로 신기하게 흘끗흘끗 바라보는 헬스장 회원들의 시선과, 실내에서 달리는데도 불구하고 워낙에 땀을 흘리다 보니 어느새 다리와 팔뚝에 거칠거칠하게 내려앉은 소금기를 느껴가며 이를 악물고 달렸다.

50km를 신나게 달리고 트레드밀에서 내려오자, 신기하게도 속상하고 씁쓸했던 마음이 거의 사라져 있었다.

물론, 현장의 신나고 짜릿한 분위기를 느끼며 수백 명의 참가자들과 함께 생동감 있게 달려보지 못한 아쉬움이 조금은 남아있지만, 그래도 스스로 뿌듯하고 만족하면 그게 바로 행복한 러닝이 아닐까.


아직도 해피레그 홈페이지에는 미흡했던 운영진들의 대처와 사후 처리에 대해 불만과 항의를 표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이 대회를 위해 지방에서 ktx를 타고 올라왔다는 사람, 일부러 휴가를 내서 참가했다는 사람 등 많은 참가자들의 시간과 돈과 에너지가 모인 큰 이벤트였던 만큼, 좀 더 빠르고 신속하게 결정을 내렸어야 했고,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대처했어야 한다고 본다.

결국, 주최 측에서는 일정 기간 내에 50km를 완주한 기록을 제시하면, 개인별로 기록증과 메달을 보내주겠다는 언택트 대회로의 전환을 공지했다.

이것을 예상하고 달렸던 건 전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언택트 대회용 50km 완주 기록을 세우게 되었고 제일 첫 번째로 기록을 제출하게 되었다.


물론 당시 상황에서는 나 역시 속상하고 화가 많이 났던 게 사실이지만, 나만의 50km 완주 후엔 이제 더 이상 누굴 원망하거나 화를 내고 싶지 않아 졌다.

실제 대회와 다르긴 해도 어쨌든 난 완주를 했으니 그걸로 만족하니까, 그걸로 된 거니까 말이다.

어디선가 들었던 말 중,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거다'라 말이 떠오른다.

우린 달리기를 사랑하는, 달리기에 환장한 러너들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게 언제든, 어느 곳이든, 누구와 함께든, 혼자이든...

그저 달려서 행복한 사람들이 아니던가?

조금은 여유롭고 관대한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보면 어떨까. 우린 러너들 이니까 말이다.

날씨 탓에 아침 조깅을 너무 못하고 있는 요즘이다.

해피레그 대회의 시그니처인 말발굽 메달을 만지작 거리며, 내일 아침엔 꼭 이불을 박차고 나가리라 다짐해 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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