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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였던 우리, <베토벤 바이러스>(2008)

by 안태현

“똥 덩어리”라는 한 마디가 온 국민의 입에 오르락내리락 하던 때의 일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면서 전 세계의 경제가 하나의 ‘똥 덩어리’가 됐던 해의 일이기도 하다. 한국은 이명박 정부의 출범으로 10년 만에 정권 교체가 이뤄졌고, 미국산 소고기 수입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국민들이 광화문에 모인 촛불집회가 사회적인 화두로 떠올랐다.


그만큼 2008년은 수많은 격변들이 일어난 해였다. 그때를 대표하는 드라마를 떠올리다 불현 듯 MBC <베토벤 바이러스>가 떠올랐다. SBS <일지매>와 <베토벤 바이러스>를 두고 저울질을 하다 이 드라마를 내 2008년 인생의 명작으로 꼽은 이유는, 앞서 열거했던 사회적 배경이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당시 고등학생 1학년이었던 나는 오랜 방황 끝에 하나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 방황이란 것도 어떠한 일탈적 행동이 아니고, 꿈에 대한 방황이었다. 어떤 것이 나에게 행복한 일이 될까라는 고민들을 지속해왔던 16년 세월을 버텨낸 끝에, 방황을 마친 나는 영화라는 것을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이런 꿈을 진행할 수 있는 기회랄 것도 없었고, 나는 혼자 카메라로 짤막한 영상들을 찍어서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갔다. 편집도 인터넷을 알음알음 찾아 배웠고, 명작이라고 생각되는 영화들의 시나리오를 구해다가 ‘어떻게 써야하는가’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하면서 나는 실로 어마어마한 거장들의 비법들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다.


주변 사람들은 내게 허무맹랑한 꿈을 꾸지 말라고 닦달했다. 당장 대학입시 공부를 해도 부족할 판에, 영화 공부라니. 따지고 보면, ‘영화 공부할 시간이 있냐?’라는 반응보다는 ‘영화를 공부할 것이 있냐?’라는 반응이 더 많았다. 한창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에릭 로메르 등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에 빠져있던 나에게 그런 반응들은 더 뼈아프게 다가왔다. 응원은 못해줄망정, 어떻게든 내 꿈을 깎아내리려 했던 사람들에게 나는 더욱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그래서 ‘대학 가면 모든 게 다 해결 돼?’라고 누군가가 들으면 아플 수 있는 말을 던지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당장 세계 경제가 무너질 수도 있는 시국이 사람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주변 시선의 불안정함과 어린 나이의 불안정함도 나를 뒤흔들었다. 그래서 ‘사람은 결국 혼자’라는 생각으로 나는 불안정한 나의 생각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면서 이미 꿈을 이룬 사람의 서사나 ‘위대함’으로 대표되는 삶과 닮아가려고 엄청 노력했던 것 같다. 뭔가 그 서사대로 삶을 이어간다면 나 역시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거장들의 영화들을 찾아봤고, 그들의 인생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그들과 닮아가려 했다.


하지만 기행을 일삼던 영화감독들의 일화들을 들으면서, ‘나는 저렇게는 못 살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외국에서 살았던 감독들의 생활과 한국에 살고 있던 나의 상황은 닮으려 해도 닮아갈 수 없었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환경 속에서는 용인되던 기행도 당시의 내가 하면 범죄로 치부될 것이 많았다. 어쩌면 내가 사는 삶의 방식이 틀린 것일까 생각도 했다. 그러던 때에 나는 한국 사회에서 기행을 일삼던 음악계 거장을 만났다. <베토벤 바이러스> 속 강마에(김명민 분)였다.


MBC <베토벤 바이러스>


<베토벤 바이러스>의 배경은 가상의 도시인 석란시다. 석란시의 말단 공무원 두루미(이지아 분)이 문화도시를 만들겠다는 시의 정책에 맞춰서 낸 오케스트라 공모안이 덜컥 채택된다. 이에 시 지원금 3억원이 내려오지만, 두루미가 사기를 당하면서 3억원이 공중분해 되어버린다. 하지만 다행히 그 전에 섭외를 한 세계적 거장인 마에스트로 강건우가 오케스트라의 지휘봉을 잡게 됐다. 행복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이미 섭외했던 단원들이 지원금이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되고 떠나버린 것. 강건우라도 붙잡아야 했던 두루미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오합지졸의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모으는 것 밖에 없었다.


세계적 거장 마에스트로와 형편없는 실력을 가진 단원들이 만나버렸으니 어떤 결과가 초래됐겠는가. 그야말로 파국이었다. 하지만 두루미는 어떻게든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켜야 한다. 3억원을 날리고 오케스트라 프로젝트까지 날려버리면 자신의 목까지 날아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강건우, 그러니깐 강마에는 만만하지 않았다. 그는 도대체 이런 실력을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음악을 하라는 것이냐며 화를 낸다. 두루미한테만 화를 내면 되는데 단원들에게도 화를 낸다. 어떻게든 꿈을 다시 한 번 이뤄보겠다고 도전에 나선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강마에의 그런 신경질적인 성격에 질려간다. 이미 생각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만나버렸으니 그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서 보여준 강마에의 모습은 내가 정말 날서있는 신경을 가지게 만들었던 이들과 똑같았다. 전업 주부로 살다가 다시 음악에 대한 꿈을 꾸고, 도전에 나서는 정희연(송옥숙 분)에게 “똥 덩어리”라는 독설이나 남기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처음의 나는 강마에가 너무 미웠다. 그 사람이 마음속에 따뜻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용기를 주기보다는 채찍질로 사람을 이끌어간다는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면서 든 생각은 단원들의 태도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거였다. 어쨌든 자신들을 내치지 않고 어떻게든 끌고 가려는 강마에에게 사사건건 자신의 사정을 생각해주지 않는다면서 화를 내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런 세계적 거장 밑에서는 어떻게든 버텨야지’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정작 나 자신은 강마에 같은 사람이 싫었음에도, 어쩌면 ‘저 사람 밑에 있는 것도 행운이겠지.’라는 양가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이러한 감정의 충돌은 불안정한 앞서 언급한 나의 상황과 너무 닮아 있었다.


하지만 드라마의 전개가 계속되면서 나의 마음이 변해갔다. 아니, 열려갔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듯하다. 단원들이 과거에 겪은 일들이나, 강마에가 과거 처해있었던 상황의 상처들을 알아간 것의 영향도 컸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이들이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열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부터 내 마음도 열린 것 같다.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을 연다는 커다란 발걸음을 바라보는 일은, 경이로우면서도 행복했다. 또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게 된 강마에와 단원들이 어떻게든 발을 맞춰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든 생각도 있었다. 타인과 자신의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면서 함께 발을 맞춰가겠다는 건 그 어떤 ‘개인이 이뤄낸 업적’ 보다 의미있어 보였다.


서로를 이해한다는 건 결국 포용한다는 거다. 그리고 그 포용은 ‘함께’의 의미를 깨우치게 해준다. 오케스트라라는 체제 자체가 가진 특성이 그러했다. 독주가 아닌 오케스트라에서 음악을 만들어가는 건 어떻게든 ‘함께’해야 가능하다. 특히 오케스트라의 경우는 적게는 60명, 많게는 120명이 넘어가는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음악을 만들어야 했다. 강마에는 그런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내는 지휘자의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b85a2S9yEkIKVSQKmiidkkoBXwA.jpg MBC <베토벤 바이러스>


악기의 색은 저마다 다르다. 바이올린이 피아노의 음색을 두고 ‘너는 틀렸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악기들은 저마다의 다름을 인정한다. 하지만 다르다는 걸 인정한다고 끝나는 문제는 없다. 일단 다르다면, 서로를 조화롭게 어우러지게 하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 여기서부터 강마에와 같은 마에스트로의 역할이 필요하다. 강마에도 물론 ‘음이 틀렸어’라고 지적은 한다. 하지만 그건 정말 악기 스스로가 내야할 음이 틀렸을 때다. 그렇지만 악기 자체의 음이 정확하다면 그때부터는 ‘네가 틀려서 안 되는 거야’라고 말하지 않고 ‘너와 나는 달라, 그래서 함께 맞춰가야 돼’를 강조한다. 그게 아름다운 음악을 만드는 방법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사는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의 잘잘못을 분명히 하고, 그러면서도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했다. 삶을 살다보면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지 못하고 일어나는 다툼들을 자주 마주한다. 사실 대개의 싸움의 시작은 거의 여기서 출발했다. 서로의 ‘다른 부분’을 ‘틀린 부분’이라고 교정하려 든다든가, 반대로 ‘틀린 부분’을 ‘다른 부분’이라고 우기면서 상처를 주는 것들. 거장의 삶과 나의 삶이 다르다고 ‘내가 틀린 삶을 사는 걸까?’라고 생각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영화 공부할 시간이 있냐?’라고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했던 내 주변의 삶들이 내게 던진 상처들도 똑같은 맥락이었다.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태도와 함께 키워야 하는 건 ‘틀린 점’을 구분해내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강마에도 자신의 신경질적인 성격이 틀린 것이라는 걸 점점 생각해가고, 단원들도 자신의 사정만 앞세우는 건 틀린 점이라는 걸 극 중에서 깨달아간다. 그러면서 서로 다른 점을 어떻게 조화롭게 만들어갈지를 고민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하나가 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 음악 속에는 존중과 배려라는 위대함까지 녹아들어 있었다.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는 존중이다. 그리고 다름을 서로 맞춰가는 건 배려다. 반대로 나의 틀림을 인정하는 태도도 상대에 대한 배려다. 상대의 틀린 부분을 지적하는 것도 존중이다. 존중하지 않는다면 굳이 지적도 하지 않는다. 내 삶에서 배척하기만 하면 편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호간의 존중과 배려가 어우러지면 나는 조금은 싸움이 덜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서로를 존중하지 않는 악기들의 음으로 채워진다고 상상해보자. 그 시끄러운 소음을 듣기 싫듯이 삶의 소음을 지워버리기 위해서는 다른 것을 조화롭게 만드는 자세들이 필요하다.


내가 존중 받기 위해서는 타인을 먼저 존중하고, 응원해줘야 한다. 그러나 ‘나를 존중해줘!’라는 태도로 타인을 존중하려고 애쓰면 오히려 독이 되어 나에게 날아온다는 사실도 삶을 살아가면서 차츰 알아갔다.


지금은 영화에 대한 꿈을 포기한지 오래됐지만, 여전히 내 심연에는 언젠가 나의 영화를 만들어야지라는 포부가 깔려있다. 그래서 누군가 정말 고민하고 고민해서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들을 포기한다거나, 새로운 꿈을 꿀 때 응원의 말을 전하려고 애쓴다. 나 역시 그런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처럼 인생을 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게 나와 너의 다름을 인정하는 방식이니깐. 그래서 나라면 그냥 손을 꼭 잡으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뭐가 어떻게 됐든 함께 나아가자”라고. 함께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나아가다 보면 어떠한 지점에는 도달하겠지다. <얼렁뚱땅 흥신소>가 선물해준 ‘과정’의 보물이 여기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너와 나는 다르고, 그런데도 함께 나아가자는 건, 함께 미래를 바라본다는 의미였다. 당연히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의 틀림도 돌아봐야 한다. 틀림과 다름을 구분하는 건 어려운 일이 맞다. 그런데 존중과 배려만 있다면 그건 어떻게든 함께 고민해볼 수 있는 문제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결국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도 이겨냈고, 정치적 이념의 대립 속에서도 서로 화합하면서 나아갔지 않나. 어쨌든 지금도 우리는 ‘우리’로서 함께 하고 있다. 독단과 틀림의 세상에 <베토벤 바이러스>가 내게 전해준 ‘다름의 이해’와 ‘존중과 배려’의 바이러스가 퍼져나갈 수 있기를, 소음으로 가득 찬 세상에 아름다운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흐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조심스럽게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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