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글거려도 괜찮아, <꽃보다 남자>(2009)

by 안태현

가끔씩 누워 있다가 이불을 발로 찰 만한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다. 도대체 내 뇌의 알고리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궁금할 정도로, 불현 듯 떠오르는 기억들이다. 한 번씩은 너무 강렬하게 그런 기억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혀 놓으면서 침대에서 일어나 한참을 주변을 맴돌게 한다. ‘흑역사’ 때문이다. 사실 그 기억들이 후회되는 건 맞지만, 다시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하지만 내게는 커다랗게 남아있는 흑역사들을 고백해본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감성적인 글들을 쓰길 좋아했다. 가장 좋아한 감성들은 ‘아련함’이었다. 그래서 꽤 오글거리는 글들을 싸이월드 미니홈피에다가 남기기도 했다. 경험해보지 못한 감성을 글로 표현하는 건 허세였다. 그래서 일화들을 지어내거나, 어떻게든 사정을 넣어보겠다고 과장해서 표현하기도 했다. 거짓말들이었다. 하지만 거짓말들은 탄로가 나기 마련이다. 결국 그런 것에 찔려서 글을 지워버렸지만, 이미 그걸 읽은 사람들은 마치 내가 그런 경험을 했을 거라고 생각한 뒤였다. 후에 해명을 못해서 거품처럼 사실이 불어나고 나서야 고백했을 때, 밀려오는 쪽팔림들이 너무 심했다. 한 번씩 그 쪽팔림의 기억이 나를 붙잡는다. 그래서 지금은 최대한 이야기를 할 때 혓바닥에 기름칠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거짓말은 결국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 법이다.


이외에도 흑역사의 추억은 많다. 버디버디나 세이클럽 같은 메신저에 남겨뒀던 감성 가득한 글귀 같은 것들이나, 멋있을 줄 알고 입었던 촌스러운 옷을 입고 찍은 사진 같은 것들. 그걸 언뜻언뜻 떠올릴 때나 발견할 때면 정말 ‘내가 왜 그랬을까?’라는 후회가 온몸을 지배한다. 그리고 그 흑역사를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KBS 2TV <꽃보다 남자>다.


지금의 한국 드라마들은 수백억 원대의 예산이 투입돼 화려한 CG와 볼거리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더욱이 한국 시청자들만 상대하는 것이 아닌 해외의 시청자들까지 공략하고 있다. 하지만 2008년의 한국 드라마는 그러지 못했다. 볼썽사나운 CG들이 화면을 가득 메우기도 했고, 정말 오글거리는 대사들이 TV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시대, 대한민국 사람들은 그걸 즐길 수 있는 낭만이 있었다. 그래서 <꽃보다 남자> 같은 드라마도 등장할 수 있었다.


KBS 2TV <꽃보다 남자>


<꽃보다 남자>의 이야기는 흙수저 소녀 금잔디(구혜선 분)가 우연한 기회로 재벌가 자제들이 다니는 신화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시작된다. 신화고등학교에는 F4가 있다, ‘FLOWER 4’의 약자인데, 꽃 같은 남자 네 명이라는 설정이다. 동명의 일본 순정 만화를 배경으로 했으니, 순정 만화와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혀를 내두를 만한 오글거림이 곳곳에 묻어나온다. 지금은 그 오글거림들이 많이 발굴돼서 ‘짤’로 소비되고 있다. 그 짤들에 달리는 댓글들이란 ‘내가 저걸 어떻게 봤지?’ 같은 것들이다. 그 시대, <꽃보다 남자>를 보지 않은 세대의 사람들은 ‘대체 저걸 왜 봤어?’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하여튼 이 꽃 같은 남자 네 명은 구준표(이민호 분), 윤지후, 소이정(김범 분), 송우빈(김준 분)으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순정 만화의 공식대로 구준표와 윤지후가 금잔디에 대한 마음을 키운다. 이후에는 생각하는 대로 그런 금잔디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이들이 넘쳐나고, 구준표와 윤지후는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금잔디를 감싸면서 더욱 관계가 돈독해진다.


당시 출연했던 배우들의 면면과 극 중 설정들을 보면 과연 이게 10대들의 이야기가 맞을까 싶다. 아무리 재벌이라지만, 고등학생이 헬기를 타고 등교를 한다든지, 사람을 종처럼 부리는 모습을 보면 정말 비현실적이다. 동시대에 방송됐던 청소년 드라마는 청소년들이 어떻게 사춘기의 사랑과 성장을 거치는가에 집중했는데, <꽃보다 남자>는 닥치고 우정과 사랑 그리고 돈이었다. 2021년에 방송된 드라마 SBS <펜트하우스> 속 아이들은, 말 그대로 애들 장난이다. ‘꽃보다 남자’ 속 고등학생들은 ‘헬리콥터’를 타고 다녔다니깐! 게다가 “시켜줘, 금잔디 명예소방관”이라는 지금 들으면 오글거리는 멘트들도 서슴없이 뱉어냈다.


지금 보라고 하면 도저히 보지 못할 드라마지만, <꽃보다 남자>의 최고 시청률은 약 32%였다. 대한민국 인구 중 32%는 그걸 보고 있었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때도 이 오글거리는 드라마들을 왜 보냐는 반응이 많았다. 당시에는 ‘오글거리다’라는 표현이 없어서, ‘너무 과한 설정’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걸 버텨내고 ‘설렘 과다’ ‘로맨스 과다’의 종합선물세트 <꽃보다 남자>를 시청했다. 그게 2008년을 살던 사람들의 ‘감성’이었다.


Cap 2023-03-05 18-18-27-112-vert.jpg KBS 2TV <꽃보다 남자>


어린 학생들은 필기구에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사진을 붙이고, 폰트는 최대한 알록달록하게 한 글귀들을 여기저기에 써뒀다. ‘교환 다이어리’도 자주 쓰고, 핸드폰에는 스티커들을 덕지덕지 붙여서 최대한 아기자기하게 꾸민 사람도 많았다. 지금은 시니컬하고 쿨한 감성을 내세우는 2030 세대의 젊은 시절은 그랬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문자메시지 하나를 보낼 때, 이리저리 이모티콘들을 붙여서 ‘귀여움’을 강조했다. 그 당시 가장 유명했던 로맨스 웹소설 작가의 필명도 ‘귀여니’였지 않나, 귀엽고 아기자기한 감성이 그 시대를 관통했다.


하지만 지금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그 때를 돌아보면서 아연실색한다. 그 과잉된 멜로를 과연 어떻게 버텼을까하는 생각에 이불을 발로 찬다. 그러면서 그걸 유머로서 승화시켰다. 싸이월드에서 유행했던 ‘눈물 셀카’, ‘감성 글귀’들을 캡처해서 공유해 키득키득 웃는다. 특히 싸이월드의 자료들을 복구한다고 했을 때, 난 ‘님아 그 판도라 상자를 열지 마시오’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과거 자료들을 복구해냈다. 그리고 발견한 건, 사자머리를 하고 찍은 단체 ‘이미지 사진’(과한 포토샵 보정이 들어간 사진)과 ‘학교라는 감옥’ 같은 오글거리는 단어들이 들어간 글들이었다.


글을 쓰기 위해서 잠깐 <꽃보다 남자>를 다시 봤다. 1화까지는 오글거려 못 참겠더라. 아마 싸이월드 속 자신의 감성 가득한 시대를 돌아본 이들이 마주한 감정과 비슷했을 거다. 그러다 왜 이렇게 과거의 감성을 ‘오글거린다’라고 생각하게 됐을까를 고민하게 됐다. 분명 우리가 살았고, 우리가 만든 감성을 왜 부정하고 있는 걸까.


따지고 보면 그 시대의 우리는 뭐든지 기다려야 했다. 지금은 트렌드의 변화가 하루마다 달라지지만, 그때는 인터넷도 지금처럼 빠르지 않았다. ‘유행’이 변화하는 속도도 느렸다. 정보가 전달되는 속도가 느렸기에 정보를 생산해내는 속도도 느려야했다. 그래서 한 번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모든 내용을 꾹꾹 담아야 했다. 문자 메시지도 동일했다. 카카오톡 메시지와 달리 문자메시지는 한 번 보낼 때마다 돈이 들었다. 게다가 그 양에도 제한이 있었다. 분량에 제한이 있었기에 어떻게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짧은 글에 담아내야 했다. 감정 정보의 함축성은 감성 과다로 이어졌다.


특히 한 번 문자메시지를 보내면 상대가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몰라 전전긍긍해야 했다.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담은 내용이 과연 제대로 도착했을 지에 대해서도 걱정했던 시절이다. 하지만 지금은 카카오톡 메시지를 상대가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고, 문장을 함축할 필요도 없다. 마음껏 메시지를 보내도 공짜다. 게다가 정보가 퍼져나가는 속도도 빨라졌고, 덕분에 정보가 생산되는 속도도 빨라졌다. 삶의 속도가 빨라지다 보니깐 사람들은 그걸 따라가기 바빴다. 여유는 사라졌고, 덕분에 낭만도 희미해졌다. ‘따뜻한 낭만’ 보다는 ‘빠르고 쿨함’이 삶의 미덕이 됐다.


Cap 2023-03-05 18-19-24-076-vert.jpg KBS 2TV <꽃보다 남자>


낭만이 희미해지면서 사람들의 표현도 각박해졌다. 각박해진 표현 속에서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들은 터부시됐다. 그래서 당장 ‘사랑한다’라는 표현을 들을 때도 오글거리게 된다. 게다가 애정표현을 하는 게 부끄럽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그건 전혀 쿨하지 않아서였다.


기다림의 감성이 희미해지면서 닦달과 안절부절함이 늘어났다. 카카오톡 메시지로 사진 한 장 보내는 데에도 10초가 넘어가면 답답하다. 내가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상대방이 읽은 후에도 10분 동안 답장이 없으면 안절부절 못한다. 세상은 빨라지고 기다림은 사치가 됐다. 그러면서 관계도 가벼워졌다. 조금이라도 자기를 기다리게 하면 자신을 기다리지 않게 하는 다른 관계로 넘어가려 한다. 그래서 ‘감성’도 패스트푸드가 됐다. 조금만 ‘감성적’이어도 ‘오글거린다.’라고 말하는 세대가 됐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이 변하는 건 당연하지만, 변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느껴지는 씁쓸함도 있다. 하지만 돌아보면 나 역시 그랬다. 과거의 감성 과다를 보고 오글거리게 느끼고 흑역사로 치부한다. 이미 변한 건 돌릴 수 없다. 그렇지만 분명 그때의 그 감성이 좋았던 것도 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다시 아날로그적인 걸 찾아 나선다.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인생네컷’이라고 스티커 사진을 찍고, LP로 음악을 들으려 한다.


아날로그는 굉장히 성가시다. 알고리즘으로 내 취향을 찾아주지도 않는다. 게다가 필름카메라는 필름을 인화하기 전에 내가 찍은 사진을 확인하지도 못한다. LP로 음악을 들으려면 판을 계속 뒤집어주고 갈아줘야 한다. 게다가 관리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그걸 다시 찾는 건 너무 빨라진 사회 속에서 조금이나마 여유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여유로움 속에서 오는 안락함과 포근함이 있다. 빠른 사회 속에서는 혹시나 나도 트렌드에 밀려 나갈까봐 불안하지만 느린 삶 속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다.


이런 걸 보고 있다 보면 <꽃보다 남자> 같은 드라마가 다시 유행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오글거림’도 새로운 감성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 사람들이 “시켜줘, 금잔디 명예소방관” 같은 말을 다시 쓰게 되는 날도 오겠지. 그때가 만약 온다면 나는 그걸 오글거림으로 치부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냥 모두가 여유로워진 것이라고 생각하려 한다. 그러니깐 조금은 오글거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오글거린다는 건 그만큼 여유가 있고, 빠르지 않고, 포근한 것이니. 그리고 그만큼 낭만적인 삶이니깐.

keyword
이전 09화너와 나였던 우리, <베토벤 바이러스>(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