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쫓고 쫓기는 인생, <추노>(2010)

by 안태현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수능 준비에 매진해야 했던 나는 직감했다. 이번 생은 제대로 글러 먹었다는 걸. 어떻게 된 일이냐고 한다면, 2010년의 이야기부터 풀어내야 한다. 그 해, 대한민국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있었으며, 천안함 피격 사건이 일어나면서 남북 관계가 급속하게 나빠졌다.


당장 전쟁이 일어날 수 있던 시기에 수능 공부라니.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격언은 내게 유효하지 않았다. 그리고 읽는 사람들이 이쯤 되어서 눈치 챘겠지만, 사실 2010년의 이런 상황은 내 결심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내 인생이 글러 먹었다고 생각하게 만든 건, 바로 KBS 2TV에서 방영됐던 <추노>였다.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할 시점에, 이런 명작 드라마가 탄생했다. 어쩔 수 있겠나. 공부에만 매진하지 않고, 나는 <추노>에도 열렬한 관심을 표해야 했다.


<추노>는 제목 그대로 노비를 쫓는 이야기다. 중심인물들은 이대길(장혁 분), 최장군(한정수 분), 왕손이(김지석 분)다. 이 셋은 조선 최고의 추노꾼들이다. 노비들이 어디로 도망가든 주인의 품으로 돌아오게 만든다. 그리고 돌아온 노비들의 얼굴에 노비 낙인이 찍히도록 만드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이대길은 최장군, 왕손이와 함께 노비들을 쫓아 전국을 유랑한다. 이들의 무술 능력은 탁월하다. 특히 이대길은 조선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절권도를 사용한다. 이소룡이 절권도의 창시자로 알려졌지만, 사실 이소룡이 이대길의 후손이 아니었을까를 생각하게 만든다. 여기에 최장군은 창을 이용해 온갖 적들을 물리치고 다닌다. 왕손이는 이들보다 무술 능력은 부족하지만 여심을 훔치는 데는 달인이다. 잘생긴 얼굴과 잘 빠진 근육질 몸매로 뭇 아낙네들의 마음을 흔들고 다니면서 삼인방 중 웃음을 책임졌다.


KBS 2TV '추노'


이야기는 업복(공형진 분)을 쫓는 세 사람의 사연으로 시작된다. 화려한 액션신과 이를 정말 유려한 영상미로 담아내는 연출이 눈길을 사로잡고, 여기에 심장을 뛰게 만드는 OST가 어우러지면서 드라마 속으로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간다. 몰입이 된 드라마 속에서 이대길, 최장군, 왕손이는 노비 업복을 잡아 도망쳐 나온 양반집에 넘겨 버린다. 정말 피도 눈물도 없다. 이들이 양반집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될지를 뻔히 알면서도 돈을 벌기 위해 노비들을 잡으려 혈안이 되어있다.


하지만 삼인방의 대장격인 이대길이 이런 사람으로 변하게 된 이유가 있다. 그가 사랑했던 여자가 바로 노비였던 것. 양반 자제였던 이대길은 이 노비 언년이(이다해 분)를 위해 마음을 키워왔다. 하지만 언년이의 오빠 큰놈이(조재완 분)가 이대길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의 아버지를 죽이면서 사랑은 분노로 바뀐다. 이제 이대길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에 대한 복수심과 자기 집안을 멸하게 만든 이 큰놈이에 대한 분노심으로 휩싸여서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면서 노비를 잡는 사람이 됐다.


그러다 이대길은 일생일대의 라이벌을 만나게 된다. 바로 훈련원 교관이었다가 누명을 쓰고 관노가 되어버린 송태하(오지호 분)다. 송태하가 관노로 있다가 도망친 덕분에 이대길은 그를 쫓게 된다. 하지만 송태하는 추노꾼한테 얽매일 시간이 없다. 당장 자신이 모시기로 맹세한 소현세자의 마지막 혈육 석견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길은 이런 사정을 봐줄 수 없다. 일단 쫓아야 한다.


그런데 이대길을 쫓는 사람도 있다. 바로 이대길 때문에 양반집으로 다시 잡혀 와야 했던 노비 업복이다. 업복이는 베일에 싸인 ‘그분’이 만든 노비당에 가담하면서 양반 사냥을 다닌다. 강원도 산중을 누비면서 호랑이를 잡던 포수였던 업복은 양반 사냥을 다니면서, 자신에게 노비의 낙인이 찍히게 만들었던 이대길에 대한 복수심도 불태운다. 언젠가 ‘그놈의 대가리에 바람구녕을 내겠다’라는 복수심을 불태운다.


결국 이 드라마는 관계가 얽히고설킨 인물들이 서로를 쫓고 쫓는 이야기다. 하지만 재밌는 점은 이 중에서 단 한 명도 자신을 위해서 쫓고 쫓는 일은 없다는 거다. 이대길은 그냥 누가 의뢰를 했기 때문이고, 송태하는 스승이 석견을 지키라고 지시했기 때문이고, 업복은 노비당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쫓는다. 물론, 이대길은 어떻게 해서든 언년이를 찾겠다는 생각이 있다. 하지만 이건 언년이를 찾는 것에 국한된 이야기이고, 송태하를 쫓는 건 그저 윗사람이 돈 주고 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절하게 쫓기고 쫓다 보니깐 인물들은 점점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저 자신들은 윗사람들의 장기말 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이 중심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에서 ‘갑’(甲)은 싸움에 동참하지도 않는다. ‘갑’들은 이 처절한 싸움에 임하고 있는 ‘을’(乙) 뒤에 숨어있다. 그렇기에 뒤로 갈수록 이들은 점점 왜 이 처절한 싸움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되는 거다. 아무리 쫓고 쫓기는 게 인생일지라도 왜 굳이 쫓고 쫓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그러면서 하게 되는 생각은 ‘결국 이 시스템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 속 이대길은 언년이를 만난다. 그러면서 결국 언년이에게 품고 있는 건 증오가 아닌 사랑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러면서 결국 자신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건 썩어빠진 신분제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대길은 그래서 양반도 노비도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업복도 이 썩어빠진 시스템을 뒤엎겠다는 혁명을 꿈꾼다. 이 과정에서 자신에게 양반 사냥을 시켰던 사람의 목적이 사실은 권력을 쥐기 위해 정적(政敵)을 살해하려던 것임을 알게 된다. 배신감에 빠진 업복도 시스템의 문제를 더 처절하게 깨닫는다.


Cap 2023-03-08 22-54-08-766-vert.jpg KBS 2TV <추노>


깨닫는다는 건, 알을 깨고 나오는 거다. 소설 『데미안』처럼 알을 깨고 나온 새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바뀌어야 했다. 그래서 이제 이들의 싸움은 누군가의 지시도 아닌, 누군가의 지시를 받지 않는 사회를 바꾸는 ‘자신만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투쟁이 됐다. 시스템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위해 투쟁한다는 변화는 <추노> 속 인물들이 달려온 길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러면서 시청자들의 삶도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 역시 <추노>를 시청하면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생을 노력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돈을 많이 벌겠다고, 좋은 집에 살겠다고, 편하게 놀면서 살겠다고 경쟁하면서 싸우지만 정작 이 싸움에 너무 지쳐서 사회에서 나가떨어지는 것은 아닐까라는 공포심을 느끼고 있는 나. 이건 분명히 점점 강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에 순응해가면서 약해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전까지는 즐기면서 했던 공부도 시험을 치기 위한 공부라고 생각하니 점점 싫증이 났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굉장히 즐겼지만 문학 지문과 비문학 지문을 읽고 어떻게든 질문 속 다섯 개의 답변을 찾는 작업을 한다는 건 꽤 고단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내 머리를 그 다섯 개의 답변 속으로 가둬놔야 했다.


암기형 과목들은 그렇다고 쳐도 그러지 않은 과목들의 공부를 하다보면, ‘왜 이걸 공부해야 하지?’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사실 수능 시험에서 나오는 것들이 정말 살다보면 필요할 때가 온다. 하지만 그때가 되어서야 ‘아, 이래서 공부를 해야 했구나’를 깨닫는 거지, 실상 공부를 할 때는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해야 하니깐 해야 했다. 그저 ‘대학에 가야 해서’라는 추상적인 이유는 나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나 역시 수능 시험이라는 무한 경쟁의 상징에 대해 반기를 들고자 했다. 경쟁을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이라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한 수험생의 투쟁이 아닌 투정일 뿐이었다. <추노>는 사회주의 혁명처럼 극단적인 프롤레타리아의 궐기를 메시지로 전달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추노>는 그냥 고민만 하게 만드는 거다. ‘정말 행복한 삶은 무엇인가’인지 말이다. 서로 쫓고 쫓는 게 행복한 인생을 찾기 위한 과정일까. 그런데 아찔하게도 내 시청의 결론은 ‘아니다’였다. 쫓고 쫓는 삶이 끝나는 지점에 와서 <추노>는 그 싸움의 허무함을 강조했다. 결국 남은 것은 너덜너덜해진 삶 밖에 없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그 시절의 나는 생각했다. “그래, 남들과 경쟁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길로 나아가야지”라고. 남들보다 앞서 가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Cap 2023-03-08 22-55-38-644-vert.jpg KBS 2TV <추노>


수능이라는 사회가 정해놓은 규율에 반기를 든 수험생의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나는 수능 시험에서에 대한 반기를 원하는 대학 진학의 실패라는 결과지로 받아 들여야 했다. 내가 쫓고 쫓는 걸 그만한다고 해서 남들이 나를 쫓는 걸 그만둘 이유는 없었다. 결국 나는 영화과 입시에서 모두 떨어지고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하게 됐다. 지원 이유로는 ‘시나리오 공부를 해야지.’와 ‘글 쓰는 건 원래 좋아했으니.’가 있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지금은 잘 된 일이 됐다. 영화 현장에서 몇 번 일을 하다가 포기를 해버렸던 나에게 문예창작학과 졸업장은 꽤 좋은 보험증서 역할을 해줬다.


하여튼 나는 이 혁명 실패를 통해 경쟁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를 쫓는 삶을 살려고 하는 건 아니다. 그저 내가 바라보는 꿈에 좀 더 다가가려고 나만의 경쟁을 하는 거다. 나의 나태함과 경쟁하고, 나의 불안과 경쟁한다. 희망은 좀처럼 멀리 있는 것 같고 불안함과 게으름은 늘 가까이에 있다. 가까이에 있는 것에 먹혀버리는 순간, <추노>처럼 게으름의 낙인이 얼굴 어딘가에 찍혀버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마음 속 어딘가에는 모두가 쫓고 쫓지 않는 유토피아가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늘 품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소련의 해체 이후 그 이상적인 꿈의 허상은 사라졌다. 방법은 뭐 여러 가지겠지만, 지금 떠오르는 걸로는 자연인이 되거나 사회에서 도망쳐야지 그게 가능할 것 같다. 혹은 어느 종교 집단처럼 사회와 격리된 공간에서 단체 생활이라고 해야 한다. 하지만 난 그걸 원치는 않는다. 그래서 계속 고민했다. 하지만 찾은 답은 뭐냐고? ‘아직 모르겠다.’다.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글을 써놓고 ‘아직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게 정말 무책임하지만, 약육강식의 자연 법칙을 거스르기 위해서 인간이 쌓아올린 사회는 결국 약육강식의 구조 자체를 엎어버릴 수 없었다는 게 역사가 증명하는 바다.


하지만 이 구조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있다. 순응해야하는 슬픔은 있지만, 그래도 살아남는다는 희망을 가지는 건 바로 ‘함께’의 의미를 되새기는 거였다. 이대길이 그 쫓고 쫓기는 삶에서 그나마 희망을 가졌던 건 옆에 최장군과 왕손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업복 역시 자신의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송태하 역시 자신을 믿고 따르던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그 고단한 싸움을 버텨냈다.


아무리 누가 칼을 들이댄다고 하더라도, 그 칼날을 막아주는 건 곁에 있는 사람들이다. 또 칼에 깊게 베이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은 ‘함께 해야 한다.’라는 의지에서 나올 수 있다. 수능 시험을 망쳐 암울해 있던 내게 용기를 불어넣어줬던 우리 부모님처럼. 결국 누군가가 당신의 힘이 된다. 당신 역시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 <베토벤 바이러스> 전해준 ‘함께’라는 희망은 <추노>가 던져준 고민에서도 당당히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와 함께 했던 내 유년의 10년처럼.

keyword
이전 10화오글거려도 괜찮아, <꽃보다 남자>(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