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글을 쓰는 이유, <뿌리깊은 나무>(2011)

by 안태현

스무 살, 영화과 입시를 포기하고 문예창작학과에서 ‘결국 글을 쓰자’라는 마음을 잡았을 때다. 나는 그 시기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끄적이던 시와 시나리오들도 있었으나 그저 쓰고 싶어서 썼던 것이기에 전공을 ‘글쓰기’로 선택한 나는 이제는 글을 써야 할 좋은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읽고 쓰고를 반복했다. 좋은 명분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방향성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좋은 명분이 좋은 글을 만든다는 명제는 언제나 그렇듯 좋은 재료가 있다고 맛있는 음식이 나오지 않는다는 인생의 진리에 배반되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의 스무 살은 참담했다. 목적도 불분명했고, 그로 달려 나갈 수 있을 수단 찾기도 불분명했다. 시를 쓴다고 덤볐으나 좋은 시를 쓰지는 못했고, 소설을 쓰고자 했을 때도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있는 것을 너무 힘들어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읽고 쓰고를 반복하는 데에 있어서 ‘읽는 것’에만 집중했다. 글을 제작해야 하는 학과에서 글을 소비하는 역할만 한다는 건 식충이나 다름없었다. 학과 공부보다 도서관에서 혼자 책 읽으면서 공부하는 게 그래서 더 좋았다. 그래서 그 시기의 나는 영화, 드라마, 소설, 시 등을 끊임없이 먹어치웠다. 그 덕분에 지금은 ‘내가 이걸 왜 알고 있는 거지?’라고 생각되는 부분들이 많다. 아마 그때 그렇게 먹어치운 게 ‘알고 있지만 쓸모없는 지식’으로 소화된 듯하다.


하여튼 그렇게 방황하던 때 내가 만난 드라마가 있었으니 SBS <뿌리깊은 나무>였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추노>에 그렇게 세게 데었던 경험이 있음에도 나는 드라마 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드라마는 항상 내 옆에 있었다. 드라마 시청은 어머니가 내게 남긴 위대한 유산이었고, 나는 그 유산을 거부하지 않았다. 어쩌면 드라마는 너무 내 삶 깊숙하게 들어와 있어서 드라마 없는 삶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보고 또 봤다. 그리고 본 걸 또 봤다. 그중에 하나가 <뿌리깊은 나무>다.


<뿌리깊은 나무>는 훗날 ‘세종대왕’이라는 위대한 이름으로 남은 이도(한석규 분)가 어떻게 훈민정음을 만들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이도라는 인간에 집중하지 않는다. 게다가 정사를 배경으로 만든 정통 사극도 아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이도이기도 하지만, 강채윤(장혁 분)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더 앞으로 내세웠다.


Cap 2023-03-08 23-02-55-810-vert.jpg SBS <뿌리깊은 나무>


강채윤의 이야기는 이렇다. 어린 시절, ‘한짓골 똘복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그는 이도의 장인인 심온대감 댁 노비의 아들이었다. 노비라는 신분이 있었지만, 그는 그래도 행복했다. 아버지도 있었고, 소꿉친구 소이(신세경 분)와도 오순도순 잘 살았다. 하지만 그 시대의 노비의 행복한 삶은 자신 주인의 삶을 따라가야 했다. 어느 날, 태종 이방원(백윤식 분)의 계략으로 심온의 집안이 몰락하면서 강채윤의 삶에도 변화가 닥친다. 역적으로 몰린 심온의 집에 칼을 찬 군인들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그렇게 군인들의 칼에 아버지가 죽는다. 소이는 아마 죽었다고 예상했다. 강채윤은 그때 생각한다. ‘이놈의 윗대가리 놈들이 자신의 삶을 가지고 노는 게 문제다’라고. 그래서 강채윤은 당시 왕이었던 이도에 대한 분노를 마음속에 품는다. 겨우 살아남은 강채윤의 목표는 이제 하나다. 이도를 죽이고 아버지와 소이의 복수를 하는 것. 백성을 버린 왕을 백성의 손으로 처리하는 게 강채윤의 일생목표였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이도는 강채윤이 생각하는 그런 악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강채윤이 역심을 품어야 하는 이는 이방원이었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친인척을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았던 이방원. 그의 아들인 이도는 전혀 달랐다. 그저 권력자 아버지의 밑에서 눈치나 보면서 유약하게 숨어 마방진이나 푸는 게 유일한 인생의 낙이었다. 괜히 좋은 머리를 가지고 아버지에게 대적했다가는 그 좋은 머리가 잘려서 땅바닥에 구를 수도 있었다. 왕은 됐지만, 선왕의 꼭두각시 노릇 밖에 할 수 없었다. 그게 <뿌리깊은 나무> 속 이도였다. 물론 드라마이기 때문에 각색이 들어간 부분이다. 실제 이방원은 이도를 끔찍이도 아꼈다.


일단 다시 드라마 얘기로 돌아와 본다. 심온이 태종에게 내쳐지던 날, 이도는 처음으로 아버지 앞에서 반기를 든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똘복(훗날의 강채윤)을 숨겨두고, 그를 지키겠다고 나선 것. 역당의 노비도 무조건 처단해야 한다는 아버지 이방원 앞에서 이도는 눈에 핏대를 세우면서 그 역시 자신의 백성이라고 소리친다. 그리고 이방원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처단했던 모든 이들의 이름을 열거한다. 그 속에서 이도는 자신은 왕권이 중심이 되는 조선이 아닌 백성이 중심이 되는 조선을 만들겠다고 선포한다.


Cap 2022-12-16 13-20-52-204-vert.jpg SBS '뿌리깊은 나무'


이런 이도의 마음은 훗날 ‘훈민정음’을 만들게 되는 마음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그 당시의 권력자들의 마음은 이도와 달랐다. 이방원이 죽고 나서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글자까지 만들었으나 이번에는 사대부들이 이도의 앞을 막아섰다. 그들은 백성들이 글을 쓰고 읽게 되면 재상의 힘이 약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백성이 뿌리가 되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생각한 이도의 생각 자체가 글러먹었다고 판단했다. 왜냐 이들은 애초에 나라의 뿌리는 재상에 있다고 생각하는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비밀 단체를 만들었다. 이름부터가 근본을 상징하는 ‘밀본’이다. 이 역시 <뿌리깊은 나무> 세계관에서만 등장하는 단체이니 실제 역사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군주와 재상의 싸움. 이도는 이 지지부진한 싸움 속에서 나라의 뿌리는 군주와 재상도 아닌 백성이라는 생각을 앞세운다. 그래서 글자를 만든다. 백성도 지식이 있어야 자립할 수 있다는 이도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모르는 강채윤은 시종일관 세종의 계획을 방해하려고 든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가 이도에 대한 마음을 바꾸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 바로 이도가 만든 글자를 배우게 된 것. 이 글자를 처음 마주했을 때, 강채윤은 이도가 또 되지도 않는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라고 지레짐작한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하루 반나절 만에 이도가 만든 새로운 문자를 익히고, 자신이 아꼈던 아버지의 이름을 문자로 남길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한자로는 쓸 수 없었던 아버지의 이름을 이제 글로 쓸 수 있게 됐다.


인류가 ‘기록’이라는 것을 발명했을 때의 위대한 진보처럼, 강채윤 또한 자신이 말하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훈민정음’을 만났을 때 세상이 바뀔 수 있겠다고 믿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도를 따른다. 그리고 강채윤과 이도의 곁에는 비밀조직 천지계원과 조선 제일검 무휼(조진웅 분)이 있다. 천지계원은 이도가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에 일조한 이들로, 죽은 줄 알았던 강채윤의 소꿉친구 소이와 더불어 정인지(박혁권 분), 성삼문(현우 분), 박팽년(김기범 분), 이순지(천재호 분), 이도의 아들 광평대군(서준영 분) 등이 있다. 이들은 이도가 만든 글자를 세상에 널리 퍼지기까지 정말 열과 성을 다해 도운다.


이렇게 굳이 천지계원의 이름을 나열하는 이유란,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까지 너무나 많은 사람의 땀과 피가 녹아들어 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물론, 이 드라마가 퓨전 사극이다 보니 역사와 다른 부분도 많지만 실제 역사에서도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에는 많은 이들의 열정과 삶이 녹아들어 갔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이 글을 어떤 문자로 쓰고 있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양반이 아니었다면 더더욱 이런 글을 어떻게 쓰고 있었을까. 결국 이도가 만든 글 덕분에 나는 이렇게 사람 구실이라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가진 애민사상에 첫 출발점인 거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이외에도 이도는 친인척조차 칼로 내치면서 권력을 지키려 했던 이방원과 달리, 직접 자신의 적에게도 ‘글’이라는 무기를 쥐어주면서 바뀔 수 있게 하려는 리더십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런 이도의 탁월한 리더십과 어우러지면서 만들어진 훈민정음은 밀본의 살육을 동반한 반대 속에서도 반포에 성공을 한다. 어쨌든 역사적으로 반포에 성공할 것을 알지만, 시청자들이 마음 졸였던 것은 이 과정에서 등장인물 그 누구도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 바람이 이뤄졌을지는 직접 드라마를 보고 확인해줬으면 한다.


Cap 2023-03-08 23-04-00-051-vert.jpg SBS <뿌리깊은 나무>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내게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이도에게 아버지 석삼의 이름을 한글로 써서 바치는 강채윤의 모습이다. 당시 강채윤은 이도에게 아버지 석삼의 이름을 기억해 달라고 얘기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왜 글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아주 사소하지만 위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바로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기록을 한다는 건, 잊지 않기 위함이 크다. 인류가 지금처럼 위대한 문명들을 보존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건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농사짓는 방법을 기록해 후대에 남기고, 철을 제련하는 방법을 기록해 남기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기록해 남겼다. 그 기록은 후대가 참고해 더 좋은 방식으로 발전해 또 기록했다. 하지만 그것도 글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였다.


그래서 이도는 글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쓰고, 남기고, 공유하면서 다 같이 발전해 나가기를 바랐다. 그 덕분에 지금의 나는 이도, 위대한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을 이용해 그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이건 내가 좇던 ‘좋은 글쓰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해례본과 같은 주제였다. 바로 ‘기억하기’다. 나의 상황을 기록하고, 나의 지식을 기록하고, 나의 감정을 기록하고, 그렇게 나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 그것만큼 좋은 글쓰기란 없는 것인데 거창하게 ‘좋은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좇고 있었다.


읽는 자가 없더라도, 기록한다는 건 소중하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지금 남긴 기록은, 훗날 나이가 든 내가 다시 들여다볼 수 있는 과거의 나에 대한 소중한 기억이 될 수도 있다. 그 기록들을 바라보면서 또 다른 글쓰기와 살아가기의 방법이 생길 수도 있는 노릇이다. 물론 누군가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내가 좋은 글을 쓰고 있다고 할 수는 없을 수 있다. 그런데도 나는 글을 쓴다. 글을 쓸 거다. 내게 좋은 글쓰기란, 글을 쓰는 그 자체다. 이도가 강채윤의 손에 칼 대신 붓을 쥐게 해 줬듯, 저 과거의 이도는 지금의 내게 펜을 쥐게 해 줬다. 그래서 나는 내일도 글을 쓸 거다. 이게 내게 이도가 쥐어준 가장 강한 무기다.


나를 지키든, 당신을 지키든, 이 세상을 지키든, 나는 글쓰기라는 무기를 통해 더 탄탄히 나아갈 세상을 꿈꾼다. 그래서 최소한 ‘나쁜 글은 쓰지 않겠다’라는 일념만 가지고 매일 쓰고, 읽는다. 아마 모든 사람들이 그런 일념 하에 산다면 조금 더 나은 삶이 되지 않을까. 글을 쓴다는 게 거창한 건 아니다. 그냥 이도가 꿈꾼 ‘모든 사람이 뿌리가 되는 세상’의 출발점이다. 이도가 꾼 꿈은 거창했으나, 지금 내가 하나의 문장을 쓰는 건 거창하지 않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글을 쓴다. 거창하지 않지만 이 거창하지 않은 것들이 모여서 이도가 꿈꾼 '뿌리 깊은' 세상이 왔다. 난 그렇게 믿는다.

keyword
이전 11화쫓고 쫓기는 인생, <추노>(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