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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는 평등하다, <킹덤>(2019)

by 안태현

20대의 끝자락이 다가오고 있던 스물여덟 살, 나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몸에서 빠지지 않는 신촌 반지하 자취방에 살고 있었다. 내가 살던 집은 80%가 지하에 20%가 지상에 위치한 구조였는데, 창을 열면 다른 건물의 화단이 바로 보였기에 창문은 1년 동안 늘 꾹 닫혀 있었다. 환기라고 해봤자 잠시 서큘레이터를 틀어서 현관문을 열어 시키는 것이 다였다. 그렇게까지 철통보안을 지킨 이유는 벌레 탓이었다.


반지하에 살면 현대의 건물이 굉장히 환경친화적이라는 걸 느낄 수가 있는데, 그건 정말 수많은 벌레들이 각양각색으로 건물에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당시 2년의 기간 동안 그 집에 살면서 바퀴벌레, 꼽등이, 집유령거미, 그리마 등 다양한 벌레들과 생활을 함께 했다. 그건 마치 대도시 서울에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처럼 대자연과 함께하는 경험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아주 개같이 행복한 삶이었다.


그런데 돌아보면 꽤 웃겼던 일화가 많았다. 처음으로 화장실에서 꼽등이를 마주쳤을 때 그놈을 잡기 위해 뜨거운 물을 퍼붓고는 갑자기 뛰어오르는 그놈에 깜짝 놀라 뒤로 자빠질 뻔했던 촌극의 일화도 있으며, 바퀴벌레가 처음으로 그 귀여운 더듬이로 내게 인사를 건넸을 때 친구의 집으로 대피를 가 이틀 동안 집에 돌아가지 않은 일화도 있다.


2019년 5월에는 잠시 친구와 함께 그 반지하방에서 함께 생활을 했는데, 두 사람 모두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소식을 새벽에 듣고 환호를 내질렀던 경험도 있다. 그때 만약 <기생충>이 반지하방의 비루함에 대해 다루는 영화라는 걸 알았다면 친구와 나는 환호의 소리를 내질렀을 수 있었을까. 아마 환호보다는 꺼이꺼이 우는 곡소리가 방을 채웠을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지금 이게 웃겼던 경험이라고 굳이 끄집어내 보는 거다.


하여튼 그때부터 나는 반지하는 사람이 생활할 수 없는 곳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다행히 서울시에서 2022년부터 20년 동안 단계적으로 반지하를 없애겠다고 발표했으니, 제발 20년 후에는 나 같이 그 비루한 공간에서 생활한 청춘이 없기를 그저 바라고 바랄 뿐이다. 또 두 번째로 다행인 것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신림의 한 원룸에서 벌레 하나 없고, 습기 차는 것도 없고, 환기도 매 시간 할 수 있는 쾌적한 삶을 살고 있다는 거다. 층수도 반지하에서 두 단계 껑충 뛰어오른 2층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당시 방보다 지금 방이 더 넓음에도 불구하고 월세가 10만원 싸다는 거다. 그러니 이 글의 교훈은 부동산 발품을 잘 팔다 보면 좋은 방을 싼 가격에 구할 수 있다는 걸까. 아니다. 아직 드라마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넷플릭스 <킹덤>

반지하방에 살면서 가장 부러웠던 건 바로 아파트에 사는 삶이었다.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 계단을 내려가는 게 아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삶을 동경했다. 고층에는 바퀴벌레도 힘들어서 못 올라오겠지. 하지만 그 시기에 봤던 기사는 참으로 암울했는데, 바로 임대 아파트 거주민들에 대한 차별을 다룬 기사들이었다. ‘LH에 산다’고 ‘엘사’라고 부른다든가, 임대 아파트 거주민의 아이들이 자가 주민들이 사는 구역으로 통학하는 걸 막기 위해 벽을 세웠다는 내용의 기사들을 보고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임대 아파트도 저렇게 차별받는데 과연 반지하에 사는 나는 얼마나 더 하층민일까 싶었다. 사는 곳으로 계층이 아닌 계급이 나눠진다는 곰팡이보다 더 지독한 우울함의 냄새에 대한 환멸이 밀려왔다. 그때 넷플릭스 <킹덤>을 보게 됐다.

<킹덤>은 넷플릭스가 한국 시장에 처음 발을 내딛으면서 내놓은 오리지널 시리즈. <싸인>, <유령>, <시그널> 등을 집필한 김은희 작가가 내놓은 신작이라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특히 그동안 한국 드라마에서 볼 수 없었던 ‘좀비’라는 장르를 전면으로 내세웠다는 부분에서 많은 국내 드라마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나 역시 그중에 한 명이었다. 또 처음 보는 액수의 제작비에 깜짝 놀랐고, 주지훈, 배두나, 류승룡 등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라인업에 두 번 놀랐다.


그러니깐, 이 드라마는 드라마 팬인 나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작품이었다. 게다가 한 주씩 기다릴 필요 없이 전편 동시 공개라니. 나는 거리낌 없이 넷플릭스에게 내 구독료를 갖다 바치는 것을 선택했다. 그 후 매달 넷플릭스에 돈을 박아 넣을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킹덤>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좀비 스릴러물이기도 하다. 좀비라는 SF 장르와 조선시대라는 사극 장르가 만나다니. “역시 갓은희”라고 외치면서 나는 드라마에 빨려 들어갔다. 이야기는 지금은 부산이라고 지명이 바뀐 동래에서 시작된다. 동래의 의원 지율헌에서 일하는 의녀 서비(배두나 분)가 그 중심에 있다. 어느 날 왕을 진찰한 이승희(권범택 분) 의원은 어린 제자 단이의 시신을 털레털레 끌고 지율헌으로 돌아오는데, 아무도 단이가 이미 좀비가 된 왕에게 물린 존재라는 걸 모르고 있던 때였다. 그 비밀은 오직 이승희 의원만이 알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미 권문세가인 혜원 조씨 조학주(류승룡 분)의 명을 받아 죽은 왕을 생사초를 이용해 좀비로 되살린 장본인이었다. 물론 배경이 조선이니, 극 중에서는 영어인 좀비를 대신해 ‘생사역’이라는 단어를 쓴다.


지율헌에는 병에 걸린 수많은 병자들이 제대로 된 끼니도 먹지 못한 채 골골 앓고 있는 상황. 이에 착호군(호랑이 잡는 군대) 출신 영신(김성규 분)이 병자들에게 고깃국이라도 먹여보자고, 단이의 시신으로 국을 끓인다. 그리고 이게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됐다. 사람 고기, 특히 생사역에게 물린 시신으로 만든 고깃국인 줄도 모르고 후루룩 쩝쩝 맛을 본 병자들은 이내 온몸을 고통스럽게 비틀면서 생사역으로 변하게 된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생사역이 되어서 이제 정말 사람 고기 못 먹고는 버티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 다행히 영신이 단이와 함께 지율헌을 봉쇄하면서 생사역들이 밖으로 새어나가지는 않게 됐지만, 어쨌든 진짜 ‘좀비 아포칼립스’가 되려면 생사역들이 지율헌 밖으로 탈출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김은희 작가는 굉장히 영리하게 스토리를 만들어내는데, 이창(주지훈 분)의 등장이 바로 그 기제였다.

넷플릭스 <킹덤>

왕세자 이창은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이상한 괴물 신음 소리만 내는 아버지가 걱정돼 안위를 살피려 하지만 조학주의 농간으로 아버지를 만나지도 못하는 신세에 처한 인물. 여기서 조학주는 이미 죽었지만 죽지 않은 왕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이어가려 하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분명 이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시한 이창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난 이승희를 찾아 나선다. 맞다. 이승희를 찾아 나선 이창이 지율헌의 문을 열어젖히면서 대혼란이 펼쳐진다. 물론, 이창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다.


혼란이 펼쳐지는 데에는 ‘유교’ 문화의 문제점까지 얹혀진다. 낮에는 움직이지 않는 생사역이기에, 이를 발견한 관리들과 사람들은 불로 태워야 마땅한 시신들을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의 논리로 지켜낸다. 결국 밤이 되어 그 시신들이 살아나고, 이제 유교 논리 따위는 잊어버린 생사역들이 생사람을 물어뜯는 비극이 펼쳐진다.


생사역들의 혁명이 일어나자 유교와 신분 제도가 지배했던 조선은 낮과 밤이 바뀌듯 전혀 다른 상황을 맞이한다. 양반들은 천한 것들이 자신들을 공격한다고 소리치면서 도망가기 바쁘고, 부모를 공경해야 했고 자식은 지극히 아껴야 했던 생사역들은 부모자식 구분 없이 물어뜯기 시작한다. 게다가 높으신 관리들은 이제 자기들 밑에 있던 사람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생사초의 저주로 벌어지는 이 비극의 현장은 세상의 모든 윤리 논리와 지배 논리를 집어삼켜버린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좀비들의 세상이 어쩌면 진정한 평등의 사회가 아닐까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니깐 모두가 잘 살고자 하는 생각으로 만들었던 제도들이나 윤리 의식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이 혼돈의 세상이 ‘진짜 평등한 세상’이라고 생각한 거다.


하지만 이 불온한 생각은 금방 휘발되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런 이성도 없이, 오직 ‘굶주림’의 논리만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짐승 사회나 다름없었다. 인간이 짐승과 구분되는 이유는 이성의 존재 여부라고 17세기 프랑스에 살던 데카르트가 얘기하지 않았던가. 부모도 자식도 못 알아보고 그저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생사역이라는 존재는 한낱 짐승에 불과했다.


이 사고에 도달하니 나는 꽤 슬퍼졌다. 살아서도 굶주림에 허덕여야 했던 사람들은, 죽어서도 그 굶주림을 잊지 못하고 사람을 물어뜯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굶주림’을 방치하던 양반들이나 가진 자들은 생사역에게 제 살을 내어주고 나서야, 그들의 굶주림을 공감하게 되지 않나. 공감한다는 말도 이상한 게, 이들은 이성이 없는 자들이 아닌가. 결국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상황을 방치해 버린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응징을 받았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하여튼 이러한 비극은 내 감정을 굉장히 슬프게 만들었다.


역사적으로 다수의 혁명이 이런 슬픔과 비슷했다. 부르주아들이 배불리 먹는 동안 배를 곪아야 했던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난 프랑스혁명이나, 빈곤에 허덕이다 지친 사람들이 혁명을 부르짖으면서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이나, 실패한 정치 체제 속에서 배고파하던 민중들이 경제 복구를 위해 벌였던 동유럽 혁명 같은 것들. 결국에는 다 배가 고파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배고픈 것보다 참기 힘든 게 이런 현상을 만든 사람들에 대한 분노였다.


다행히 반지하에 살던 나는 이런 이상한 집 구조를 만든 집주인에게 대항하는 혁명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이런 삶들이 계속 늘어나면 언젠가 이 한국 땅에서도 혁명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겠구나 생각했다. 특히 양극화가 계속 심화되다 보면 사회의 상처가 곪을 대로 곪아서는 고름과 피가 터져 나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넷플릭스 <킹덤>

<킹덤>은 생사역들의 물고 뜯는 죽음의 혁명에서 어떻게든 인간의 가치를 지키고자 노력하면서, 잘못된 사회 시스템을 고쳐 나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로 후반부를 채운다. 이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고쳤어야 했지만, 고치지 못해 터져 나왔기에, 고쳐야 함이 마땅하다는 걸 깨달은 힘 있는 자들이 힘없던 자들과 함께 손을 잡으면서부터다.


지금의 사회는 조선시대와 달리 계급이 없지만, 계층이 계급처럼 굳어져서 폐단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씁쓸했지만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반지하에 살면서 사회의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건, 펜트하우스에 살면서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것과 전혀 다른 가치를 가졌기 때문이다. 나의 목소리는 한탄이었고, 펜트하우스 거주자의 목소리는 사회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진중한 걱정이었다. 부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은 배우기 위함이고, 가난한 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은 연민이지 않나. 이게 이 사회에 존재하는 힘의 구조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킹덤>이 보여준 희망이 있다면 힘 있는 자들이 사회의 문제를 진단한 후, 다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보고자 생사역으로부터 산 사람들을 지키고, 문제가 된 사회 현상들을 바꿔나가려는 노력을 들였다는 거였다. 우리가 사는 삶에 만연하게 퍼져있는 편견과 차별,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상처들이 있다. 나는 그게 생사역을 만들어낸 ‘굶주림’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본다. 편견 속에서 차별이 생기고, 차별 속에서 가난함을 벗어날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무너져버린다. 굶주림의 대물림. 이게 신분 사회와 뭐가 다르겠나.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해답을 내놓는 사람이 아니다. 해답을 내놓게 되는 때가 된다면, 나는 어쩌면 실패한 혁명의 수장이 되어서 처형당하는 꼴을 면치 못할 거다. 하지만 생각은 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말처럼 나는 이성을 지닌 존재니 말이다. 그래서 그 생각이란 게 뭐냐면 이렇다. ‘다 같이 생사역이 되어 이성 없는 평등 속에 살아야 할까, 혹은 이성을 이용해 생사역을 만들어내지 않는 합리적인 사회를 만들어야 할까’다. 나는 그 답이 <킹덤>에 있다고 본다. 아니, 어쩌면 <킹덤>을 보는 우리에게 있다고 나는 믿는다. 현상을 유지하든, 바꾸든 그걸 행해야 하는 게 바로 ‘우리’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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