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근현대사에 큰 흥미를 느껴왔다. 단순히 역사 공부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인 게 나는 수능시험 때도 당시 선택 과목이었던 국사와 근현대사를 선택하지 않았다. 연도를 굳이 달달 외우는 것도 원치 않았고, 역사의 스토리만 굉장히 흥미롭게 바라봤을 뿐이었다. 역사를 숫자와 사건으로만 판단하려고 하면,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는 건 꽤나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도 역사 공부를 할 때면 전체적인 서사를 파악하고 그 안에서 세세하게 디테일들을 찾아가면서 탐구한다. 특히 하나의 사건을 두고 여러 가지 의견들로 나누어지는 게 가장 흥미롭다. 저술마다 달라지는 한 사건에 대한 시선 차이를 지켜보다 보면 역사라는 건, 결국 쓰는 사람의 태도마다 달라지는 굉장히 주관성이 짙은 기록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됐다.
근현대사는 이런 첨예한 대립이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근현대사 이전 역사의 경우 사료들이 명백하게 부족해 코끼리 뼈에 살 붙이듯 상상하는 게 다수인데, 근현대사는 사진 자료, 글 자료가 너무 풍성하다. 게다가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삶을 이어오고 있기에 의견 청취도 많이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근현대사를 적확하게 들여다보기는 더욱 어려워지는데, 당장 당시의 사실 분쟁이 지금까지도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점에 가더라도 근현대사에 대해 다루는 다양한 시각들의 서적들이 즐비하다. 가끔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역사적 인물을 두고 설왕설래를 펼칠 때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각각의 사건과 인물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tvN <미스터 션샤인> 또한 그랬다. 종영 후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 드라마로 남은 <미스터 션샤인>이었지만, 방영 당시에는 극 중 등장인물들을 두고 꽤 많은 의견들의 싸움이 벌어졌다. 조선의 노비로 태어나 양반들의 핍박을 견디지 못해 미국으로 건너간 후 해병대 대위가 된 유진 초이(이병헌 분), 백정이라는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서 괴롭힘 당하다 일본으로 도망쳐 일본제국 우익단체의 칼잡이가 된 구동매(유연석 분), 아무 힘없는 조선에서 태어난 한계를 직면하고 방관자가 되기로 결심한 지식인 김희성(변요한 분), 그리고 여성의 인권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던 조선시대에서 집안 어르신들의 지시대로만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고애신(김태리 분) 등이 그 의견의 중심에 섰다.
김희성의 경우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팽배했던 패배주의와 소극적인 친일 행위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냈으며, 고애신은 조선의 여성 문제에 대한 시선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되면서 현실의 여성문제들을 돌이켜 보게 만들었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첨예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진 초이와 구동매의 문제는 달랐다.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미국인의 신분으로 조선의 땅을 밟은 유진 초이와 일본 우익 폭력 단체의 칼잡이가 돼 자신을 핍박했던 사람들에 대해 복수를 하는 구동매의 모습은, 친미 논쟁과 친일 논쟁으로 커지면서 <미스터 션샤인>을 둘러싼 잡음들이 나오게 만들었다.
내 생각은 이랬다. 근현대사를 평가하면서 현대의 시선으로 당시를 바라보며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시대의 인물들의 행동과 사고 또한 현대의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시대가 달라지면서 우리의 생활상에 따라 관념도 달라진다. 하지만 이 달라진 사회적 관념으로 당시 인물의 삶을 평가하는 것은 너무 섣부르다. 특히 신분제도가 없는 지금의 시선으로 유진 초이와 구동매의 행적을 평하는 건 다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건 당시 반민족 행위자들을 두둔하려고 펼치는 이야기가 아니다. 뒤로 가면 그 이유가 나온다. 지금은 그냥 ‘그들이 왜 그렇게 됐냐’가 당시 이 드라마를 보던 나의 시선이었다고 밝혀두고 싶다.
따지고 보면, 유진 초이와 구동매는 나라를 버린 이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라가 이들을 버렸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거다. 그래서 조선에 대한 그들의 시선은 당시 조선에 살던 다수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노비와 백정만큼 그 시대를 힘들게 살았던 인물들이 없지 않나. 애초에 주권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전제군주정치 사회에서 존재했던 구시대적 신분제가 그들의 삶을 옭아맸고, 게다가 생사의 여부까지 결정했다. 유진 초이는 자신이 주인으로 모셔야 했던 양반 가문의 패악으로 어머니가 우물에 몸을 던져 죽어야 했던 비극을 마주해야 했고, 구동매는 백정이라는 이유로 성폭행을 당해도 오히려 가해자보다 더 손가락질받아야 했던 어머니의 비극을 바라봐야 했다. 이 지경에서 이들이 조선이라는 땅에 적을 두고 있어야 했을까.
tvN '미스터 션샤인'
그런데 <미스터 션샤인>은 이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이 오히려 조국 국민들의 해방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그린다. 이 내용이 등장하면서부터는 유진 초이와 구동매를 두고 나왔던 논란들이 정말 몽땅 사라졌다. 물론, 이들이 조선인의 해방 운동에 동참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기제가 ‘사랑’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숭고함을 부정할 수 없다. 나라가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오히려 그 나라를 침략한 외세에 맞서기 위해 기꺼이 피를 흘리는 이들의 모습은 숭고했고, 장엄했으며, 격렬했다. 이 모든 감정들이 ‘사랑’에 포함되는 것이기도 하기에, 어떻게 보면 이들은 사랑 덕분에 정말 조국을 ‘사랑’하게 됐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미스터 션샤인>의 배경이 되는 대한제국 말기는 독립운동과 해방 운동이 동시에 일어난 시기이기도 했다. 주권을 가진 적도 없는 국민들이 전제군주 제도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민으로서의 주권을 가지기 위한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억압의 정책을 펼친 일본 제국에 대한 ‘해방 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당시 독립운동에 동참한 모두가 나라에게 버림받고 나라가 신경 쓰지도 못한 유진 초이였고, 구동매였으며, 김희성이었고, 고애신이었다.
정작 국민들을 위해 조선을 지켜야 했던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전제정치를 더욱 공고화했고, 그 덕분에 문서 하나에 국권을 양도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제 민초들은 자신들이 힘을 가지고, 진정한 자주국민으로서 일어나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스스로 독립하고 국가를 세워,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것만큼의 위대한 발걸음은 없다. 그래서 스스로 일어난 ‘의병’(義兵)의 행보가 더욱 의미가 있는 거다. 누가 떠밀지도, 누가 설득하지도, 누가 이끌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앞장서 나가는 것. 이 정국에서 다른 외세에 빌붙지 않았던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자주 국민’이었다. 반민족행위자를 두둔하고 싶은 게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나. 이게 그 이유다.
숭고함은 용서와 화해를 뛰어넘어서 새로운 역사로 발을 내딛게 만드는 소중한 가치다. 조선의 해방과 대한민국으로서의 독립을 위해 피와 눈물을 흘렸던 그 시대의 유진 초이, 구동매, 김희성, 고애신을 비롯한 무명(無名)의 의병들은 그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 낸 역사의 증인들이었다. 이들을 두고 어떤 부정적 평가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숭고하고 위대한 정신에 대해서는 반박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고 나는 감히 얘기한다.
그들 덕분에 해방되고 독립된 국민들이 그들을 <미스터 션샤인>에서 다시 만났다. ‘독립된 조국에서 씨유 어게인’이라는 자막 그대로였다. 의병으로서 연대하고, 그러면서 스스로의 발로 조국에 섰던 무명의 인물들. 그들을 보면서 나는 ‘연대’를 생각했다. 개개인의 서사가 얽히지만 하나의 뜻으로 연대하면서 ‘무명’이었던 그들은 ‘의병’이 됐다. 그리고 그 의병의 전진은 역사의 전진이 됐다. 개인의 역사가 집단의 역사가 되는 건, 그런 ‘연대’ 정신에서 나왔다. 아참 ‘연세대 정신’이 아니다. ‘연대’(連帶)다.
연대는 모든 가치관을 뛰어넘는 또 다른 숭고함이자 소중함이다. 똘똘 뭉쳐 타인을 공격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힘을 길러 우리의 발로 우뚝 서는 것. 그게 <미스터 션샤인>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정신이었다.
근현대사를 보면서 우리의 현재를 생각해 본다. 여전히 구시대의 정치사상을 두고 대립하고, 서로 경쟁하고, 험담하고 힐난한다. ‘나의 편’의 커다란 비위는 감싸고, ‘남의 편’의 조그마한 티끌을 공격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물론 공동의 적이 나온다면 내 편 네 편 없이 연대할 것이 분명하지만, 그전에 서로 잘 살아나가기 위해 연대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저 섞일 것 같지 않았던 유진 초이, 구동매, 김희성, 고애신, 그리고 수많은 무명의 의병들이 스스로 독립하기 위해 뭉쳤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