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 살, 대학생 4학년의 2학기를 맞이하던 해에 나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아르바이트로 삶을 꾸려나가야 할 자신은 없었고, 어떻게든 취업을 해야 했다. 아직 대학에 한 학기를 더 다닐 시간은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취업 준비도 다 포기할 만큼 축 쳐져 있었다. 그 이유를 풀어보자면 2016년 전반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016년 한 해 동안 나는 학과 학생회장을 하면서 이리저리 불려 다녀야 했고, 이상한 구설에 올라 전전긍긍해야 했다. 특히 그중에는 내가 학생회비를 착복해 일본여행을 다녀왔다는 구설도 있었는데, 나는 그때 그 흔한 여권도 없는 상태였다. 오히려 학생회비를 최대한 쓰지 않으려, 내 장학금을 갈아 넣었건만 ‘그 결과가 이런 구설이라니.’라고 소리치면서 실망했었다.
그러면서 20대의 절반을 돌아봤다. 돈 벌기가 바빠서 여행도 제대로 못 다녔고, 공부와 학생회 일에 신경을 쓴 나머지 당시 내 주변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해외여행은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고, 국내 여행도 사치였다. 이런 상황 속 학생들 사이에서 분쟁까지 발생했다. 학생회장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고 있었던 때였는데, 학생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나를 쏘아댔다. 당사자들의 입장도 있기에 자세히 풀어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중재자의 입장이 되어서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정리하려 했다. 두 사람의 주장은 엇갈렸지만, 결국 그 출발이 감정적인 싸움이라는 것이 명백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감정적 싸움에서 이성적으로 중재안을 찾으려고 했던 건 스물다섯 살 나의 너무 큰 이상이었다. 덕분에 서로를 향하던 화살은 이내 내게로 모아져서 쏟아졌다.
이 시간을 보낸 뒤 스물여섯 살의 시작에 선 나는 오롯이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안장애를 쫓아내기 위해서 술에 의지하거나, 혼자 있는 시간을 최대한 많이 가지려고도 했다. 주변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웃고 있었지만, 훌쩍 사람들 속에서 튀어나와서 눈물을 몰래 훔치고는 했던 시간들. 그 시간 속에서 오랫동안 교제했던 사람도 내게 이별을 고했다. 덕분에 당시의 나는 제대로, 또 완전히 망가질 수 있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너무 힘이 들었고, 피하고 싶어서 학교를 제대로 나가지도 않았으며, 취업 준비를 한다는 명목으로 지인들에게서 오는 대다수의 연락을 피해댔다. 그때의 나는 어느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받은 상처들이 곪을 대로 곪아서는 환부가 어딘지도 모른 채로 썩어가고 있었다.
혼자 집에 누워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같이 살던 누나가 퇴근을 하면 마치 학교에 다녀온 척했지만, 실상은 집에 누워만 있었다. 일주일간 그렇게 시간이 보내다 어쨌든 학교에 나가기도 했지만, 원래 그곳에 없었던 사람처럼 수업만 듣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어쩌다 누굴 마주치면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럴수록 우울은 나를 더욱 깊은 심연 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런 시간을 속절없이 반복하고 있을 때, KBS 2TV <김과장>을 만났다. 종영 후 2개월의 시간이 지난 뒤 재방송을 하고 있던 걸 우연히 마주쳤는데, 이게 운명의 시작이었다.
<김과장>은 조폭의 회계를 봐주고 있던 김성룡(남궁민 분)이 TQ그룹의 경리부에 입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어떻게 조폭 회계 담당이 대기업의 경리부에 들어갔냐고 하면, TQ그룹의 재무이사 서율(이준호 분)이 회계 조작을 위해 그를 불러들인 게 계기였다. 어린 시절, 너무 양심적인 나머지 회사에서 낙인찍혀 힘들게 살아왔던 아버지를 봐왔던 탓에 김성룡은 누구보다 ‘비양심적’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TQ그룹에 들어간 것도 그저 남들보다 잘 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가 김성룡의 삶을 바꿔 놨다. 그 기회란 것도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데, 빙판길에서 미끄러지다가 차에 치일 뻔한 TQ그룹 내부고발자의 아내를 구해준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의인’이 된 김성룡은 한 번 ‘의인으로 살아봐도 되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 ‘TQ그룹에서 한탕 제대로 치고 덴마크로 이민 가자.’는 김성룡의 계획은 조금씩 바뀌어 간다.
김성룡은 회사 내에서도 왕따였다. 변변찮은 이력과 분노조절장애처럼 불같이 화를 내는 성격, 안하무인의 캐릭터가 그를 고립시켰다. 하지만 김성룡의 성격은 어딘가 종잡을 수가 없다. 누구보다 불의로 살아왔으면서, 자신에 대한 불의를 응징하다가 오히려 사람들에게 ‘의인’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천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행동들이 너무 발칙하거나 속된 말로 싹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의인으로 칭송받는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나. 김성룡은 덕분에 제대로 춤을 춘다. 근데 그게 그룹 경영진들의 멱살을 틀어쥐는 ‘칼춤’이라서 문제다. 서율은 회계조작을 위해 그룹으로 불러들인 김성룡이 칼춤을 추니 골머리가 아팠다. 그래서 이제 서율은 김성룡의 상투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분명 악인은 분명한데, 이들의 행보는 다소 이상하다. 김성룡은 자신에게 싸가지 없이 구는 회장의 아들 박명석(동하 분)을 그냥 때리면서 혼내줄 심산이었지만, 그게 박명석을 착한 사람으로 이끄는 계기가 됐다. 후반부에는 TQ그룹의 재무를 조작하다가 뒷덜미가 잡힌 서율이 김성룡을 이용해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자, 갑자기 김성룡은 서율을 착한 사람으로 둔갑시켜 준다. 물론 이것도 김성룡 자신의 약점을 지우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렇게 서율은 자기 잇속 챙기고자 검사까지 때려치우고 TQ그룹에 들어간 사람에서 ‘검사까지 때려치우고 언더커버가 된 의인’으로 변모한다. 이 과정에서 서율이 머리를 쓴 것도 있었지만, 김성룡이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표현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칼춤을 추는 김성룡의 모습은 찐 계란을 먹다가 마시는 사이다처럼 시원하다. 회사의 돈을 자기 마음대로 쓰려고 하는 회장의 아들을 응징하고, 오로지 돈만 생각하고 사람은 뒷전인 경영진에게 쓴소리를 날리고, 그 과정에서 소외받는 이들을 위해 나서는 김성룡의 행보는 청량함으로 가득하다. 다수의 드라마들이 계속해서 복선을 끌고 간 뒤, 마지막이 되어서야 통쾌한 한 방을 날리는 것과 달리 <김과장>은 매회가 사이다 같은 시원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내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답답함까지 소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사람에 의해서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받는다고 하는데, 내 소화불량을 담당해 준 건 김성룡이라는 활명수였다.
<김과장>은 우연한 상황으로 바뀌게 된 사람이, 또 다른 사람들을 바꿔나가고, 그러면서 사회가 바꿔나간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건 이미 그 해, 시민들이 모여서 처음으로 자신들이 뽑은 대통령을 자신들이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한 때 보았던 의미이기도 했다. 상처받았다고 스스로를 고립시켰던 나도 김성룡 덕분에 바뀌게 됐다. 아니, 마침 이틀 동안 <김과장>을 다 시청하고 생각에 빠져있을 때 받은 전화 한 통이 나를 바꿨다고도 할 수 있겠다. 친구의 전화였다. “무슨 일 있냐”라고 시작되지도 않았다. 그냥 딱 한 마디였다. “술 마시자, 나와라.”
외출을 하면서 나는 더럽게 자란 수염을 깔끔하게 면도했다. 민트가 들어간 면도크림이 시원하게 얼굴을 감쌌다. 친구가 있다는 학교 근처 술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결국 사람은 사람이 변하게 만든다.’는 말을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만나서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됐냐?”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미안해, 바빴어.”라고 얘기하고 앉아서 술잔을 나눴다. 억울했던 일들을 쏟아냈고, 사실 그게 별 거 아니었음을, 상처받고 있다고 계속해서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상처의 늪에 빠져있었음을 얘기하면서 술을 마셨다. 친구는 위로 보다는 자기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털어놓으면서 그날 밤의 술잔을 연거푸 채웠다. 그 친구도 자기가 힘들어서 불렀던 건데, 그 우연한 전화가 김성룡의 우연한 미끄러짐처럼 딱 맞아떨어졌던 거였다.
이후에도 똑같은 일을 겪었던 적이 한 번 더 있었지만, 그때도 곁에는 사람이 있었다. 이제의 나는 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의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정말 좋은 사람은 ‘우연히, 그 시간에, 내 곁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자 부지런히 노력할 필요는 없다. 이미 우연한 기회에 우리는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됐을 것이고, 누군가에게 큰 위로를 전해줬을 거다. 그러니 지금 당장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면 어떡하지.’라고 걱정하지 않아야 한다. 부담을 덜어내고 김성룡처럼 그냥 ‘내 방식대로 살자.’를 생각해 보자. 아, 그렇다고 악인이 되라고 하는 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건 남 눈치 보지 말고, 내 방식대로 살면서 각자의 ‘좋은 사람’이 되자는 거니. 그러니깐 오늘은 답답하게 살지 말고, 김성룡처럼 시원하게 살아보자. 해결 방법은 멀리 있는 것 같아도, 실은 가까이에 있다. 못 믿겠다고? 그럼 <김과장>을 한 번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