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하고 찬란하神-도깨비
과거 TV 프로그램에서 단골로 등장했던 소재가 있었으니, 바로 전생이었다. 많은 연예인들이 아늑한 조명 아래 누워서 전생을 탐험하던 모습들을 종종 봐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왜 저렇게 연예인들의 전생은 화려하고 위대한 인물이 많을까 생각했다. 그들의 전생은 늘, 독립운동가였으며 공주였고, 왕자였다. 어떤 이들은 아예 국경을 넘어 해외의 유명인이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왜 전생이 거지이고 노비였던 이는 없을까 싶었다. 과거에는 잘 나가는 사람보다 거지와 노비가 넘쳐났을 텐데, 왜 그들은 다른 이로 환생하지 못했을까 생각했다. 아니면 한 사람의 영혼이 생을 거듭하면서 마치 드래곤볼처럼 여러 개의 영혼으로 갈라지는 걸까도 의심했다. 이런 끝없는 의문의 과정에서 나는 전생이란, 결국 뇌가 상상하는 단순한 이상향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다.
전생이 그러했으니, 사후세계도 마찬가지였다. 단테의 『신곡』처럼 지옥과 천국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언제나 가정에 불과했다. 내가 겪어보지 못하면 믿지 못하는 게 천성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명확하게 지각하고 있었던 건, 바로 나는 언젠가 죽음을 맞을 필멸의 존재라는 점이었다. 학교 후배들은 그 시기 스물다섯 살이던 나에게 ‘반오십’이라고 놀려댔는데, 점점 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점이 내게는 늘 씁쓸함을 안겼다. 사실, 죽는 것에는 순서 없다지만 평균 수명이라는 어떠한 마지노선을 향해 차츰 다가가고 있다는 건 꽤나 우울하고 축축한 생각이었다.
그러던 때에 tvN <쓸쓸하고 찬란하神-도깨비>를 만나게 됐다. 이제부터는 <도깨비>라고 쓸 이 드라마는 죽음, 전생, 환생을 드라마의 중심으로 가져온다. 그러면서 ‘도깨비’라는 존재까지 등장시킨다. 뿔 달리고 뾰족한 요철이 달린 방망이를 든 요괴의 모습이 아니라, 마음 설레게 할 비주얼을 가진 공유의 모습을 통해서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내게 사랑의 의미를 깨우치게 해준 스승 김은숙 작가의 작품이었다. 도깨비든 뭐든. 일단 또 다른 사랑의 이야기가 이 안에 가득 차 있을 것이라는 설렘이 나를 채웠다.
<도깨비>의 이야기는 이렇다. 고려 시대,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인 나머지 불멸의 저주를 받은 김신(공유 분)은 도깨비가 된다. 너무 수많은 피를 묻힌 검이 자신의 심장에 박혀서는 죽지 못하게 된 거다. 이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언젠가 등장할 도깨비 신부가 검을 뽑아줘야 한다. 김신의 가슴에 박힌 검은, 아서 왕의 엑스칼리버처럼 선택된 자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그렇게 939살이 될 때까지 죽지도 못하고, 끊임없이 많은 이들의 삶과 죽음을 목격하고, 곁의 소중한 이들이 필멸하는 역사를 봐오던 김신은 2016년이 되어서야 도깨비 신부 지은탁(김고은 분)을 만나게 된다. 이제 그는 정말로 원했던 죽음을 맞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김신은 지은탁과의 사랑에 빠지면서 좀 더 세상을 살아보고 싶어졌다. 죽음을 조금은 미룰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 거였다. 그러나 김신은 자신이 죽지 않으면, 사랑하는 지은탁이 나이가 들어 죽는 모습을 봐야함을 안다. 그렇지만 김신은 자신이 죽어도, 결국 지은탁과 이별할 것임을 안다. 어떻게든 사랑에 빠진 지은탁과 이별해야 하는 것. 존재가 필멸의 존재와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딜레마의 비극이었다.
도깨비 김신의 곁에는 저승사자(이동욱 분)도 있다. 저승사자의 비주얼도 도깨비와 막상막하다. 갓 쓰고 검은 도포를 입은 게 아니라 최신 유행하는 코트를 입고 있어서 패션모델 뺨친다. 그런데 이 저승사자도 지은탁과 엮여 있다. 그가 이름을 세 번 불러, 저승에 데리고 가야하는 게 지은탁이기 때문. 그래서 김신은 저승사자를 곁에 두고 어떻게든 지은탁을 지키려 한다. 이에 저승사자 일단 지은탁을 살려두기로 정하고는, 도깨비와 동거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을 중심으로 수많은 운명에 대한 전개들이 펼쳐지면서 이들의 이야기는 죽음, 전생, 환생을 뛰어넘은 위대한 사랑으로 주제를 옮긴다.
많은 사람들은 불멸의 꿈을 꾼다. 그 옛날, 진나라의 제1대 황제 진시황은 불멸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 ‘불로장생초’에 집착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결국 불로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은 수은을 마시고 중독되어 제대로 된 명도 살지 못했지만 말이다.
지금의 사람들도 불로장생에 집착한다. 삶에 어떤 미련이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젊고 오래 사는 것에 끊임없이 집착한다. 하지만 그러면서 결국 현생에 이뤄야 할 진짜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목격했다. 기적의 삶을 살겠다면서 사이비 종교에 입교하여 가진 것을 다 잃어버린다던가, 산삼을 먹으면 오래 산다고 믿어 산에 올라가 실족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오래 살기 위해 떠난 여정이 오히려 명을 단축 시켜버리는 아이러니를 목격할 때면, 이보다 황망한 게 따로 있을까 싶다.
그런데 늙지 않고, 죽지 않는 게 그렇게 행복한 일일까. 김신은 900년이 넘는 시간을 살면서 결국 죽지 못하는 게,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임을 알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늙지 않는 자신을 두고, 늙어가고, 병들고, 세상을 떠난다. 그러면서 불멸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외로워진다. 자신이 과거에 인연을 맺었던 사람도 환생을 해서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니, 그보다 고통스러울 게 있나 싶다. 게다가 잊고 싶은 과거의 기억들도 지우지 못한 채, 그 처절한 삶을 계속해서 이끌고 가야 한다. 오히려 그에게 죽지 않는 건 축복이 아니라 형벌에 가까웠다.
극 중 저승사자는 그래서 망자들을 저승으로 인도할 때 망각의 차를 마시게 한다. 이제 이승에서의 기억은 잊고 천국에 가거나 새롭게 환생하면서 희망찬 미래를 만들어가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저승사자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존재에게는 망각의 차도 주지 않은 채 지옥행을 외친다. 기억을 잊지 못하면서, 자신이 지은 죄 속에서 끝없이 고통을 받으라는 처사다. 결국 잊지 못하는 기억만큼 쓰고, 아픈 게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깨비>를 보고 나서, 난 전혀 믿지도 않았던 전생에 대해 깊게 생각했다. 만약 내가 레테의 강을 건너 잊어버린 전생의 기억이 있다면 무엇일까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불교 철학에 꽤 많이 심취돼 있었던 나는 자연스럽게 ‘업보’를 고민하게 됐다. 내가 다시 환생을 했다는 건, 과거의 업보를 지우기 위해서일 텐데 과연 나의 업보는 무엇일까였다. 왜 나는 기억을 지워짐을 알면서도 다시 환생하기를 택했을까. 대체 어떤 삶에 대한 미련과 죄책감이 다시 나를 삶의 현장으로 불러냈을까를 계속 고민했다. 그리고 이번 삶에서 정해진 나의 운명이란 어떻게 흘러갈까에 대한 탐구도 계속됐다.
결국 이런 고민이 계속해서 번뇌를 만들어내 싯다르타처럼 해탈의 경지에 오를 수 없게 만드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머릿속을 생각의 전쟁터로 만들었다. 덕분에 이 시기의 나는 수많은 종교 서적들을 뒤적거리면서 그 답을 찾으려 했다. 성경을 찾아 읽었지만, 큰 감흥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불가지론적 유신론자가 되기는 했지만, 그것도 얼마가지 않았다. 지금은 완전히 무신론자로 돌아섰지만, 그때의 나는 참혹한 생각의 전쟁터 속에서 어떻게든 답을 찾고자 했다.
그러던 중 <도깨비>의 김은숙 작가는 마지막회가 되어서야 그만의 해답을 던져줬다. 그 해답이라고 한다면 정말 뜨악한 것인데, 바로 ‘결국 이런 생각들은 하등 의미가 없다’라는 거였다. 운명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운명이 있는 것이고, 운명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운명이 없다는 것. <도깨비>의 결말은 내게 정말 이랬다. 누구나 해석은 달리 한다지만, 내가 이런 해석을 가지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기억을 잃고도 환생을 거듭해서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는 건, 운명이 아니라 커다란 의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업보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 역시 김신의 커다란 의지였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서 에둘러서 얘기하고 있는 게 너무 답답하지만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어렴풋이 이해했으면 하고, 못 본 사람들이라면 그냥 드라마 내용을 상관하지 않고 이 문장에만 집중해줬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운명과 업보를 아무리 생각해봤자 답을 찾지 못할 것이라면 그저 떨쳐버리는 게 맞다. 애꿎게 그 생각에 집중하다보면 현생의 중요한 답을 찾을 시간도 부족할 터였다. 그래서 나는 김은숙 작가가 던져준 ‘의지’라는 메시지에 집중하고자 했다. <응답하라 1988>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과거를 계속 떠올리는 미련은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게다가 운명에 집착하면서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일에 지레 겁먹어 벌벌 떨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현재의 의지다. 지금의 삶을 잘 밟아나간다면, 내가 기억하는 삶의 길들도 꽤 잘 살아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운명과 의지에 대한 나의 해석은 이후 내 삶에 커다란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 희망을 가지려고 노력했고,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은 희망으로서 바꿔 나가려고 했다. ‘반오십’이라고 놀려대는 후배들에게는 관대한 마음으로 그때가 올 수도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게 됐고, 죽음을 맞이할까봐 두려워하고 우울해 하던 나에게는 그래도 삶을 살아가야하는 의미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 시기 내가 만난 드라마들이란 다 그랬다. <미생>, <응답하라 1988>, <도깨비>까지 3년 동안 이어지는 드라마들이 등장한 시기는 삶에 대한 나의 고민이 깊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덕분에 그 드라마들이 내게 큰 의미로 남은 것이리라. 그래도 이 드라마들 덕에 나는 현재의 중요성을 꽤 강렬하게 마음속에 되새길 수 있었다. 그리고 만들어진 의지의 감정은 ‘누군가 점지한 운명’이 아닌 ‘내가 만들어갈 운명’으로 발현될 수 있는 힘을 내게 줬다.
물론, 내게는 김신처럼 심장에 박힌 거대한 칼도 없고 그 칼을 뽑아줄 도깨비 신부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김신처럼 비장하게 살아갈 필요는 있었다. 바로 내가 떠올리면 후회할 기억들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을 비장한 각오를 다지는 거다. 현생에서는 망각의 차나 레테의 강도 없지만, 후회했던 기억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만들 나라는 존재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곁을 지키는 ‘의지’가 바로 나의 지은탁이었고, 업보와 운명이라는 고통의 고리를 뽑아준 도깨비 신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