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내 별명은 ‘애늙은이’였다. 1992년생인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김광석의 노래를 좋아했고, 옛날 영화와 드라마를 찾아보는 게 취미였다. 특히 읽던 책들도 다수가 고전이어서 그 당시 내게 ‘현재’라는 시제는 굉장히 모호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내가 좋아하는 영화, 드라마, 노래 등을 듣고는 “1992년생인 건 거짓말이고 1980년생 정도는 되어 보인다.”라고 얘기한다.
실제 나도 한 번씩은 부모님이 일부러 출생신고를 10년 이상 늦춰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품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아는 건 ‘겪어서’가 아니라 ‘배워서’라는 것을. 원래부터 옛날 것에 관심이 많았고, 과거에 대한 알 수 없는 향수가 많았다. 그 시대를 살아본 적도 없는 내가 ‘향수’라는 단어를 쓰는 것도 이상하지만, 다르게 대체할 수 없는 단어도 없기에 그냥 써본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많은 이들이 과거를 그리워한다. “그때는 이렇게 힘들지 않았는데”라는 푸념들이 술자리의 안주로 나오게 되면, 오히려 과거를 회상하다가 현재의 시간이 훌쩍 흘러가버린 딜레마에 시달리기도 한다. 내 짧은 인생 속에서도 그런 일은 많았다. 중학생이던 때는 “초등학생 때가 좋았지.”라고 얘기했고, 고등학생 때는 “중학생 때가 좋았지.”라고 말했다.
서른 초반에 들어선 지금의 나는 “20대 때가 참 좋았지.”라고 자주 말한다. 하지만 그 좋았다고 말하는 시대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면, 과연 내가 돌아가겠다고 결정할지는 의문이다. 그 시절의 나는 정말 치열했고, 힘들게, 또 처절하게 살았다. 다시 그 고생을 하라고 하면 거침없이 중지를 펼치고 욕을 퍼부을 것이 분명하다.
돌아가고 싶지도 않으면서 과거가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래서 tvN <응답하라> 시리즈가 등장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고 싶지도 않기에 그저 과거가 응답만 해줬으면 하는 거다. 내가 살았든, 내가 살지 않았든, 지금이라는 현재에 살면서 아련하게 시간의 선에서 멀어져 간 과거가 응답만 해준다면 지금이 더 값질 것만 같아서 계속해서 “응답해 줘.”라고 소리쳤다. 그래서 신원호 감독은 <응답하라 1997>로 응답했고, <응답하라 1994>로 계속해 과거의 응답을 대신 전해줬다. 그리고 그 모든 응답을 해야 했던 이유를 담은 총집합체의 드라마가 2015년 방송된 <응답하라 1988>이었다.
드라마는 1988년, 서울 도봉수 쌍문동에 사는 고등학생 성덕선(이혜리 분)을 중심으로 풀어진다. 덕선이에게는 앙숙과도 같은 대학생 언니 성보라(류혜영 분)와 귀엽지만 확실하게 늙어 보이는 액면을 가진 동생 성노을(최성원 분)이 있다. 그리고 모든 시리즈와 동일하게 아버지는 성동일(성동일 분)이며, 어머니는 이일화(이일화 분)다.
친구들의 캐릭터도 다채롭다. 동네 졸부이자 집주인의 아들 김정환(류준열 분), 공부 잘하고 얼굴도 잘생긴 성선우(고경표 분), ‘도롱뇽’이라고 불리는 수다쟁이 류동룡(이동휘 분), 천재 바둑 기사 최택(박보검 분) 등이 성덕선의 주변을 채운다. 관전 포인트는 이들 중에 과연 성덕선의 남편이 될 사람이 누구인가다. 이 다양한 면면의 친구들이 성덕선과 엮이면서 미묘한 로맨스 기류를 만들어내기에 뭇 시청자들이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리고 누가 남편이 될까에 대한 내기를 걸어가면서 <응답하라 1988>에 집중했다.
그러나 나는 <응답하라 1988>의 재미가 성덕선의 로맨스가 아닌 전혀 다른 부분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작용한 건 1988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풍경이었다. 주택복권에 당첨돼 벼락부자가 된 김성균(김성균 분)과 라미란(라미란 분) 부부는 성동일, 이일화 부부가 세 들어 사는 반지하 방의 주인이다. 하지만 두 부부의 관계는 임대인과 임차인이 아닌 ‘동네 친구’에 가깝다.
이에 못지않게, 성선우의 어머니 김선영(김선영 분), 최택의 아버지 최무성(최무성 분), 류동룡의 아버지 류재명(유재명 분) 등 동네에 사는 인물들은 서로의 집에 있는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살갑다. 맞다. 이게 1988년, 우리네 삶이었다. 아파트가 들어서고,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지금과 달리 그 시대의 동네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의 집 사정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공동체에 가까웠다.
물론 먹고사는 게 힘든 건 지금과 다를 바 없었다. 하루하루 돈을 벌어 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고, 자식들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애썼다.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다 보면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지금의 삶보다 더 윤택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었다. 부모님들도 자신 같은 삶은 살지 않기를 바라면서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분명 부모님도 누군가의 자식이었기에 응석을 부리고 싶었겠지만, 부모님이라는 이유로 그 수고를 숨기고 강한 존재로서 자식들 앞에 서려고 했다. 이러한 풍경은 21세기의 지금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달랐던 건, 오지랖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의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알 정도로 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오지랖도 참 많이 부렸다. 치부를 감추려고 해도, 굳이 그걸 들춰내면서 ‘좋은 게 좋은 거다’ ‘우리가 도와줄게’라고 하면서 이끌어가던 게 <응답하라 1988> 속 1988년의 풍경이었다. 지금은 갑자기 옆집에 사는 사람이 튀어나와 내 숟가락이 몇 개인지 세려고 하면, 주거침입으로 신고를 해버리는 시대이기에 참 다른 풍경이다 싶다. 물론, 이 문장이 당장 과거가 무조건 옳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때는 평화를 상징하기 위해 올림픽 개막식에서 날려 보낸 비둘기가 성화에 통닭구이가 되어버린 때이기도 하지 않나.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지금의 풍경과 너무 다른 1988년의 응답에 귀를 기울였을까. 원래 추억이라는 건 기억에 의해 미화되기 마련이기도 하거니와, 그때가 자신들의 가장 젊은 시절이기도 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1988년의 풍경을 보면서, 많은 3040 이상의 시청자들이 과거를 회상했다. 그러면서 저 시대를 살았던 젊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지금처럼 팍팍한 삶을 살면서 낭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 정말 젊고 열정적이었던 자신의 모습을 각 등장인물들에 투영해서 바라봤다.
그리고 그 속에서 부모님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던 고민을 우리네 부모님들도 했음을, 그 시대를 함께 살면서 버텨냈던 부모님들의 수고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 부모님들도 버텨냈기에 나 역시도 지금을 버텨낼 수 있을 거라는 힘을 얻기도 했다.
나의 경우에는 <응답하라 1988>을 잃어버린 삶의 풍경에 대한 향수로 바라봤다. 그 시대를 살지도 않았지만 계속해서 향수라고 이야기하는 건, 내가 그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동경에 가깝기 때문이 터다. 실제로 내가 지금의 나이로 그 시대를 살라고 하면,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거다. 과거는 과거인 만큼 그 미화된 풍경으로써 남아있는 게 더 낫다 싶다.
물론, 지금 내게도 응답해줬으면 하는 시기가 있다. 너무 가깝지만 2011년, 스무 살의 나다. 드라마들을 훑어보면서 정말 나의 과거는 찬란했구나 싶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시대의 내가 꿈꿨던 지금의 나는 이러한 모습이 아니었다는 비루한 회한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 시대 내가 거대하게 바라봤던 부모님이라는 존재가 사실 나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고민을 품고 살았던 것이라는 위안을 받기도 했다.
그래, 회한과 위안. 이 비루하고도 지질하면서 찬란한 감정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내게 응답해줬으면 하는 거다. 지금 이렇게 사는 나는 너무 힘든데, 과거의 나는 어떻게 그걸 버텨왔는지, 과거의 부모님은 어떻게 살아왔는지 힌트를 얻고 싶은 거다. 이건 어쩌면 기억 속에서 너무 찬란하게 보정이 됐기에, 어쩌면 정말 찬란했을 과거에 대한 필연적인 미련이었다.
미련은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다. 현재가 정말 찬란하다면 미련을 가질 필요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미련에 너무 파묻혀서, 과거만 계속 들춰보려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내가 힘들게 버텨나가고 있는 지금도, 언젠가 미래의 내가 응답해줬으면 하는 찬란한 때일 수 있다는 걸 쉽게 간과한다. 계속해서 과거만 좋다고 돌아보면서 현재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고는 미래를 불확실성에 던져 버린다.
과거를 기억하는 건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미생>이 던져준 메시지처럼 기억하면서 나아가는 게 더 중요하다. 회기 하려고 하는 건 퇴보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어쨌든 찬란했던 과거는 그 찬란함의 소중함만 품으면 된다. <응답하라 1988>은 그래서 과거의 찬란함을 우리에게 응답해 주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모습도 함께 등장시킨다. 과거를 추억하면서도 현실 속에서 삶을 살아가고, 열심히 지금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역시 과거의 찬란함에 매몰되지 않도록 만든다.
따지고 보면 1988년의 성덕선을 소환한 건, 2015년의 성덕선이었다. 아마 이 글을 쓰고 있는 혹은 누군가 읽고 있는 시점의 성덕선은 1988년을 소환했던 2015년의 성덕선을 또 소환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성덕선은 응답하는 시대의 소리에만 집중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만들어갔다. 아름다웠던 과거를 살았던 성덕선이 또다시 찬란했던 2015년을 만들어갔듯이 우리도 지금의 아름다운 시간들에 집중해야 한다.
과거가 된 현재를 통해 미래를 만들어 간 성덕선이 우리의 앞에 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의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나. 과거에만 집착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 미래를 그저 불확실성에만 던져두지 말고, 지금이라도 이 ‘현재’의 사랑스러움에 빠져들면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미래의 내가 응답을 바랄, 지금의 나도 미화된 기억이 아닌 기꺼이 진짜 ‘행복’의 기억으로 응답해 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