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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Aug 26. 2023

창조와 파괴, <오펜하이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장 1절의 문구는, 무(無)에서 하나님이라는 유(有)의 존재가 천지라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물질세계를 창조했음을 알린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지점에서, 신이라는 어떠한 형용할 수 없는 존재가 등장해 또 다른 존재를 창조했다는 말이다. 철저히 다윈주의를 따르는 나의 입장에서는, 무의 세계 이전에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툭 튀어나왔는가를 늘 의심한다. 그러나 결국 지금의 우주론에서도 가장 정설로 일컬어지는 빅뱅이론에 따른다면 결국 모든 에너지가 어떠한 ‘한 지점’에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이 한 점의 에너지가 하나님이다’라고 말하는 자를 폄훼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현재로서 설명되지 않는 과학적 난제를 그저 종교적으로 해석하려고만 하는 것은 불확실한 명제를 오히려 더 큰 불확실성으로 던져버리는 행위라고 밖에 읽히지 않는다.


글의 시작을 창세기와 빅뱅이론으로 연 이유는 ‘창조’라는 것을 분명하게 논하기 위함이다. 창조는 물리적 법칙이 튀어나오고, 생명의 기원이 탄생한 어떠한 지점임이 분명하다. 우주라는 공간에서 이야기하자면, 창조란 끊임없이 팽창하는 과정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생명의 관점에서 보자면 창조 속에는 삶과 죽음이라는 명확한 시작과 끝이라는 개념 역시 포함되어 있다. 물론 이 창조라는 표현이 ‘어떠한 개체로 인해서 만들어진’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에, 정확히는 ‘생명의 시작’이라고 적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거창하게 창조론과 진화론을 끌고 들어온 이 글의 목적성은 영화 <오펜하이머>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풀어놓는 것이기에, 굳이 ‘창조’라는 표현의 적확함부터 따지고 시작한다면 오히려 목적을 잃어버리는 일일 것만 같다. 그래서 이 글에서만큼은 ‘창조’라는 단어를 단순히 ‘어떠한 것이 존재하게 된 것’으로만 국한 지어 표현하고자 한다.


다시, 창조로 돌아오자면 ‘빅뱅’을 우리는 거대한 폭발이라고 표현한다. 이 폭발이라는 단어는 어딘가 모르게 폭력적이면서 우아한데, 그 이유란 폭발로 인해 우주가 탄생하였다는 건 우아하지만 인류가 만들어낸 또 다른 폭발이라는 개념은, 화학적 반응을 통해 ‘무엇인가를 파괴한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1945년, 인류는 이 뜻을 내포한 그간 상상할 수 없었던 파괴력을 가진 폭발을 만들어냈다. 물리학자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만들어낸 원자폭탄을 통해서였다. 오펜하이머는 거대한 폭발을 촉발시킨 원자폭탄의 개발 이후 <바가바드 기타>를 인용하면서 그 유명한 말인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예술은 폭발이다


일본의 아방가르드 화가인 오카모토 타로가 남긴 “예술은 폭발이다”라는 말에서 나는 <오펜하이머>가 가진 예술성을 엿볼 수 있다고 본다.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결국 예술이라는 것은 모든 순간을 폭발하듯이 치열하게 살아가면서 나온다는 것인데, 이 말속에 예술의 본질은 결국 ‘폭발’의 지점에 있다는 뜻이 담겼다는 게 나의 해석이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이 강력한 폭발의 시점 이전과 이후에서 벌어진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의 삶을 조명한다. <인터스텔라>, <인셉션>, <테넷>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과학 이론 위에 쌓아 올린 탄탄한 상상력을 선보여 왔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한 인물의 삶을 다룬 전기 영화이다 보니 이전의 영화에서 보여 왔던 과학이론 기반의 상상력을 펼쳐 보이지는 못했지만, 놀란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오펜하이머의 삶의 기록을 기반으로 한 상상력을 선보이고자 했다.


영화의 쇼트를 조합하는 과정을 통해 기존쇼트가 가진 의미가 무엇이든, 앞 뒤 쇼트의 상관관계에 따라 새로운 의미나 감정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쿨레쇼프 실험 이전까지, 영화는 그저 기존 활자 서사의 법칙만을 따르는 매체였다. 하지만 쿨레쇼프와 푸도프킨, 그리고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에 의해 ‘몽타주’라는 새로운 문법이 탄생하면서 영화는 자체적인 서사 장치를 가지게 됐다. 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에이젠슈타인의 ‘변증법적 몽타주’의 핵심에는 ‘충돌 몽타주’가 존재했다. 시각적 이미지의 상호 충돌을 통해서 쇼트 하나가 가진 의미가 전혀 새로운 에너지를 얻어 전혀 다른 의미를 도출해 낼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몽타주 등장 이전에도 G.W 그리피스 감독으로 인해 교차편집의 기술이 영화만의 새로운 문법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같은 장소 또는 다른 장소에서 발생하고 있는 2개의 장면을 교대로 보여주는 이 편집 방식의 힘 역시, 상호 충돌에 기인하고 있다. 서로 다른 시간대와 공간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이 편집으로 인해 교차적으로 등장하면서 극의 긴장감을 극대화시키거나 평형적인 영화 서사 속에서 전혀 다른 의미가 도출되게 만드는 형식이다. 이러한 교차편집을 가장 영리하게 사용한 영화라고 한다면 나홍진 감독의 <곡성>을 예로 들 수 있다. 전혀 다른 사건일 수도 있는 것을 교차편집으로 한 영화에 구성되게 함으로써 마치 이 두 사건이 연결고리를 가진 것처럼 보이고, 그 헐렁한 연결고리 속에서 관객 스스로 의미를 도출해 내게 만드는 방식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대중과 평단에게 소위 ‘편집의 마술사’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가 이러한 편집 기법을 통해 가히 놀라운 ‘충돌 에너지’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충돌 에너지들은 놀라울만한 폭발력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는 <덩케르크>에서 1시간, 1일, 1주일이라는 시간 서사들을 한 지점에서 맞닥뜨리게 하면서 강렬한 웅장함을 선사했던 것에서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강렬한 ‘충돌 에너지’를 통해 거대한 폭발력을 선보인 것이 바로 영화 <오펜하이머>였다.



서사와 소재가 하나의 렌즈 속에서 만난다는 건.


<인셉션>에서 놀란 감독은 꿈이라는 시공간이 뒤틀린 추상적인 공간에서 물리학 법칙을 거스르는 다양한 시각적인 충격을 선보인 바 있다. 이후 그는 <인터스텔라>에서는 물리학 법칙을 기반으로 한 우주적 상상력을 펼쳐 보였고, <덩케르크>에서는 크로노스 시간을 영화적 시간으로 재구성한 자신만의 내러티브 구조에 대한 철학을 드러내보였다. 그리고 <덩케르크>의 내러티브 구조를 더욱 극단적으로 몰아붙인 영화가 아예 시간을 거꾸로 되감아버리는 <테넷>이었다.


여기서 흥미롭게 바라볼 지점은 <인셉션>, <인터스텔라>, <테넷>과 달리, <덩케르크>는 실제 역사적 사건을 영화로 그려낸 작품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극단적으로 서사적 구조성을 위한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없었고, 평행적 스토리를 기반으로 한 구조적 변화를 줘야 했다.


이에 <덩케르크>에서 놀란 감독은 아주 영리하게도 됭케르크 철수 작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세 덩어리의 주인공 집단을 등장시킨다. 토미(핀 화이트헤드)로 대표되는 육군과 도슨(마크 라이런스)이 중심이 되는 민간 선주 집단, 파리어(톰 하디)로 대표되는 공군이다. 이 세 개의 주인공들은 각각 영화에서 1주일, 1일, 1시간이라는 시간성을 가진 후, 교차편집을 통해 뒤엉키며 등장한다. 이러한 시간성의 혼돈은 영화적으로 전쟁의 혼란스러움을 표현하는 데에 큰 효과를 발휘했으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되어 이 각각의 시간들이 마주치는 시점에서는 각각 집단이 상징하는 희생정신, 영웅정신 등이 시간선의 충돌 에너지와 함께 강렬한 서사적 웅장함으로 버무려졌다.


하지만 한 인물의 인생을 다루는 전기 영화는 <덩케르크>와 같이 놀란 감독의 주특기인 서사의 구조적 충돌로 인한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요소가 다소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충돌과 폭발이란 결국 A와 B라는 개체가 맞부딪히며 생기는 에너지인 것인데, 과연 오펜하이머라는 A개체에 어떤 개체가 맞부딪혀야지 거대한 충돌 에너지가 발생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었다. 이에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라는 개체가 부딪힐 수 있도록 루이스 스트로스 제독(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이 개체들의 충돌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 원자폭탄을 촉매제로 끌고 들어온다.


자 이제, 폭발을 위한 모든 것이 마련됐다. 놀란 감독은 자신의 영화적 서사를 통한 폭발력 실험을 위해 오펜하이머라는 우라늄과 스트로스 제독이라는 중성자를 마련했다. 우라늄이 중성자를 흡수하면 두 개의 원자핵으로 쪼개지면서 2~3개의 중성자를 내놓핵분열을 일으킨다. 흥미롭게도 영화에서 등장하는 3개의 시간대(원자폭탄의 개발과정, 오펜하이머 청문회, 스트로스 청문회)는 꼭 3개의 중성자와 같다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 여기에 스트로스 청문회만 흑백으로 처리되었을 뿐이지, 컬러로 등장하는 2개의 시간대(원자폭탄의 개발과정, 오펜하이머 청문회)는 마치 두 개의 원자핵으로 쪼개진 오펜하이머의 삶이라는 인상을 심어준다.

 

하지만 여기까지 재료들을 마련했다고 하더라도, 원자폭탄만큼의 폭발력을 낼 수 있을까. 아니다. 원자폭탄의 어마어마한 폭발력은 원자핵분열의 연쇄작용에서 온다. 한 번의 핵분열에서 튀어나온 2~3개의 중성자는 또 다른 우라늄과 부딪히고, 그리고 또 부딪히고 부딪힌다. 이 과정에서 발생되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들의 결합이 결국에는 원자폭탄의 괴력으로 총합된다. 우라늄을 오펜하이머라는 개인으로 상정해 두자면, 그 속에서 계속해서 그에게 부딪히는 중성자들이란 오펜하이머의 전 연인 진 태틀록(플로렌스 퓨), 그의 부인 키티(에밀리 블런트), 수소폭탄으로 격렬히 대립하게 되는 에드워드 텔러(베니 사프디), 매카시즘의 광풍 등일 터다. 그리고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후 사망한 이들에 대한 죄책감 또한 그에게는 하나의 중성자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과연 이 모든 에너지를 모으는 폭축렌즈(폭발의 충격파를 굴절시켜 하나의 지점으로 에너지를 모으는 원자폭탄 기폭장치)는 무엇인가였다.



거대한 폭발의 양면성


연쇄작용을 위해서는 기폭장치가 필요했다. 영화에서는 그 거대한 기폭장치가 터지는 장면을 폭탄이 터지는 트리니티 실험의 순간이 아닌 오펜하이머 청문회의 순간으로 상정한다. 결국 이 영화의 모든 서사적 시간 충돌 지점과 인물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지점, 개인의 격렬한 내면의 폭발 지점으로 상정해 둔 것이 바로 오펜하이머 청문회의 클라이맥스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폭발의 양면성이 나타난다. 오펜하이머가 개발한 원자폭탄이 폭발하는 장면에서 관객은 아무런 소음도 없이 타오르는 거대한 화염의 영롱함을 목격한다. 영화의 원작이 되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제목처럼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에 의해 인간에게 전달된 ‘불’의 모습이 그것과 같았을까. 그 속에 휘말리면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거대한 폭발을 바라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그 뜨거움 만큼이나 강렬한 순수함이었다. 마치 태초의 우주가 한 점의 에너지에서 폭발한 것과 같은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오펜하이머 역시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 거대한 폭발이 발산하는 강한 빛을 바라본다.


하지만 오펜하이머가 청문회에서 내뿜은 에너지는 과연 그 에너지만큼이나 순수하고 경이로웠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원자폭탄 폭발 시퀀스가 모든 소리가 사라진 고요함으로 표현된 것과 달리, 청문회에서 자신이 그간 지니고 있던 생각을 털어내며 강렬한 빛과 소리를 발한다. 그리고 그 소리란, 수많은 이해관계가 중첩된 발소리의 쿵쾅거림과 루드비히 고란손이 만든 소름 끼치는 소음과 같은 OST가 중첩되는 소리다. 여기서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강렬한 순수함이 아닌 너덜너덜해진 한 인간의 내면이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라고 말한 인물 스스로가 파괴되어 버린 지점이기도 했다.


그리고 흥미로운 지점은 이 소음 없는 실물 폭탄의 폭발과 시끄러운 소음을 동반한 인물 내면의 폭발이라는 복합적인 시청각 이미지의 충돌이 놀란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해 더없이 거대하면서도 강렬한 충돌 에너지의 서사를 발산했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창조와 파괴라는 아이러니’였다.



창조와 파괴라는 아이러니


시대의 아나키스트라고 불렸던 미하일 바쿠닌은 “파괴를 향한 열정은 창조의 열정”이라는 말을 남겼다. 누군가는 그의 말이 한 아나키스트의 치기 어린 궤변이라고 해도, 그 안에 내포된 뜻은 인간이 가진 창조에 대한 열정이 결국 파괴의 열정과 다르지 않다는 것에서 나에게는 꽤 의미가 크다. 대폭발을 통해 기존의 에너지 결정을 깨고 우주가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빅뱅 이론처럼, 창조는 어쨌든 파괴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삶과 죽음처럼, 결국 죽음이 있기에 삶이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영화도 그 아이러니 안에서 예술적으로 성장했다. 몽타주와 교차편집을 통해 기존 서사 방식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서사적 장치를 마련했고, 관객들에게 늘 끊임없는 서사들의 충돌을 선보이면서 늘 새로운 감각의 경험을 선사한다. <오펜하이머>는 이런 충돌을 여러 장면에서 꾸준히 만들어낸다. 캐릭터들 간의 충돌, 인물 내면 간의 충돌, 시각과 청각 이미지의 충돌, 원자폭탄의 폭발 장면과 오펜하이머의 청문회 클라이맥스 장면의 충돌 등이 제각각의 폭발력으로 응축된다. 그리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영화의 타이틀이 화면을 가득 채울 때, 관객들은 제각각의 폭축렌즈가 합치되는 지점에서 제각각의 연쇄적인 분열 작용으로 인한 거대한 폭발력을 느낀다.


그리고 이 거대한 폭발과 함께 관객들은 자신의 기억 속에 제각각 다른 형상으로 <오펜하이머>를 각인시킨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이 놀란 감독에 의해 창조된 <오펜하이머>는 그렇게 관객마다 수많은 이미지의 충돌 속에서 파괴의 연쇄 작용을 거쳐 각자만의 <오펜하이머>로 창조된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 속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어떻게 되었을까. 원자폭탄을 창조하고 그는 파괴되었을까. 아니, 영화는 원자폭탄이 창조되었을 때부터 아닌 이미 태어났을 때부터 파괴되고 있던 것이라고 얘기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스스로 모든 순간마다 관계의 창조와 파괴를, 내면의 창조와 파괴를, 인생의 창조와 파괴를 늘 겪고 있었음을.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영화의 의미나 삶의 의미는 언제나 관객 제각각 해석의 몫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영화가 가진 가장 창조적인 파괴성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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