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 번째 사수님 이야기
우리 쪽 일은 TV광고가 사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콘텐츠가 사수고
드라마 대사 한 줄이 사수고
매번 하는 아이디어 팀 회의가 사수고
그 아이디어 파일들이 사수고
다양한 경험들이 사수야.
-나의 '사람' 사수님이 해주신 말씀-
내 카피라이터 인생에 두 번째 사수님이자, CD님(Creative Director)이며 '될 놈'인 그분을 만난 건 2013년 햇수로 벌써 10년 째다. 생각해보니 나와 사수님은 10살 차이인데, 10년이 지났으니 내가 고스란히 그 당시 사수님의 나이가 된 것. 시간 참 빠르다.
사수님과의 첫 만남은 이랬다. 팀 이동이 되어 긴장하고 한껏 쫄아서 새로운 팀에 갔는데 의자에 거의 160도 정도로 누워서(?) '안녕?'하며 인사하던 모습. 그러니 첫인상은 당연히 '뭐지!?'였다. 게다가 안쪽의 상석 자리를 비워두고 다 오픈된 바깥쪽 자리, 일명 누가 봐도 막내의 자리에 앉아 아니, 누워 계셨다.(^^;)
내가 바깥 자리에 앉겠다고 하자 상관없다며 '귀찮으니까 그냥 거기 앉아~'하고 안쪽 자리를 내줬다. 귀찮다고는 하셨지만, 비어 있기만 하면 조금이라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바꾸려는 사람들과 참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는 나에 대해 궁금했는지 이것저것 물었다.
"너 몇 살이니?"
"몇 년 차니?"
나는 빠른 생일인 데다가 대학교 4학년에 취업을 해서 상대적으로 또래보다 경력이 빨랐는데 내 대답을 들은 사수님은 뭔가 분석하듯 가만히 생각하더니 정말 편견 하나 없는 말투로 말씀하셨다.
"아~ 너 고졸이니? 오~ 취업을 빨리 잘했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또 생각했다. '뭐지!?'
그리고 회식을 했는데 술기운 때문인지 사수님이 순간 휘청하며 넘어질 뻔해서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엇! 괜찮으세요??"
얼른 자세를 고쳐 잡은 사수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짱한 척하며 말했다.
"야 나 되게 괜찮은 사람이야~"
나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뭐지!?' 좀 이상한듯하지만 재밌는 것 같고 말짱해 보이는데 뭔가 빈구석이 있는, 그래서 좀 편하게 느껴지는 분. 이것이 사수님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이었다.
광고회사 제작팀은 출퇴근 시간이 딱 정해져 있다기보다는 팀마다 알아서 팀 스케줄에 맞게 출근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밤을 많이 새우기도 하고 야근을 많이 하는 불규칙한 패턴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대략적인 팀의 출퇴근 시간대를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이 팀은 출근을 몇 시쯤 하냐고 묻자 사수님이 답했다.
"뭐, 그냥 나보다 좀 일찍 나오고 나랑 같이 퇴근해~"
그래, 그럼 사수님보다는 무조건 일찍 나와야겠다! 생각하며 아침 일찍 며칠 나갔는데 엄청난 반전이 있었다. 알고 보니 사수님은 팀장님보다 늦게 오는 분이었던 것. 팀장님도 포기한 지각쟁이랄까? 그래서 정말이지, 사수님보다 일찍 오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다. 하하
그리고 일찍 퇴근할 때는 항상 같이 나가자고 해서 좋았다. 일이 없는데 쓸데없이 눈치 보며 남아있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때부터 알아봤다. 그리고 내 마음대로 순위를 정했다. '꼰대 같지 않은 선배 1위'. 몇 달 뒤, 나는 일기에 적었다.
사수님의 카피라이터 시절 이야기를 좀 해보자면, 예전에 사수님이 카피 특강을 했다던 내용을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역시나 나의 사수님은 강의도 꼰대 같지 않게 남다르게 했더랬다.
그 당시 대부분의 카피라이터 선배들이 "엣헴 엣헴, 카피란 말이야~" 하는 이론적인 강의를 할 때 사수님은 '베스트 댓글(일명 베댓)' 같이 살아있는 글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본인도 예전에 베댓을 많이 만들어봤다며 뉴스 기사든 어떤 사이트의 게시글이든 거기에 맞게 댓글을 달고 다음 주까지 베댓을 만들어오라고 과제를 내주셨단다. 요즘으로 치자면 SNS나 유튜브 영상 같은 곳에 댓글을 쓰고 '좋아요' 많이 받아오기 같은 것이겠지. 그래서 그런지 사수님의 카피는 대체로 문어체 느낌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혹은 우리 주변에서 많이 듣는 구어체 느낌이 든다. 쉽게 말해 '살아있는 요즘 말들'이다.
실제로 사수님은 카피라이터인데도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몰래 읽는 것이 아니라면 정말로 책 읽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자료조사 때문에 어쩌다 책을 읽는 모습을 보긴 봤는데 그마저도 책과 함께 자는 모습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신문 기사 및 다른 여러 사이트의 재밌고 흥미로운 글들이나 유튜브 댓글, 어디서 지나가다가 본 구절이나 영화 대사 등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엄청 많았고 심지어 다 외우고 있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그 당시의 나는 카피라이터라면 무릇 책을 가까이하고 많이 읽어야만 카피를 잘 쓰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기 스타일대로 영감을 얻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방식대로 즐기면서 인풋을 얻으면 더 좋은 아웃풋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그렇게 사수님과 함께 대한항공부터 배달의 민족, 쏘카, 뱅크샐러드, 카카오페이 등 다양한 광고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사이 사수님은 카피라이터에서 어느덧 팀장님이 되어 스타트업 전문 CD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나는 회사 생활을 할 때 관계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해보곤 한다. '우리가 만약 친구라면'이라는 생각. 회사에는 동갑부터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선후배 동료들이 다 모여있는데 우리가 만약 같은 학교에 같은 학년으로 모여있는 친구라면... 나는 이 친구와 친해지고 싶은가? 한마디로 '나는 성별 떼고 직급 떼고 이 사람과 친해지고 싶은가?' 라는 것. 이 질문에 사수님을 대입한다면 내 대답은 '그렇지'를 넘어 '당연하지!!'이다.
사수님을 학교 친구로 비유하자면 뭐랄까. 좀 모자란 듯하면서 천재 같은 구석이 있는, 허점도 많은데 잘하는 것도 꽤 많은 희한한 유형의 친구 같다. 만날 책상에 엎드려 자는데 공부 잘하는 그런 이상한 친구 같다고나 할까? 실제로 회사에서도 엄청 자면서 카피는 잘 써오는 그런 분(?)이었다. 사수님이 하도 잠을 잘 자서 나를 포함한 후배들이 어디 한 번 잘 때마다 자는 모습을 모아보자며 사진을 찍어봤는데 연말에 사진전을 해도 될 정도였다. 그래서 사수님이 잘 때 다양한 짓을 참 많이 하고 놀았는데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그날도 사수님은 여전히 의자에서 곤히 주무시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나와 내 친한 카피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래서 자고 있는 사수님의 의자를 휠체어처럼 창가로 끌고 가서 담요를 덮어주며 말을 걸었다.
"날이 참 좋아요. 가끔은 이렇게 창 밖 풍경도 보고 해요..."
우리끼리 낄낄거리며 마지막 잎새를 연기하는 동안에도 사수님은 여전히 곤히 잠들어있었다.^^;
이렇게 격 없이, 스스럼없이 놀아서 그런가. 이제 나에게 사수님은 나이를 떠나서 '인생 친구'같은 존재다. 또한 광고 생활의 힘듬을 견딜 수 있게 해 준 것도 8할이 사수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일을 하면서 기쁨의 순간도(가끔?) 있었지만 힘 빠지는 순간들도 참 많았다. 누가 내가 이렇게까지 한다고 알아주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생각만큼 결과가 안 나왔을 땐 헛고생을 한 것 같아 일하는 의미를 잃기도 했다. 그럴 땐 마인드 컨트롤이 정말 중요한데 그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도록 해 준 사수님의 이야기가 있다. 바로 '내가 알잖아' 정신. 자존감을 높여주며 나를 위로해준 사수님의 그 이야기로 마무리를 하고 싶다.
남들이 몰라도 상관없어. 내가 알잖아.
내 스스로가 아는 거. 그게 제일 중요해.
누가 이렇게까지 한다고 알아주나?
신경 쓸 필요 없지. 내가 아니까.
이번엔 그냥 대충 넘어갈까?
아니, 내가 알잖아. 그럼 못넘어가.
열심히 해도 티 안 날 수 있고
결과가 잘 안 나올 수도 있는데
내가 알잖아. 내가 잘 해봤다는 거.
그게 내 안에 계속 쌓이는 거고.
그러다보면 잘 될거라는거, 내가 알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