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어야 할 자리
퇴근 후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계획을 세우고 루틴이 잘 작동하자, 마치 나의 하루는 속이 꽉 찬 알곡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듯했다. 하루의 끝을 뿌듯함으로 마무리했고, 삶의 애착도 더욱 강해졌다. 이제는 무슨 일이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생겨났다.
가을 단풍이 한창인 무렵 단풍 구경을 위해 모처럼 휴가를 내고 아내와 드라이브를 하던 중이었다. 아내는 노란색 단풍으로 가득한 거리의 풍경을 보고 ‘정말 예쁘다’라고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다. 가을 색 물씬 풍기는 고즈넉한 거리의 풍경도 좋았지만, 아내가 좋아하니 나도 덩달아 더 좋았다. 드라이브하는 동안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최근 내가 느끼는 감정을 이야기했다.
“자기야, 나 요즘 정말 행복해. 퇴근길이 즐겁고, 사는 재미가 느껴져.”
단풍 구경에 기분이 좋아진 아내의 격려와 응원을 기대하며,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지, 그리고 내 삶이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아내에게 설명했다. 그런데 아내는 내 이야기를 한참 듣고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나는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아내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아내의 표정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조금 전까지 환한 웃음을 보이며 단풍을 감상하던 아내의 낯빛이 어둡게 변하자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기야,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왜 아무 말이 없어?”아내는 내 물음에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기는 하고 싶은 일 다 하며 좋을지 몰라도, 나는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집안일이며 애 돌보는 일까지 나는 너무 힘들어.”
나는 그때야 비로소 아내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퇴근 후 시간을 쪼개 쓰며 대학원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글도 쓰며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내는 그 시간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내색하지 않고 참아왔던 것이었다. 나는 열심히 사는 것이 가족을 위한 것이라 여겼지만, 그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작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없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일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지만, 가정에서의 역할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나는 잠시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내 삶에 있어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내가 속해 있던 곳에서 나를 하나씩 지워보았다. 직장과 내가 속해 있거나 관계하고 있는 각종 모임에서 나를 하나씩 지워나갔다.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라 여겨왔지만, 내가 없어도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직장에서 내가 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열심히 일했지만, 얼마든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각종 모임과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딱 한 가지만은 나를 대신할 수 없었다. 바로 우리 가족이었다. 가족에서만큼은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 남편으로서, 부모로서 그리고 자식으로서 그 누가 나를 대신할 수 있겠는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 후 나의 저녁 시간에는 변화가 생겼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에는 가족에게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 시간만큼은 개인적인 활동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애써 만들어 놓은 루틴을 다시 바꿔야 했기에 마음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의 욕심 때문에 내가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는 실수를 다시는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대학원 수업처럼 반드시 빠질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퇴근하면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퇴근 후 일찍 집에 들어간다고 해서 다가 아니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의 질을 높이지 않으면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아이와 함께 있을 땐 거의 5분도 채 집중하지 못했다. 아이는 자신과 제대로 놀아주지 않는 나의 태도에 불만스러워 자주 울음을 터트리곤 했다. 이제는 아이에게 친구 같은 아빠가 되고 싶었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놀이나 게임을 같이하기 시작했다. 어린이 TV 방송도 같이 보며 아이가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들도 하나하나 알아갔다. 이렇게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놀다 보니, 둘만의 공통 관심사가 만들어졌고, 대화도 전보다 부쩍 늘었다. 이제는 아이에게 게임을 같이 하자고 조르는 아빠가 되었다.
아내에게는 가사 일을 적극적으로 하는 남편, 아내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남편이 되기로 했다. 한때 아내가 무슨 말을 해도 잘 귀에 잘 들어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특히 무슨 일을 시켰는데 아예 잊어버리거나, 무슨 말을 했는지 가물가물할 때가 많았다. 생각해보니 내가 아내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질 않고 있었다. 그런 나의 태도 때문인지 아내도 언젠가부터 속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하루 10분 만이라도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아내가 하는 말에 토를 달지 않고, 맞장구를 쳐주는 등 적극적으로 듣기로 시작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그렇지만 평소에 말이 별로 없던 아내가 전보다 말이 많아진 것은 확실하다.
평일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고작 많아야 1~2시간 정도이다. 또 각자 저마다 개인 시간을 보내는 것까지 고려하면, 서로 대화나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은 더욱 짧아진다. 나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 때문에 내가 세웠던 퇴근 후 계획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차츰 시간이 지나자 가족과 보내는 시간도 루틴으로 형성되었고, 시간의 공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이용해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도 할 수 있게 됐다. 마침내 퇴근 후 루틴이 만들어진 것이다.
내가 열심히 산다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나의 발전이 가족을 위한 것이라는 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혼자만 열심히 하고, 가족이 느끼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가족에게도 최선을 다하고, 함께하는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 갈 때 가족이 진심으로 당신을 응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