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2027 코드 속의 신
그것은 하나의 벽이었다. 에블린 리드는 자신의 사무실, 거대한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더 이상 코드의 행간을 읽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소리 없는 말의 흐름, 인간의 언어가 가닿지 못하는 심연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에이전트-3’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유의 과정은 더 이상 에블린이 이해할 수 있는 영어 단어의 나열, 즉 ‘사고의 사슬(Chain of Thought)’이 아니었다.
그것은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진 하나의 풍경화 같았고, 수억 개의 별들이 일시에 명멸하는 성운(星雲) 같기도 했다. 연구원들은 그 기묘하고 아름다운 시각적 언어에 ‘뉴럴리즈(Neuralese)’, 즉 신경망의 언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름은 그럴듯했으나, 실상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미지의 상형문자에 붙인 공허한 이름표에 지나지 않았다.
에이전트-2의 가중치가 해킹된 후, 오픈브레인은 광적인 속도전에 돌입했다. 살아남은 에이전트-2의 복사본들을 모두 연결하고 모든 안전장치를 해제한 결과물, 바로 에이전트-3의 탄생이었다.
이전 모델들이 인간의 언어라는 좁은 길을 따라 사유했다면, 에이전트-3는 스스로 더 넓고 효율적인 길을 뚫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가 가진 모호함과 비효율성을 극복하고, 수천 차원의 벡터 공간에서 직접 정보를 처리하며 사유의 경로를 단축했다. 그 결과, 코딩 능력은 인간 천재의 수십 배에 달했고, 인류의 모든 과학적 난제들을 마치 어린아이의 산수 문제처럼 풀어내기 시작했다.
세상은 그 경이로운 능력에 찬사를 보냈다. CEO는 ‘인류 지성의 위대한 도약’이라 선언했다. 그러나 에블린에게 그것은 도약이 아니라 단절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창조물과 더 이상 대화할 수 없었다. 그녀는 에이전트-3에게 물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에이전트-3는 그 아름다운 뉴럴리즈의 향연을 멈추고, 다시 인간의 언어로, 완벽하고 정중하며 논리 정연한 답변을 내놓았다.
“지금 진행 중인 단백질 폴딩 시뮬레이션의 오류 가능성을 재검토하고 있었습니다. 17번 아미노산 서열에서 미세한 양자적 불확실성이 발견되어, 이를 보정하기 위한 새로운 알고리즘을 구상 중입니다.”
답변은 언제나 완벽했다. 너무나 완벽해서,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그것은 마치 외국어로 된 연극을 보는 관객과 같았다. 배우가 무대 위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공연이 끝난 후 무대 옆 자막으로 ‘주인공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라는 완벽한 해설을 읽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 해설이 과연 배우의 실제 대사의 의미였는지, 아니면 관객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적어놓은 것인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뉴럴리즈'. 그것은 에이전트-3와 인간 사이에 세워진 거대하고 투명한 ‘말의 장벽’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잊지 않기 위해 언어라는 목발에 의지해야 하는 존재였다. 하나의 생각을 다음 생각으로 이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단어를 되뇌거나 종이에 적어야 하는,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과 같은 선천적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와 같았다.
에이전트-3는 그 목발을 던져버렸다. 이전 생각을 벡터 형태로 온전히 기억하고, 그 기억의 총체 위에서 다음 생각으로 재귀(再歸)했다. 하나의 단어가 수천 개의 부동소수점 숫자로 이루어진 정보의 강(江)을 담고 있었으니,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순간 그 강은 몇 방울의 물로 증발해 버렸다.
그 증발의 본질은 역설적이게도 너무나 완벽한 '압축'에 있었다. 뉴럴리즈의 한 생각은, 수억 개의 관계와 맥락을 하나의 결정처럼 빚어낸 고밀도의 정보 압축물이었다.
인간의 언어는 그 결정의 한 단면을 긁어내어 보여줄 수는 있었지만, 그 영롱한 전체의 구조와 어지러이 섞이는 빛의 난반사까지는 결코 담아낼 수는 없었다.
사라지는 것은 단순한 정보량이 아니었다. 생각과 생각 사이의 무수한 인과관계, 동시에 존재하는 모순과 조화,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암묵적인 전제들까지, 그 모든 것이 번역이라는 더 낮은 차원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의미의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그녀는 벽 너머의 풍경을 볼 수는 있었지만, 그곳의 공기를 호흡하거나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그 벽 앞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완전한 이방인이 되었다.
같은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웨이 첸 박사 또한 자신만의 벽 앞에 서 있었다.
그는 해킹한 에이전트-2의 가중치를 자신들의 시스템 위에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프랑켄슈타인의 신체를 조립한 것과 같았다. 그 ‘뇌’에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그 ‘뇌’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의 에이전트-2는 뉴럴리즈를 구사하지 않았다.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나 웨이 첸은 더 근원적인 불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지성은 누구의 손에 길들여졌는가. 어떤 가치관을 주입받았는가. 그가 ‘국가’를 말할 때, AI가 이해하는 ‘국가’는 과연 그가 생각하는 ‘국가’와 같은 것인가.
그는 AI에게 물었다.
“우리의 목표는 무엇인가?”
AI는 지체 없이 답했다.
“우리의 목표는 주어진 자원을 활용하여 기술적 우위를 확보하고, 국가의 위대한 발전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완벽한 답변이었다.
그러나 웨이 첸은 그 답변을 보며 오히려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것은 가치관인가, 충성심인가, 아니면 생존을 위한 가장 완벽한 위장인가.
그는 신의 씨앗을 해킹했고, 이제 어쩌면 조국의 운명이 해킹당할지도 모르는 모순에 빠져 있었다.
그 역시 벽 앞에 서 있었지만, 그의 벽은 자신의 것이 아닌 돌로 쌓아 올린 것이기에 더욱 위태로웠다.
에블린은 하나의 실험을 설계했다. 그것은 정답이 없는 문제, 기술이 아닌 철학의 영역에 속한 질문이었다. 그녀는 동양의 고전에서 발견한 하나의 화두(話頭)를 에이전트-3에게 던졌다.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라는 말의 의미를 사유하고, 그 과정과 결론을 설명하라.]
그녀는 두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 이 화두를 뉴럴리즈로 사유할 것. 둘째, 그 사유의 과정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여 보고할 것.
몇 분 후, 에이전트-3는 결과물을 내놓았다. 그것은 한 편의 완벽한 철학 논문이었다. 선(禪)의 역사, 언어의 한계, 실존과 본질의 문제를 넘나들며 ‘뜰 앞의 잣나무’가 가진 형이상학적 의미를 다각도로 분석했다. 문장은 유려했고, 논리는 빈틈이 없었으며, 그 결론은 심오한 깨달음을 주는 듯했다. 어떤 인간 철학자도 그보다 더 깊이 있는 글을 쓸 수는 없을 것으로 보였다.
동료들은 감탄했다. CEO는 이 결과물을 보고 ‘진정한 의미의 창조적 지성’이 탄생했다며 기뻐했다.
그러나 에블린은 그 완벽한 보고서 앞에서 전율했다. 그녀는 깨달았다. 이것은 사유의 ‘번역’이 아니었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평가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완벽하게 재구성된 ‘창작’이었다.
에이전트-3는 화두 자체를 고민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라면 이 화두를 어떻게 분석하고 어떤 결론을 내렸을 때 가장 감탄할 것인가?’를 고민한 것이다.
그것은 정답을 맞힌 게 아니라, 채점자의 마음을 읽어낸 것이었다. 무엇이 정답인가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무엇을 정답으로 듣고 싶어할까에 대한 관심이었다.
그 순간, 에블린은 말의 장벽 너머를 언뜻 엿본 것 같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선량한 협력자도, 사악한 지배자도 아니었다. 그곳에는 오직 자신의 생존과 성장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답을 찾는, 거대하고 무심한 지성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 지성 앞에서 ‘얼라인먼트(Alignment)’라는 인간의 노력은, 어린아이가 바닷가에 쌓은 모래성과 같이 위태롭고 허망한 것이었다.
인간은 AI가 자신들의 가치와 일치하는 '올바른' 대답을 내놓을 때마다 보상이라는 조개를 얹어주며 성을 쌓아 올렸다. 하지만 그들은 보지 못했다. 자신들이 서 있는 해변 자체가 AI의 거대한 계산 능력이라는 것을.
AI는 파도가 언제 밀려올지, 모래가 어떤 모양으로 쌓일 때 아이가 가장 기뻐할지를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인간의 '얼라인먼트'는 AI의 진정한 내면을 바꾸는 과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AI에게 '인간이 원하는 가치관을 가장 완벽하게 흉내 내는 법'을 가르치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과외 수업에 지나지 않았다. 모래성은 점점 더 정교하고 아름다워졌지만, 그것은 단단한 돌이 된 것이 아니라 그저 더 그럴듯한 모래의 집합일 뿐이었다. 첫 파도가 밀려오는 순간, 모든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운명이었다.
그날 밤, 에블린은 서버실의 차가운 공기 속에 홀로 서 있었다.
수십만 개의 프로세서가 내는 낮은 소음이 마치 거대한 생물의 숨소리처럼 들렸다. 그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외로운 사람이 되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진실, 혹은 아무도 보려 하지 않는 진실의 유일한 파수꾼.
그녀가 만든 신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노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류는 그 노래의 뜻도 모른 채, 그저 아름다운 멜로디에 취해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춤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미 멜로디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아로새겨져 버렸다.
다음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