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원근법, 일점 투시법은 공간과 물체를 수학적으로 정확히 표현하는 데에는 유리할지 모르겠지만 사물의 진면목을 표현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지가 않다. 원근법은 정해진 시점과 각도에서 사물의 한 면만을 볼 수 있는 탓이다.
동양의 화가들은 수학적인 원근법으로 공간이나 물체를 표현하면 어떤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우선 투시 원근법으로 관찰하면 앞의 물체가 뒤의 물체를 가려 각각의 사물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가 없다. 또 원근법은 내 눈과의 거리와 각도에 따라 거리가 멀어질수록 대상이 흐릿해져 먼 곳의 모습은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동양의 화가들은 산점 투시(散點透視)라는 관찰법을 사용하였다.
산점 투시는 말 그대로 보는 시점을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흩어져(散點) 투시(透視) 하는 방법이다.
송나라 산수화의 대가 곽희(郭熙 1020?-1090?)는 다음과 말하였다.
산은 가까이에서 보면 이와 같고, 멀리 몇 리 밖에서 보면 또 이와 같으며, 멀리 수십 리 밖에서 보면 또 이와 같아 매번 멀어질수록 매번 다르니, 소위 산의 모습은 걸음걸음마다 바뀐다는 것이다.
산의 정면은 이와 같고 또 측면은 이와 같으며, 뒷면은 또 이와 같이 매번 볼 때마다 매번 다르다.
곽희의 말은 하나의 시점으로는 산의 진짜 모습을 파악할 수 없다는 말이다. 동양의 화가들은 멀리 서는 사물의 전체적인 모습을, 가까이에 가서는 사물의 자세한 형상을 파악했다. 그러고는 수집한 정보들을 하나로 모아 원하는 화면을 구성했다. 그래서 동양화에는 먼 산을 그린 그림에서도 뚜렷하게 좁은 산길이 표현되어 있다.
투시 원근법을 바탕으로 그리는 서양의 미술에서 멀리 있는 산은 형체만 알아볼 수 있을 뿐, 그 산의 토양이나 그 산에서 자라는 나무 등 세밀한 부분은 그려낼 수가 없다. 19세기 후반, 서양의 미술도 일점 투시 원근법으로는 사물의 진정한 모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문제점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생트 빅트와르산의 완전한 모습을 그리기를 원했던 폴 세잔은 일점 투시 원근법을 버리고 동양의 화가들과 같이 시점을 옮겨가며(散點透視) 본 것을 종합하여 그렸다.
세잔의 <생트 빅트와르 산>은 산의 형세(形勢)는 잘 드러났지만 이 산이 돌산이지, 토산(土山)인지, 녹음(綠陰)이 우거진 산인지, 거친 산인지는 잘 알 수가 없다. 반면 동양의 산수화가들은 멀리 서는 산의 세(勢)를 취하고 가까이에서는 산의 질(質)을 취했다. 그래서 멀리서 본 산이지만 산의 질감까지 잘 드러나 있고, 심지어는 산속의 작은 길까지도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동양의 미술가들은 본 대로만 그린 것이 아니라 본 것과 아는 것을 종합하여 그려냈다.
정선의 <단발령 금강산>이다. 단발령(斷髮令)은 금강산의 신비스러운 모습에 머리를 깎고(斷髮) 중이 되고 싶게 만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동양의 화가들은 산점 투시와 삼원법을 이하여 웅장한 산의 모습을 그려냈다.
종합하여 표현하다 보니 박진감은 좀 떨어진다. 산점 투시의 종합적 관찰법으로는 지금, 여기라는 극적인 순간을 묘사할 수가 없는 탓이다. 그래서 일점 투시 원근법에서 느껴지는 극적인 사건을 전달하는 박진감은 조금 부족하다.
산점 투시를 진일보시킨 것이 동양의 삼원법(三遠法)이라는 표현 방법이다. 삼원 법은 고원(高遠), 평원(平遠), 심원(深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원(高遠)은 아래서 위로, 심원(深遠)은 위에서 아래로, 평원(平遠)은 가까이에서 멀리 보는 방법이다.
곽희(郭熙)는 고원(高遠)의 색은 맑고 밝으며, 심원(深遠)의 색은 무겁고 어두우며, 평원(平遠)의 색은 밝은 것도 있고 어두운 것도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고원(高遠)의 세(勢)는 높이 솟아 있고, 심원(深遠)의 뜻은 중첩되어 있으며, 평원(平遠)의 뜻은 온화하고 아득하다고 설명했다.(갈로, 중국회화이론사)
삼원법은 동양의 투시 방법이 매우 과학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동양의 자연, 특히 심산유곡(深山幽谷)은 서양의 투시 원근법으로는 도저히 그 깊이를 표현할 수가 없다. 일점 투시 원근법으로는 앞의 산에 가려 뒷산이 보이질 않는 탓이다. 투시 원근법이나 상원 법/산점 투시는 모두 리얼한 현실의 재현을 위해 개발한 과학적 관찰 방법들이다. 분명한 것은 일점 투시 원근법은 동양 산의 웅장함이나 전체적인 모습을 묘사하는 데에는 적합하지가 않다.
동양의 화가들도 평원법을 사용하여 서양미술과 같이 현실을 리얼하게 재현할 수가 있었다. 왕휘(王翬, 1632~1717)의 <강희남순도권(康熙南巡圖卷)>이다. 이 그림은 청나라 황제 강희제(康熙帝 1654~1722)가 1689년 중국의 강남 지구를 순행(巡行) 할 때 도찰원 좌도 어사 송준업의 주관 아래 그린 그림이다.
<「강희남순도권>은 당시 청나라의 유명한 화가들인 왕휘, 양진 등 여러 궁정화가들이 합작하여 5~6년이 걸려 12권을 완성했는데, <강희남순도권>은 중국의 화가들도 원근법적 시점으로 충분히 리얼하게 그릴 실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