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눕혀 놓고 운전면허 필기 공부도 하고 집안일도 하고 그랬어.
—새벽에 그렇게 자주 깨지 않아서 한 번 수유하고 나면 푹 잤지. 참 키우기 쉬웠어.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순한 아이였다고 말씀하시곤 한다. 나는 오랫동안 엄마가 쓰는 ‘순한 아이’라는 표현을 ‘손이 많이 안 가는 아이’라는 뜻이라고 내 멋대로 해석하곤 했다. 정말 손이 안 갔다기 보단 그냥 먹을 때 잘 먹고 잘 때 잘 자는 정도의 평범한 아이였을 것이다. 세상에 손이 안 가는 아이란 없을 테니까.
나는 순하기만 한 게 아니라 여리기도 한 아이였다. 나와 동생에게도 여느 자매들과 다름없이 툭하면 삐치고 토라지고 싸우기를 밥 먹듯이 하는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나는 번번이 동생에게 지곤 했다. 동생이 아주 어릴 때는 “엄마가 없으면 언니가 엄마야”라는 엄마의 규칙대로 의젓한 언니인 척 내가 동생을 이끌고 말 안 들으면 혼내기도 했지만, 동생이 조금 크고 나서 그런 위계질서에 거부감을 갖기 시작하자(“언니가 왜 엄마야?”) 더 이상 그 규칙은 통하지 않았다. 싸우면 어쩐지 늘 내가 먼저 울고 있었다.
우리 자매가 화해하는 과정은 대부분, 서운함이 복받친 내가 “나한테 왜 그래”라고 소리치고 엉엉 우는 모습으로 시작해 “언니는 너 사랑하는데”라며 동생의 마음을 풀어주는 장면으로 끝난다. 내가 기억하는 한 단 한 번도 동생이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거나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 적은 없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녀는 먼저 우는 놈이 진다는 엄청난 사실을 알았던 게 분명하다. 물론 이건 나의 기억일 뿐이다. 양쪽 말은 모두 들어봐야 한다.
동생뿐만 아니라 나는 누구에게도 잘 졌다. 자존심을 부리는 것보다 굽히는 편을 택했다. 이기려고 악 쓰는 것보다 져주는 게 쉬웠다. 승부욕도 어른이 되어서나 조금 있는 척 연기하는 것뿐이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것도 승부욕이 있는 사람이 매사에 열심히 하는 모습이 언제부턴가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지 딱히 다른 이유는 없다.
부끄러움은 또 얼마나 타는지. 유치원 때 앨범을 보면 각종 학예회나 발표회 때 찍은 사진 속의 나는 하나같이 찌푸린 표정을 짓고 있다. 무대 위에서 단 일초도 머물기 싫다는 듯이. 조금 더 커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자리에서 일어나 교과서의 한 부분을 읽는 일조차 심장이 견뎌내지 못해 염소 목소리를 내며, 발표처럼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시간이 유난히 힘들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한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이 네 명이 넘어가면 대화에 끼지 않고 리스너를 자청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뿐일까. 정당한 요구일지라도 누군가에게 뭔가 요구하는 일도, 싫으면 싫다고 말하는 일도, 에둘러 거절하는 일도 쉽지 않다. 내 마음을 숨기고 다른 사람에게 맞춰주는 게 편하다.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집에 돌아오면 기절하기 일쑤. 내가 혼자 있을 때 에너지가 채워지는 내향형 사람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그때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 유난히 피로한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날이면 머릿속엔 물음표가 가득 찼다.
난 도대체 뭐가 문제지?
동생은 전혀 다른 기질을 타고 났다. 순하고 여린 이미지와는 멀다. 밝고 유쾌하고 거침없고 당당하다. 자기주장이 확실해하고 싶은 대로 하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 편이다.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배려를 지키는 전제 하에 말이다. 그런 그녀 곁에는 늘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을 곧잘 사귀고 그 관계도 오래 유지하는 편이다.
하지만 동생의 더없이 좋은 성향은 꽤 오랜 시간 집안 어른들께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오히려 지적당하고 억눌렸다. 우리가 어릴 때에는 여전히—내가 87년 생이고 동생이 90년 생이니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을 말하는 것이다—여자애면 얌전하고 순해야 어른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어찌 보면 어른들의 눈에 지극히 ‘여자애 다운’ 나에 비해 상대적으로는 ‘여자애답지’ 않았던 동생의 삶은 늘 비교당하는 삶이었다. 어른들 모인 자리에 갈 때마다 ‘한 성격 하는 애’, ‘맨날 언니 울리는 애’, ‘쌈닭’ 소리를 들어야 하는 삶.
처음엔 잘 몰랐다. 어른들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도 나한테 하는 소리가 아니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다. 늘 비교당하고 상처받았을 동생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듬어 주기에는 나 역시 어렸다. ‘여자애답게’ 얌전하고 순하다는 말이 더 이상 칭찬으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크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언제 적 얘기인데 왜 아직도 하시는 걸까?
동생에 대해 아직까지도 선명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우리 둘 다 이십 대 초반이었을 때였다. 함께 백화점 지하의 푸드 코트에 있는 던킨 도너츠 매장에 가서 주문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앞에서 어느 커플이 보란 듯이 새치기를 했더랬다. 진한 화장에 화려한 차림을 한 여자와 한 30대 정도로 보이는 키도 크고 덩치도 큰 남자였다. 새치기를 당한 건 기분 나빴지만 남자의 덩치가 무서워 나는 별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있었는데, 갑자기 동생이 그들에게 다가서더니 방금 새치기하셨지 않냐고 따지기 시작했다.
커플의 눈에는 동생과 나는 둘 다 160cm가 채 안 되는 키에, 앳된 얼굴의 꼬맹이들. 순식간에 남자와 동생 간의 말싸움이 벌어졌다. 언성이 약간 높아진 상황. 무슨 일이 있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쪼끄만 여자애가 계속 지지 않고 대들자 결국 그 커플이 물러남으로써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나는 남자가 그 굵은 팔뚝으로 동생을 때릴까 봐 심장이 너무 뛰어 내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흥분을 가라앉히는데 시간이 필요할 텐데 동생은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을 치워서 시원한 듯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고 이 상황을 지켜보던 직원에게 막힘없이 도넛을 주문했다. 나라면 교과서를 읽으라고 시켰을 때보다 싱크로율 높은 염소 목소리를 냈을 텐데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했다.
쌈닭 소리를 듣고 자란 동생은 정말 쌈닭이 된 것이다. 아니면 아니라고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말로만 아니라고 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강단 있는 사람, 불의를 보면 참고 지나지 못하는, 그야말로 당당한 쌈닭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런 그녀는 편입한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더니 인사 담당자로 일한 지 십 년이 다 되어 간다. 쌈닭 기질은 직장에서 빛을 발했다. 오랫동안 관습으로 여겨졌던 수많은 잘못된 일들을 바로 잡았다. 불의를 참지 않는 그녀는 이제 비리를 참지 않는다.
언제부터인지 동생은 스스로 변했다. 동생이라는 사람은 그대로이지만 타인의 반응을 다르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을 향하는 부정적인 반응은 무시하고 그쪽에 에너지를 쏟는 일도 그만두었다. 삼십 대 중반이 된 그녀에게 아직도 어른들이 ‘쌈닭’ 얘기를 하시면 “제가 어릴 때 좀 그랬죠?” “원래 제가 좀 그래요”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줄도 알게 되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 그 누구보다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려 빠진 나보다 그 모습이 더 예쁘다고 생각한다.
남편 D군은 오히려 동생처럼 자랐다. 그의 부모님도 우리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일하시느라 너무 바빠 남편이 아주 어릴 때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돌보지 못하셨다고 들었다. 그는 부모님이 일하시는 동안 친척집에 맡겨지곤 했다. 그 집에도 아이가 둘이었다. 부모의 직접적인 돌봄을 받을 수 있었던 사촌들 사이에서 혼자 얼마나 애썼을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다.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할 많은 문제들 앞에서 그의 성격은 예리하게 다듬어졌다. 그런 그는 지금 부당한 일을 당하면 절대 참지 않는 또 한 명의 쌈닭이 되었다.
형부와 처제 사이로 만난 두 쌈닭은 마침 동갑내기여서 말도 놓았다. 동생은 말을 놔야 그나마 형부가 자기를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D의 성격 상 처제와 편한 사이가 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말이다. 쌈닭이 쌈닭을 알아본 걸까. 지금까지 쌓아온 시간이 길지 않음에도 두 사람이 꽤 잘 지내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서로의 성향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나와 전혀 다른 D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건 내가 평생 동생 같은 성격을 겪어봤고 한편으로 그런 성격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나는 순하고 여린 성격, 한마디로 물러 터진 성격 때문에 혼자 덩그러니 놔두면 그냥 바보가 되어 버리고 마는데, 그녀 옆에서는 왠지 세상 무서울 게 없어지는 기분이다. 내가 언니이고 그녀가 동생임에도 함께 있으면 든든하고 보호받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남편 옆에서 그렇듯이.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사랑을 나눠 가져야 하는 둘째는, 첫째를 경쟁자로 여기든 동맹을 맺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아주 어릴 때의 동생은 나를 경쟁자로 여겼던 것 같다. 나의 성향을 이해하게 된 후로는 동맹자로 생각하게 된 것 같고. 얼굴만 보면 옛날옛적 얘기를 꺼내며 저도 모르게 동생 속을 삭삭 긁곤 하시던 어른들은 틀렸다. 그녀는 쌈닭이 아니라 그저 단단하고 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너무 어릴 적에는 그 마음을 미처 다룰 줄 몰랐을 뿐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 언니를 향했던 그녀의 강함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무언가를 해내는 데 반드시 필요한 무기가 되었다. 또한 세상으로부터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그런 그녀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