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찰나 Jan 20. 2022

버스에서 만난 사람들




바람 만난 눈발이 사람들을 재촉했다. 나도 머리칼이며 목도리며 털 달린 모든 곳에 잔뜩 눈을 묻혀가며 빠른 걸음으로 터미널로 향했다. 한창 이동할 시간인데도 추위와 바이러스의 컬래버레이션으로 대합실은 한산하다. 나는 친구들과의 모임을 위해 당진으로 향하는 버스표를 예매했다. 물론 직행은 없다. 터미널이 있는 읍까지 거의 한 시간을 나와서 지도상 조금 더 아래에 있는 큰 도시로 간 뒤 거기서 다시 고속버스를 갈아타고 가야 하는 여정이었다. 시골에서 지내게 된 동안 어딘가를 단번에 이동해 본 일이 없는 것 같지만, 흥미로운 점은 어릴 때부터 멀미가 심해 버스 타는 것을 꺼리는 내가 이제는 이런 수고스러운 과정을 약간은 즐기게 되었다는 데에 있다. 나는 4,500원을 주고 표를 끊고는 찬 바람을 좀 쐬기 위해 대합실을 나왔다. 나의 모습은 영락없는 촌사람이었지만 플랫폼을 어정쩡하게 기웃대는 모습이, 누가 봐도 타지역 사람인 듯했기에 사람들은 몇 초간 시선을 내게 던져두었다. 이곳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많아서 나는 지역에 온 뒤 유별난 행동 없이도 종종 눈길을 받곤 했는데, 한번은 길을 가다 차 속도를 늦추고 빤히 나를 쳐다보기까지 했다. 누가 술에 취해 길에 널브러져 있거나 지하철 승강장에서 싸움이 나지 않는 한 서로가 서로에게 눈길을 줄 일이 없는 서울 사람이었던 나는, 그쯤되니 내게 던져진 시선이 꽤 불쾌하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내려온 지 2년이 지나니 나도 어느 정도 그런 시선에 무뎌지게 되었고, 심지어 주위에 약간의 관심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대상이 눈치채지 못하게 되려 그들을 슬쩍 관찰하는 습관도 생겼다.


나는 그렇게 잠시 시선을 받으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며 조금은 휑하게 정차된 버스들을 뮤직비디오 배경 삼아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잠시  시선이  남자에게 멈춘다. 요란하게 전화 통화를 하는 젊은 남자였는데, 폭설 주의보가 내린 날씨에 엄청 얇은 옷을 입고 있어 눈이 갔다. 그는 나이가 많아봤자 20 초반인  같았지만 어리숙하게 멋을 부린 모양새가, 특히나 날씨에 맞지 않게 얇게 입은   봐도 학생 같아 보였다. 통계적으로 날씨와 어울리지 않게 멋을 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차림새를  누군가를 본다면 어린 친구일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젊어서 추위나 더위를  타는 것인지, 아직 계절의 경험이 적어 제때 입는 법을 모르는 것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돌이켜보면 나도 외모에 신경을 쓰던 중고등 학생이었을  종종 저렇게 딱한 모습으로 돌아다녔던  같기도 하다. 어쨌든  친구는 누군가를 찾는   앞을 지나쳐 갔다. 나도  흥미를 잃어 주위 관찰하기를 그만두려  때쯤 내가  버스가 들어왔다. 10 남짓 버스에 올랐는데, 아까   추워 보이는 남학생도 친구들과 왁자지껄 떠들며 나와 같은 버스 뒷좌석에 탔다. 40 정도면 가는  도시라 다니는 버스가 많아 그런지 기사님은 검표를 하지 않고 출발하신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표를 받기 시작하셨다. 나는 양손 가득 친구에게  반찬과  , 그리고 차표를 분주하게 챙겨 통로로 나갔다. 근데  앞에 가던 남학생이 친구와 함께 다급히 도로 뒷자리로 돌아가는  아닌가.  때문에 나는 잠시 좌석 쪽으로 통로를 피해 주었는데, 그는 살짝 웃고 있었지만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뒷자리에 남아있던 자신의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ㅈ됐다.”



나는 다시 짐을 챙겨 버스에서 내리며 그의 태도를 통해 그 남학생과 일행이 표를 사지 않고 버스를 탔음을 깨달았다. 버스에서 어떻게 내리려는 걸까, 나는 어떤 불순한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그 아이들의 당혹감이 나에게까지 느껴지는 것 같아 괜히 대신 심장이 뛰었다. 터미널 안으로 들어서며 ‘와 실제로 무임승차를 보게 되다니 좀 신기하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내 등 뒤에서 “야!!!!!!!!!” 하는 기사님의 호통 소리가 들린다. 괜히 오줌이 마려운 기분에 화장실로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야. 니들 ㅈ됐다.”



-



나는 환승을 하기 위해 2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전에 이 터미널에 온 적이 있을 때 근처에 서점이 있다는 것을 봐 두었기 때문에 나는 곧장 서점으로 걸어갔다. ‘걔네는 어떻게 됐을까?’ 문득 궁금해하다 익숙한 냄새에 번뜩 정신이 차려진다. 시골 우리 동네에는 없는 샌드위치 체인점에서 나의 서울 향수를 자극하는 향이 잔뜩 화려한 자태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여기가 광역시는 광역시구나. 이 샌드위치 체인점을 보유한 도시의 규모에 감탄하며 당장이라도 들어가 그리웠던 맛을 느끼고 싶었지만 내겐 서점이 더 급했다. 지적 욕구가 식욕을 이겼다는 묘한 승리감에 도취되어 당당한 걸음으로 서점 안으로 입성했다. 그저 시간을 때울 목적만이 아니라 사고 싶은 책이 있었기 때문에 도서 검색대가 알려준 대로 D-319 구역을 굶주린 승냥이처럼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베스트셀러는 아니더라도 꽤 유명한 책인데 왜 안 보이는지 의아해하며 한참을 찾고 있을 때 승냥이의 시야에 뜻밖의 먹잇감이 탁- 들어왔다. 평소 좋아하던 시인의 새 에세이집이 매대에 떡하니 있는 게 아니겠나. 아니 언제 책을 출간하셨지 싶었는데 역시나 따끈따끈한 초판이었다. 예상치 않게 발견한 행운에 잔뜩 들떴는데 심지어 초판이라니. 나는 그 책을 꼭 쥐고서 D-319 구역을 두 바퀴나 더 돈 뒤에야 본래 사려던 책과 새 먹잇감을 품에 안고 계산대로 향할 수 있었다. 계산 순서를 기다리는데, 불현듯 아까 그 샌드위치 가게가 생각난다. 이 순간에 무슨 샌드위치 생각이냐 처음엔 생뚱맞았는데, 조금 생각해보니 당연한 수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사려던 책은 한 권이었고, 어쩌다 두 권이나 사게 됐으니 계획에 없던 지출 앞에서 책과 샌드위치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하는 거였다. 둘 다를 선택하기엔 아무래도 무리였다. 이달 생활비 지출이 이미 주머니 한도를 넘어있었고 그런 와중에 백수도 일탈이 필요하다며 이번 여행까지 계획했기 때문에.


아아, 이 죽일 놈의 가난이여.


웃겼다. 하지만 자조는 결코 아니었다. ‘책은 다음 달에 사도 되지만… 초판은 아니겠지? 이 샌드위치는 지금 아니면 앞으로 6개월간은 못 먹지 않을까?’ 하며 샌드위치와 책 사이에서 고민하는 내 진지함이 순수하게 웃겼을 뿐이다. 당신도 내 심각한 표정을 보았다면 아마 엄청 놀려댔을 거라. 짧은 찰나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햄릿도 명함을 못 내밀었을 정도니까. 책이냐 샌드위치냐, 그것이 문제ㄹ…



“봉투 100원인데 드릴까요?”

“아. 네넵.”



108번의 번뇌 사이 결제는 완료되었다. 그리고 나는 서점에 입장할 때 보다 더 당당한 발걸음으로 서점을 나섰다. 다시금 승리감에 도취되었다지만 도로 그 샌드위치 가게 앞을 지나야 할 때, 한 번의 침 삼킴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이리 본다면, 가난은 때로 필요한 듯도 하다. 누군가는 결코 하지 않을 시답잖은 고민을 진지하게 해 보게 만들고, 그 고민을 통해 결국 내게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준다. 나는 좀 전보다 더 서둘러 읽고 싶어진 마음으로 빠르게 대합실로 걸어갔다.



-



21번 승차장 문 너머로 눈발은 그친 지 오래되었지만 대합실엔 어디론가로 출발하고 또 어딘가에서 도착해 오는 발길들이 분주했다. 당진 가는 버스는 그전에 서산에 들르는 데 그 인근에 부대가 있는지 휴가 나온 군인들도 꽤 볼 수 있었다. 바람도 날카로운데 친구와 연인과 가족과 다시 떨어져 복귀해야 하는 군인 아저씨들을 안쓰러운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아, 아니지. 이제 군인 동생들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외려 내가 더 쓸쓸해져 얼른 책을 펼쳐 들었다.


전보다 짧게 쓰인 작가의 호흡에 책장은 빠르게 넘어갔다. 부러 안 챙기는 아침밥도 먹고 나왔는데 배는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샌드위치에 미련이 남았는지 연신 꼬르륵대다가 나는 다시 문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다가 한 번씩 거북목을 들어 시선 앞에 앉은 군인 아저씨를 쳐다보다가 또 그와 나, 둘 중에서 누구를 안쓰러워하는지 모를 마음으로 다시 고개를 내렸다. 이걸 몇 번 반복하니 좀처럼 안 올 것 같던 버스가 승차장 앞에 와 있었다. 음악을 들으며 잠을 청하는 것으로 멀미를 이겨내 본다. 버스는 휴게소에 잠시, 그리고 서산에 멈춰 섰다. 몇몇 승객과 군인들이 내리고 버스는 다시 출발하려는데 앞에 앉은 여자가 자꾸 내 쪽으로 돌아보며 나를 쳐다본다. 마치 발로 등받이 좀 차지 마세요, 하는 눈빛이다. 가만히 있던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눈을 끔벅거리다, 연신 돌아보며 뭔가 눈으로 쏘아대는 여성에게 한마디 해야겠다 싶어 이어폰을 뺐다. 그제야 마스크 너머로 “-진이에요? 네? 저기요. 당진 지난 거예요?” 하고 묻는 말소리가 들린다.



“엇, 아뇨, 아뇨. 당진은 다음, 일 거예요.”



마스크 때문에 그녀의 입이 보이지 않는 데다 나는 이어폰까지 끼고 있어 소리도 듣지 못하니, 그녀의 눈이 말하는 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째려본다고 오해했으니. “저기요, 뭘 봐요.”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 너무나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잠깐의 소통도 이렇게 어려운데 도대체 생의 전부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 또 좀처럼 듣지 못한다는 건 생각보다 얼마나 더 불편한 일인 걸까. 우리는 결코 상상으로는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여자분이 위치를 물어봐 준 덕에 나는 좀 더 친절한 비장애인이 되고 싶어졌다. 그러면서 같은 상황을 놓고도 뭘 쳐다보냐 따질 준비부터 하는 나는, 기본값이 어쩐지 네거티브에 가깝구나 싶었다. 각성에, 여러모로 반성까지 하고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 벨소리가 울리더니 이번엔 군인 한 분이 기사님 쪽으로 다급히 걸어간다. ‘당진에도 부대가 있나?’ 싶었는데 이번엔 그 친구가 “서산 지났나요?” 하고 묻는다. 뭐지, 오늘 나 빼고 다들 짰나.





당진에 닿으니 길은 어둑해져 있었다. 나는 그 여자와 군인과 함께 내렸다. 군인은 서산으로 가는 표를 다시 끊는 듯했고, 내가 친구의 픽업을 기다리는 30분 동안 함께 터미널 안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그간의 얘기로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문득, 문득, 당진이 처음인 듯한 그 여자의 여행은 재밌게 시작되었는지, 자다가 내릴 곳을 놓친 군인이 얼차려 없이 무사히 복귀했는지 궁금했다.


그날, 유난히 오래 타고 있었던 것 같은 당진행 버스에는 무임승차를 목격하고 오줌이 마려운 내가, 지적 욕구로 식욕을 누른 자랑스럽고 가난한 내가, 이제 더는 군인 아저씨를 아저씨라 부를 수 없어진 내가, 몸이 불편한 누군가에게 좀 더 친절해지고 싶은 내가 타고 있었다. 전부 내가 버스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