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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책 Feb 14. 2024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

“요즘 무슨 운동 하세요?”

모임 뒤풀이 자리에서 질문을 받았다. 

“웃음벨이 될 것 같아서 차마 말을 못 하겠네요.”

이 운동이 내 운동이다. 나 이 운동 한다. 왜 말을 못 하냐고? 무슨 볼드모트도 아니고. 홍길동 아버지도 아니고. 질문을 한 사람이 남자분이라서 그런지 더 말을 못 하겠더라. 아무래도 이 운동에 대한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겠지.

내가 올해 1월부터 하는 운동은 발레다. 자. 웃어도 이해해 줄게. 얼마 전 다른 뒤풀이에서도 내가 하는 운동은 웃음벨이라고. 발레라고 했더니 정말 다 크게 웃어버렸다. 발레라는 단어가 그렇게 웃긴가. 아니면 내가 발레 하는 게 웃긴가.


발레를 처음 배웠던 건 4년 전이었다. 춤을 배우면서 발레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발레를 배우기에는 내 몸뚱이가 문제여서 늘 망설였다. 시에서 하는 시설이 코로나로 수업을 중단하면서 시설의 발레 선생님께서 발레학원을 개업했다는 소식을 친구에게 듣고 여기다! 싶었다. 

소식을 전했던 친구도 발레 수업을 들었는데 발레는 정말 좋은 운동이고 선생님도 좋았다며 칭찬 일색이었다. 검색해 보니 새로 오픈하는 학원이라 시설도 깨끗해 보였고 오전에 내가 갈 수 있는 시간이라 등록했다. 코로나가 신경 쓰였는데 소규모로 수업이 진행되어 더 좋다고 생각했다.

발레슈즈도 학원에서 살 수 있다고 해서 편한 마음으로 첫 번째 수업을 하러 갔다. 수업에 다섯 명 정도 있었는데 아이고. 모두 레오타드 차림이었다. 이렇게 다들 차려입었을 줄 몰랐지. 나는 평소 운동하던 대로 트레이닝 복을 입고 갔었다. 발레 슈즈만 신고 발레 동작을 배우는데 레오타드를 입지 않는 내가 오히려 더 튀어 보였다.

결국 학원에서 레오타드와 타이즈. 팬츠를 풀세트로 샀다. 수영복처럼 생긴 레오타드는 사이즈가 작아 보였는데 제일 큰 사이즈란다. 내 몸이 이것에 다 들어갈 것인가. 다행히 들어갔다. 발레 정식 복장을 하고 그렇게 나도 발레의 세계에 점점 스며들어 갔다. 

발레는 코어 운동이었다. 몸에 힘이 정말 많이 들어갔다. 어깨는 내려야 하고 배꼽은 올려야 하고 팔과 허벅지, 손과 발 모양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경 쓰면서 동작해야 했다. 좋은 운동이었지만 갑작스러운 수술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중단했다.


작년에 방송 댄스를 그만두면서 다음 운동을 뭐로 할지 고민하다가 발레가 떠올랐다. 발레를 배우는 곳을 검색했더니 근처 시에서 하는 시설의 프로그램 중에 슬림핏 발레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슬림핏은 또 무엇인가. 아무튼 발레가 있으니 접수하자, 다짐했다. 신규 회원 접수 시간은 오전 7시. 

알람을 맞추고 오전 7시에 접수하려고 보니 신규 회원은 4명밖에 모집을 안 했다. 서둘러서 결제를 마쳤다. 그리고 바로 마감. 발레가 이렇게 인기 있는 운동이었나. 7시에 일어나길 잘했다며 스스로에게 칭찬했다.


올해 첫 번째 발레 수업 시간. 비가 왔다. 갈지 말지 고민하다가 시간에 쫓겨 택시를 타고 갔다. 그래도 첫 수업인데 가야지 싶었다. 슬림핏 발레 수업 정원은 21명이었는데 거의 다 온 듯했다. 그리고 어째 다 또 레오타드를 입고 있냐며. 

슬림핏이 붙어 있어서 또 편하게 발레슈즈만 챙겨간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예요. 시커먼 트레이닝 복을 입고 갔더니 피치 톤의 타이즈들 사이로 튀었다. 나 말고 또 시커먼 사람이 있다. 신입 회원이었다. 

첫 번째 수업이라고 선생님께서 발동작을 알려주셨다. 다행히 몸이 기억하고 있다. 1번 발. 플리에. 그랑플리에를 하는데 무릎에서 소리가 났다. 그런데 나만 소리가 나는 게 아니었다. 학원보다 더 많은 사람이 있으니 더 소리가 크게 났다. 

우당탕탕 첫 번째 수업을 마치고 봉인해 두었던 레오타드를 꺼내 보았다. 역시나 작았다. 이것이 제일 큰 사이즈인데. 레오타드를 입기에는 글러 먹었다. 그 사이 만삭 몸무게까지 온 살을 어떻게든 빼야지. 당분간은 튀겠지만 트레이닝 복으로 때워야 한다. 


초반부터 결석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들도 아팠고 아들이 나으니 나도 아팠다. 계속 결석하다 보니 가기가 싫었다. 그래도 내 멱살 내가 잡고 출석했다. 그날따라 10분 일찍 발레 바를 치우는 것이 아닌가. 왜 빨리 수업을 마치는지가 궁금했는데 마친 게 아니었다.

사람들이 벽 끝 쪽으로 서기 시작했다. 나도 눈치를 보며 끝자리 쪽에 섰다. 선생님께서 발레 점프 동작 시범을 보여주며 대각선 방향으로 가셨다. 헉. 저 동작을 따라 해야 하는 건가. 세 명씩 점프를 하며 반대편으로 나아갔다. 내가 동공 지진을 하고 있으니까 “그냥 하면 돼요.”라고 한 분이 말씀해 주셨다.

저기까지 어떻게 가야 하나 걱정되었다. 마침내 마지막 남은 사람들의 순서까지 오게 되었다. 에라. 모르겠다. 맞는지 틀리는지도 모르겠고 냅다 점프를 하며 따라갔다. 반대편 자리에서는 우리가 모두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히려 마지막에 하는 순서가 제일 안 좋구나. 모두 다 도착해있으니 제일 늦게 출발한 우리의 관객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초보인 내가 중간에서 시작하기도 어려웠다. 발레학원에서는 소규모라서 그랬는지 이런 과정은 없었는데 이 부끄러움을 견디며 발레를 계속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세뇌하기 시작했다. 다 각자의 발레를 하고 있을 뿐. 신입 회원이니까 처음부터 잘하면 이상하지. 잘하면 내가 왜 배우러 왔나. 이런 뻔뻔함으로 한 달을 채워나갔다. 그리고 3개월 재등록을 했다.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 수업을 마치고 티타임이 있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우아하게 티타임이라니. 조금이라도 안면을 트면 마지막 점프 시간이 덜 부끄러워질 것 같아서 따라갔다.

선생님까지 열 명 정도 모여서 티타임을 가졌다. 나 말고 다른 신입 회원은 대학생 같아 보였는데 어떤 분이 전공을 물어봤더니 수의대생이라고 했다. 또 다른 대학생은 의대생이라고. 이렇게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과 발레 하고 있었다니.

나는 마지막 점프 시간이 부담스럽다고 고백했다. 하다 보면 아무렇지 않아진다고 격려를 받았다. 결국 시간이 문제겠지. 티타임을 가진 후 안면을 익혀서 수업 시작 전 인사 나누기도 편해졌다. 

2월 첫 번째 발레 수업 시간. 나는 오늘도 수의대생과 의대생과 셋이 나란히 샤세와 제떼를 하면서 얼굴에 철판을 깔고 끝까지 나아갔다. 우리를 기다리는 관객이 있으니까, 발레는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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