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뭐 거의 푸르테리안 식단 아닌지...(아님)
가스레인지에 불 켜는 일을 신중히 하게 되는 계절이 왔다. 큰일이 있지 않으면 가스 불을 켜고 특히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끓여내는 일은 하지 않게 된다. 덥고 습한 이 날을 무사히 잘 나게 해주는 것은 8할이 과일이라고 믿는다. 새콤, 달콤, 시원한 과일을 냉장고 가득 채워 놓으면 그렇게 든든할 수 없다. 요즘은 마르쉐나 한살림, 두레생협 같은 협동조합뿐 아니라 인스타그램이나 네이버 스마트스토어를 통해서도 자연농법이나 무농약으로 귀하게 키워낸 과일들을 사는 것이 가능해, 생산자의 스토리를 이해하며 과일을 먹는 재미가 늘었다. 뭘 과일을 품종을 따져가며 먹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먹는 음식이 어떤 음식이고 어떻게, 누구에게 키워졌는지를 알고 먹는 것은 큰 기쁨이자 일종의 명상 같은 느낌이다. 다음은 여름 과일 사치의 요약.
복숭아 - '아이 셔' 천도봉숭아부터 쫀득 부드러운 백도까지
복숭아는 '호' 영역이 아니었다. 아마도 어렸을 때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었던 터라 '복숭아는 먹으면 아픈 음식'의 카테고리에 오랫동안 분류돼 있었기 때문일까. 특히나 털이 있는 백도나 황도는 통조림이 아니고서야 매번 온몸에 나는 두드러기로 고생을 많이 했었다. 그나마 천도복숭아는 그 편은 아니었기에, 천도복숭아는 많이 먹고 자랐다. 신 맛을 좋아하는 나는 새콤한 맛이 두드러지는 천도복숭아를 후숙 했다가 살짝 말랑할 때 먹는 것을 좋아한다. 최근에는 천도복숭아도 품종에 따라 구분해 파는 생산자가 조금씩 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신비복숭아를 포함해 신선, 썬프레, 천홍, 레드골드 같은 복숭아가 천도복숭아 종류에 속한다고 한다. 올해는 신비복숭아와 천홍을 먹었다. 신비복숭아는 겉은 천도복숭아 같지만 속은 백도 같은 느낌이다. 씨가 큰데 과일의 크기가 작아 사실 가성비는 떨어진다. 가격도 비싼 편. 6월 중순부터 나오기 때문에 복숭아 철을 맞아 기쁜 마음으로 한 번 먹기에 적당한 것 같다. 썬프레는 흔히 먹는 천도복숭아의 품종. 새콤달콤의 직관적인 맛이다. 아는 맛이 무섭다고, 나에겐 아직 복숭아를 떠올리면 썬프레가 떠오른다.
지인의 지인이 귀하게 키웠다는 황도를 선물 받아 아끼며 먹었다. 손으로 '스스으으윽' 하면 껍질이 벗겨지는 전형적인 황도였는데 껍질을 벗기고 난 속살마저도 보송보송하고 예뻐서 복숭아를 깔 때마다 한참을 들여다봤던 기억이 있다. 6알의 큰 기쁨이었다.
살구- 단 2주, 부지런한 사람만이 이 사치를 누릴 수 있다.
시장에서 한 다라이에 5천 원쯤 하는 살구를 샀다가 아무리 후숙 해도 맛이 없어서 결국 버리고야 말았다. '절대로 아무 과일이나 사지 않으리' 결심하고, 마르쉐 장터에 나오시는 '어봉길농장' 농부님의 '하코트살구'를 박스로 샀다. 자두만큼 크고 묵직한 살구가 30알. 받자마자 바로 먹어도 딱딱하거나 너무 시지 않았고, 이틀 후숙 했더니 온 입 한가득 살구 특유의 우아하고 새콤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즐거웠다.
살구는 가끔 반을 갈랐을 때 곰팡이가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어봉길농장 살구는 그런 살구 한 알 없이 끝까지 맛있게 먹었다.
채식을 하기 전에 살구를 보면 무조건 고르곤졸라를 얹어 구운 뒤 꿀을 뿌리고 피스타치오를 다져 올려 먹었다. 이기지도 못하는 와인을 마시려고 안주를 만들었던 것. 살구를 보니 그 맛이 생각났다. 그 맛이 얼마나 맛있는 것인지 생생했다. 하지만 구태여 그 맛이 아니더라도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고, 나는 그런 기쁨을 찾아 누리는 능력을 많이 키워왔다는 것도 안다. 채식 지향을 하는 날들이 쌓여갈수록 늘어난 단단함이라고 자부한다. 동물 착취로 만들어낸 내 혀 끝 즐거움을 통해 행복을 느끼지 않더라도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게 있다는 확신. 아마도 이것이 요즘 내 채식을 이어가는 기반이 되고 있는 것일 터이다.
우연히 알게 된 차회가 있어서 혼자 신청해 참여했다. 컨셉은 계절 과일인 살구와 자두와 어울리는 음식의 페어링이었다. 농약, 제초제, 화학퇴비, 호르몬제를 사용하지 않고, 심지어 경운도 하지 않고 자연농법으로 키운 살구와 자두를 품종별로 맛봤다. 살구는 하코트살구와 살구와 자두를 교배한 플럼코트 중에서도 티파니와 하모니 두 품종을 먹었다. 플럼코트는 들어만 보고 실제로 처음 먹어봤는데, 자두의 신맛과 단단한 과육이 살구와 섞여 또 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과육의 색도 살구에 붉은빛이 들어 신비로웠다.
살구는 이제 없다. 반짝하고 2주 정도 나왔다 들어간 것 같다. 맛있는 살구를 기다리던 초여름과 귀한 살구를 입안 가득 넣고 만끽하던 날들, 안녕-
수박 - 1인 가구지만 일주일에 한 통씩 먹는.
나는 퇴근하면 그렇게 수박이 땡긴다. 냉장고에 썰어둔 차가운 수박을 포크로 찍어 입에 넣으면 그만한 보상이 없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수박이 맛이 덜 들었던 것 같은데 이번주에 산 수박은 같은 곳에서 구매했지만 맛이 확실히 들었다. 이렇게 달고 시원한 수박이라니.
나는 수박 사는 일에 거침이 없다. 물론 다른 과일도 마찬가지다. 수박은 한통을 사면 혼자 다 먹기 힘들고 껍질을 처리하는 일도 번거로워 1인가구에서 주저하는 아이템 중 하나다. 하지만 주저하지 않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된다. 퇴근하고 수박을 양껏 먹으며 고생한 하루를 보상하고, 재택 할 땐 간식으로도 먹고, 아침 과일 플레이트에도 한편을 차지하면 일주일에 6kg 한 통은 금방이다. 여름엔 냉장고에 수박 넣을 공간을 기꺼이 비워두어야 한다. 내가 혼자 사는 것 때문에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에 제한을 두지 않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많은 문이 열린다. 그 중에 가장 빨리, 가장 쉽게 열리는 문은 수박의 문일 것이다.
온갖 비타민과 미네랄, 식이섬유와 수분이 풍부할 뿐 아니라 고유의 단맛과 신맛이 어우러져 즐거움을 주는 과일을 많이 드셨으면. 어디선가 봤는데, 이탈리아 사람들은 감기가 걸렸다고 해도, 배가 아프다고 해도, 머리가 아프다고 해도, 소화가 안된다고 해도 과일을 먹으라고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매실액 같은 것일까. 이 계절이 주는 즐거움을 충분히, 감사히 누리면서 하루하루를 사는 즐거움을 누려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