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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Nov 14. 2023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발리 여행기 4. 각자의 여행길로. 그리고 다시 돌아온 우다라.

 우다라에서 매일을 같이 보냈던 나를 포함한 네 명은 우다라 이후의 일정이 각자 제각각이었다. 우다라에 머무는 날도 모두 같은 것은 아니었기에, 우리는 한 명씩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나는 그 중에서 가장 오래 우다라에 머무는 사람이었으므로, 나를 제외한 세명을 모두 떠나보내는 입장이었다.


 누군가 떠나는 날이 되면 그전 날 밤 한 방에 모여 떠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붙잡아 보려는 듯 끝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낮에 요가 수업이 진행되는 공간은 밤이 되면 고요하기 짝이 없는 빈 공간이 된다. 그대로 온전히 내리 꽂히는 달빛을 안으며,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바닷바람을 간지럽게 받을 수 있는 공간. 그 공간을 우리 마음대로 써도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 중 한 명의 방이 꼭대기층 요가 스튜디오를 끼고 있는 방에 머물렀기에,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아서 우리는 밤이 되면 그곳에 모였다. 달빛 말고는 한 줌의 불빛도 없는 곳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를 발견한 이곳의 사장님과 매니저님도 우리를 보고선 그냥 웃고 지나갔다. 우리는 그것을 허락으로 이해했다.


 '기차에서 만난 낯선 이방인' 이론처럼 우리는 서로가 낯설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가 만난 곳이 우다라였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꺼내놓지 않은 이야기들을 서로에게 꺼내놓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아픈 상처부터 지금 겪고 있는 인생 최대의 난제까지. 우리는 각자 행복했지만, 각기 다른 고통을 움켜쥐고 있었고, 그 각기 다른 고통을 어떻게든 흘려보내보려고 노력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발리 중에서도 우다라를 선택한 이유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우다라에서 만났기 때문에 별 다른 이유 없이도 서로에게 털어놓음으로써 해결책을 찾기보다 흘려보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만큼이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를 경청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경청한 적이 또 있었던가. 우연히 낯선 곳에서 만난 우리는 서로에 대한 아무런 판단 없이 상대의 이야기를 마음으로 들을 수 있었다. 입으로 나온 말들은 귀를 통해 상대에게 진짜로 전해지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떠날 때마다 우리는 서로 진한 포옹을 나눴다. 가장 먼저 떠난 것은 B. 발리에서 베트남으로 가서 일주일을 머물다가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그녀가 떠나기 전 날 저녁을 먹으며 우리는 그녀의 베트남 여행 계획을 들었다.

 "베트남 별 거 없잖아. 그냥 우다라에서 우리랑 더 놀자. 거기 가서 뭐 해."

 괜히 질투 어린 투정으로 우리는 그녀에게 가지 말라고 보챘다. 꽤나 럭셔리한 호텔을 예약해 둔 그녀는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어쨌든 집으로 돌아가는 직항이 없기 때문에 베트남을 들렀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갈 겸, 베트남 일정을 추가한 것 같았다.


 떠나기 전 그녀는 낮에 서점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발리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을 위한 서점으로 영어 서적만 전문으로 하는 서점이었다. 그녀는 서점에서 발리의 뒷 이야기를 담은 책을 사서 비행기에서 읽겠노라며 책을 여러 권 샀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미니 명상 가이드 북을 사 왔다.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읽으라며 툭 하고 던진 그 명상 가이드북은 사실 명상 가이드의 역할은 하지 않았지만, 예쁘고 앙증맞은 모양새에 볼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 서점에서 산 책은 우리를 위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우다라 레스토랑에서 매일 우리에게 음식을 서브해 준 직원 중 한 명이 곧 아이를 출산할 예정이라, 그녀를 위한 출산 가이드북을 한 권 구매하기도 했다. 역시나 별로 실용적인 선물은 아니었지만 건강하게 출산하라며 건넨 책과 편지에는 우리 이름도 함께 쓰여 있었다. 역시나 큰 언니 다운 마음 씀씀이 었다.

 "너무 고마워요. 베트남 가지 말고 우다라에 더 있어요. 제가 더 열심히 서빙할게요."

 온 우주가 그녀가 우다라에 더 머물길 바랐다.

 어쨌든 즐겁게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라며, 찐한 포옹과 함께 그녀를 보낸 그날 밤. 그녀에게 왓츠앱 메시지가 왔다.

 "나쁜 소식이 있어. 나는 베트남 공항에서 베트남으로 입국을 못하고 있어. 비자가 필요하다는 걸 나는 왜 몰랐을까?"

 세상에나. 온 우주의 바람이 정말로 그녀의 베트남행을 막은 것일까? 그녀는 비자가 없었고, 온라인 비자를 신청하면 5일 뒤에나 나온다고 했다. 완전히 패닉이 되어버린 그녀는 결국 발리로, 그리고 결국 우다라로 돌아왔다. 그녀가 원래 머물던 방은 다른 사람이 예약을 했었고 우다라는 예약이 완료되어 더 이상 투숙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돌아온 그날, 그 예약은 하필이면 당일에 취소가 되어버린 상황. 그녀는 돌아오자마자 이전에 머물던 그 방에 다시 머물게 되었다.


 "정말 수치스럽다. 너무 수치스러워. 너무 부끄러워 이 사람들을 마주하는 게."

 정말 '수치사'라도 할 것처럼 구는 그녀를 놀리는 재미와 돌아온 그녀와 며칠을 더 함께 있을 수 있다는 반가움으로 그날 밤은 흥에 겨웠다. 우다라의 모든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돌아온 그녀'에게 인사를 했고, 투숙객 중에서도 그녀를 놀림 반, 반가움 반으로 반겨주었다.


 다시 돌아온 건 그녀뿐이 아니었다. 결국 길리로 떠났던 나도 다시 우다라로 돌아왔다. 발리에서 우다라보다 더 좋은 곳을 생각해 낼 수도, 무엇보다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우다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 넷 중 발리에 남아있던 C도 다른 일정을 취소하고 다시 우다라로 돌아왔다.

 "우다라로 돌아오는 게 유행인 것 같아서요."

 나와 C, 그리고 우다라의 오너는 다시 커뮤니티 테이블에 앉아 저녁을 먹었다. 우다라의 직원들은 예전에 그랬듯, 놀란 얼굴로 다시 우리를 맞아주었다.

 "우다라가 너무 우리 버릇을 망쳐놨잖아요. 매일매일 마사지, 음식, 음료수, 요가수업을 하는데 추가로 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곳에 있다가 물 한 병 시키면 5달러를 내라고 하니까, 내가 우다라로 오지 그럼 어디로 가겠어요? 과일 스무디를 글쎄 그냥 심심한 유리잔에다 담아주더라니까요. 이렇게 다 다르게 생긴 특이하고 예술적인 잔에 담기지 않은 스무디를 내가 마셔야 하다니!"

 우다라 사장은 우리의 농담에 연신 흐뭇해하면서도 철부지 딸들을 보듯 '세상이 얼마나 각박한데 너네 그러면 안 된다'며 우리를 말렸다. 그날 우리는 저녁을 아주 천천히 오랫동안 먹었다.


 "넌 진짜 아름다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아름다워. 그냥 아름다운 존재야."

 아무리 우리나라만 벗어나면 자존감이 수직상승하는 경험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우다라에서 만난 사람들은 해도 너무 심했다. 눈꼽도 안 떼고 요가를 같이 하고 화장은커녕 로션도 제대로 안 바르고 다니고, 요가복 말고 다른 옷을 입은 일이 두 번밖에 되지 않는데도 그런 모습을 보고 이 사람들은 내가 너무 아름답다고 했다.

 "너는 빛나. 너는 아니라고 하지만 사랑으로 가득 차있어. 그 사랑이 막 밖으로 흘러넘쳐 빛나. 나는 그게 보여."

 나는 마음 한구석엔가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거부감, '아니야. 난 그렇지 않아!' 하는 마음 대신 그 말을 믿는 쪽을 택해보기로 했다.

 "내가 이 말을 들으려고 돌아왔나 봐요."


 "우리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조언을 해주세요."

 우리는 오너에게 물었다.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해."

 생각지 못한 답변이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라느니 같은 'YOLO'적인 조언을 해줄 것 같았지만, 정 반대였다.

 "인생이 숙제나 과제는 아니지만, 가볍게 여길 것은 아니더라. 진지하게 살아. 문제가 생기고 고통이 찾아오면 도망가거나 거부하지 말고 그 고통을 그대로 마주하고, 겸허하게 수용하고, 나를 낮추고, 그러고 나서 거기서 다시 시작해야 해."

 

 나는 다시 서울로, 다른 이들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우리는 언젠가 다시 우다라로 올 것이다. 삶을 진지하게 살면서, 내 안에 가득 찬 사랑을 믿으면서 살다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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