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여행기 1. 아유르베다 요가 리트릿
스리랑카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항공 결항 통보를 받았다. 항공사는 일방적으로 항공기 결항을 통보할 수 있지만, 대안을 적극적으로 찾아줘야 할 의무는 없어 보였다. 여행 일정 변경으로 인해 날려버린 숙박비용을 책임질 이유는 더더욱 없어 보였다. 크리스마스 파티를 스리랑카 요가원에서 하려고 했던 계획은 무산됐다. 갑자기 텅 비어버린 크리스마스이브. 훌라 동료들과 춤을 추고 채식 짜장면을 먹으며 보냈다.
예정보다 하루 반 늦게 도착한 스리랑카. 밤늦게 도착해 어렵사리 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빠져나오니 자정이 넘었다. 기다리고 있던 기사님을 만나 차에 실렸다.
"얼마나 걸리나요?"
"세 시간 반쯤이요."
모종의 긴장감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뒷좌석에 그대로 누워서 깊은 잠에 빠졌다. 너무 깊이 잠들어 어떤 길을 왔는지 알지도 못했다. 깨우는 소리에 일어나 보니 사방이 새까맸다. 핸드폰에서 구글맵을 켰다. 구글맵도 새까맸다. 누군가 호롱불 같은 것을 들고 차 안을 비췄다.
"어서 와요."
인도 전통 의학인 '아유르베다'에 기초한 요가와 스파를 운영하는 리트릿센터. 대충 찾아서 예약만 해두고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일에 치여 있다가 이렇게 실려오듯 도착했다. 도착해서야 이곳에 인터넷도, 전기도, 온수도, 전화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머, 몰랐어요? 보통 그걸 다 알고 오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어머 그래요? 뭐 어쩌겠어요. 오히려 좋죠 뭐."
현대문명에서 잠시 단절되는 것. 뭐 모든 현대인이 두려워하면서도 원하는 바가 아니던가. 예상보다 일이 너무 밀려 바쁜 4분기를 보낸 터라 난 오히려 반가웠다.
인터넷, 전기, 온수, 전화 같은 문명까지는 잘 벗어났는데... 어랏. 벽도 없다. 이곳은 모든 '방'과 시설이 흙으로 지어진 곳이었다. 오직 흙과 물로만 지어진 방엔 벽이 없었다. 지붕과 기둥이 있는 오두막에 덩그러니 매트리스 세 개가 전부였다. 욕실엔 가슴까지 오는 흙으로 만든 벽이 있었지만 대충 아주 많이 휑한 느낌. 스리랑카 북부에 개발이 전혀 되지 않은 곳에 있다 보니 원숭이부터 온갖 새들이 욕실과 오두막을 오간다. 반짝이는 스틸 소재의 화장품병이나 반짝이가 붙은 파우치, 가방 등을 내놓으면 어김없이 표적이 된다고 했다. 내 화장품은 모두 번쩍이는 알루미늄 통에 들어있었고, 나는 전동칫솔을 가지고 왔다. '제발 배터리가 닳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할까 하다가 배터리가 나가면 그냥 무거운 칫솔로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전기가 없어서 저녁을 먹고 나면 사방이 새까만데, 나는 책을 읽겠다고 이북리더기를 가져왔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냐는 것도 아니고.
전기가 없으니 냉장고도 없었다. 많은 리트릿센터처럼 이곳도 모든 식사와 간식이 포함되어 있다. 점심과 저녁을 만드는 주방을 엿보는 일은 늘 흥미로웠다. 냉장고도, 가스레인지도 없는 이곳엔 당일에 수확한 채소와 과일이 가득했다. 한쪽에 자리한 찬장엔 향신료가 든 유리병들이 가지런히 있었고, 나이가 제일 많은 분은 강한 전완근을 이용해 매끼 신선한 코코넛삼발을 돌로 갈아 만들고 계셨다. 모든 음식은 직화(Wood fire)로 만들어진다. 숯과 장작을 태워 그 위에 도자기 냄비를 올려 달커리와 수프들을 만든다. 아유르베다 원칙에 따르면서 외국인들을 배려해 매운 메뉴들은 올리지 않았다. 저녁마다 올라오는 물소젖치즈를 제외하면 모두 비건이었다. 신선한 샐러드와 찐 채소들, 몇 가지 커리와 코코넛 삼발, 익힌 통곡물밥. 각자 접시에 먹을 만큼 덜어 먹는다. 익숙한 몇몇 사람들은 포크도 쓰지 않고 손으로 밥을 잘도 먹었다.
아침 과일과 차를 먹고 요가를 하고 나와 먹는 아침은 늘 꿀맛이었다. 코코넛가루를 물에 개워 굽고 시나몬과 코코넛설탕을 뿌려 말아 놓은 팬케익은 모두의 최애 메뉴였다. 아침을 먹는 공간에서는 오후 간식도 제공됐는데, 역시나 코코넛 반죽을 튀겨 달콤한 코코넛플레이크와 코코넛설탕을 묻힌 볼이 최고로 인기가 많았다. 오전에 요가를 하고 아침 식사 후 각자의 시간을 보내다 점심을 먹고, 아유르베다 스파를 받고 나면 오후 요가 시간이다. 요가가 끝나면 저녁 식사 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시간들이 잘도 흘렀다.
메인하우스 뒤편엔 저수지가 있었다. 꽤나 큰 저수지에서 사람들은 수영을 즐기기도 하고 카약을 타기도 했다. 그냥 햇살을 즐기기도 했고 맨발로 걸어 다니거나 (요가원 전체에서 보통 다 맨발로 다닌다. 신발을 신을 이유가 크게 없다.) 명상을 하기도 했다. 저수지를 둘러싼 산을 넘어가면 정글이 있다고 했다. 그 정글에는 온갖 야생동물이 사는데, 그중에는 스리랑카에 많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관광자원이 되기도 하는 코끼리도 많았다. 정글에 있어야 할 코끼리들은 매일 밤 요가원을 찾아왔다.
그리고 매일 밤 코끼리와의 숨 막히는 대치가 이어졌다. 코끼리를 겁주기 위한 공포탄 소리가 울렸다. 코끼리는 IQ가 70 이상인 것으로 알려진 똑똑한 동물. 아주 좁은 골목길을 캣워크로 걷기도 하고, 지붕이 있는 곳들은 지붕이 깨지지 않도록 몸을 최대한 낮춰서 조심히 지나갔다. 사람을 헤치지도 않았다. 코끼리가 노렸던 것은 오직 바나나와 코코넛. 잔뜩 쌓아둔 코코넛을 가져가거나 바나나 무더기를 가져가 먹는 것 말고는 피해를 주지 않는데, 꼭 그렇게 총성으로 쫓아내야 할까? 하지만 그 지역에 평생 살아온 사람들은 코끼리가 아무 의도 없이 지나가다 집을 밟으면 집이 무너진다고 했다.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무해한 코끼리와 대치해야 한다니. 하지만 이들에게 이 흙으로 지은 집들이 삶이라고 생각하면 무엇이 정답인지 바로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아무튼 매일 아침 코끼리 발자국을 찾아다니며 어젯밤 코끼리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했을지를 상상하는 일은 아침 일과가 되었다.
스리랑카의 유명한 여행 코스 중 하나는 국립공원에 들러 코끼리를 포함한 야생동물을 관찰하는 것이다. 국립공원들은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고, 우리 같은 곳에 동물을 가두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매일 밤 코끼리가 내려오고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대치를 이어가는 곳에서 일주일을 지내다 보니 코끼리가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사실 우리가 삶의 터전이라 우기는 곳들은 사실 코끼리의 집이 아니었을까? 대치와 공존이 서로 공존하는 것이 자연의 일부인 것인지... 애초에 그 정글에 먹을 것들이 많이 남아있었더라면 요가원까지 코코넛을 찾으러 오진 않지 않았을지. 왜 정글엔 먹을 것이 부족해져 가는 것일지... 코끼리의 발자국은 반가웠다가도 이내 슬퍼지기도, 화가 나기도 했다.
스리랑카 여행이 끝나고 돌아와 코끼리 꿈을 꿨다. 코끼리는 몸에 꽉 끼는 틀에 갇혀 컨베이어벨트 위에 줄줄이 올라가 있었다. 사람들은 공항에서 짐을 찾듯 컨베이어 벨트를 바라보며 한 마리씩 실려가는 코끼리를 보고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이 리트릿센터는 30년 전에 지어졌다. 이곳 주인은 건물을 산 것이 아니라 한 마을을 다 샀다. 30년 전 이곳이 매물로 나왔을 때 사는 사람이 없으면 국가로 귀속되어 빠르게 개발되는 지역이었다고 한다. 그때 마을을 다 산 뒤로 그 마을에 흙으로 지은 집 말고는 더 이상 지어진 것은 없었다. 자연을 그대로 보존하고 그 마을에 살던 사람들도 그대로 살 던 곳에 살게 됐다. 이곳에서 나는 작물들은 모두 마을 사람들과 요가리트릿을 온 사람들의 식량으로만 쓰인다. 아유르베다 스파에서 창출되는 이윤은 마을에 현대식 병원을 짓고 운영하는데 쓰인다. 리트릿은 1년 중 6개월만 운영한다. 3개월은 우기이고, 3개월은 자연이 쉬게 하는 기간이다. 벽도, 전기도, 온수도, 인터넷도, 전화도 없는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로 늘 예약은 꽉 차있다. 30년 전, 이런 콘셉트가 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 주인이 대단했다. 돈을 벌고자 시작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럭셔리 리조트를 지었겠지. 하지만 사람들은 이곳에 큰돈을 지불하고 쉬러 온다. 돈벌이와 최대한 자연스러운 것이 공존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차를 좀 마셔봐. 정말 좋은 품질 차야. 스리랑카에서 이런 식의 차를 찾기는 힘들거든."
주인은 나에게 홍차를 내어주며 말했다. 스리랑카의 홍차는 전 세계 3대 산지 중 하나로 생산량이 매우 많지만, 그만큼 품질이 좋기보다는 '티백'용 홍차를 주로 생산해 양으로 승부하는 곳이다. 내어준 차는 눈으로만 봐도 기계로 만든 저품질의 차가 아니었다. 새싹 하나와 잎 하나를 손으로 곱게 따서 가공한 차였다. 그 차를 큰 주전자에 물을 펄펄 끓인 다음 잎을 왕차 넣고 더 팔팔 끓여 내줬다.
"아... 혹시 그렇게 말고 이렇게 한번 끓여볼까요?"
쓰디쓴 차를 삼키지 못하고 내가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스리랑카 여행에서 예상치 못한 인연으로 이어지게 게 되었다.
- To be continu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