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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Jun 18. 2021

생리통은 히스테리가 아닙니다.

14세 이후 인생의 반을 월경통으로 시달렸다.

 월경 기간 동안의 월경통, 그리고 그 직전의 월경전 증후군, 그리고 배란기의 배란통. 월경과 관련해 여성은 다양한 통증을 경험한다. 운이 좋아서, 정말이지 운이 좋아서 아무런 통증 없이 매 달 떨어지는 피만 보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신의 가호가 쭉 함께 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 내 주변의 대다수의 여성들은 월경과 관련한 통증을 매달 겪고 있다. 짧게는 이틀 정도, 길게는 나처럼 2주, 최근에 들은 지인의 경우 3주에 걸쳐 평소와 다른 고통 속에 산다. 


 내 월경통의 시작은 중학교 때였지만 고통의 크기는 20대 중반 정도부터 심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약을 한 알 먹는다고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 감기가 걸려도 웬만하면 병원을 가거나 약을 먹지 않았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뜨거운 차를 마셨던 내가 어느새부터인가 집에 애드빌이 없으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한 알로 시작했던 진통제는 하루에 8알을 다 먹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출장을 가면 기념품으로 진통제를 사 왔다. 손이 닿는 곳이라면 모두, 들고 다니는 모든 가방의 내부 주머니 속에도, 파우치 안에도, 코트 주머니 속에도 애드빌 두 알과 대형 생리대가 들어있었다. 립스틱을 안 챙겨 나가는 일은 있어도 진통제가 없이 외출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행히 배란통은 없었지만, 출혈이 시작하기 이틀 전부터 골반뼈가 서서히 밑으로 내려앉는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몹시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지만 어디가 아픈 건지 모를 정도의 애매한, 도대체 이게 허리가 아픈 건지 배가 아픈 건지 모를 몹시 모호하지만 기분나쁜 고통이 시작됐다. 이때부터 기분이 정말 말 그대로 '더러워'진다. 다행히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라면 좀 덜하지만, 신경을 온통 곤두세워서 집중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하는 날이라면, 또는 외부 미팅이 줄줄이 있는 날이라면, 그런 와중에 이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통증이 계속 느껴진다면 내 기분은 더할 수 없이 바닥을 쳤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출혈이 시작되면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시작됐다. 출혈이 시작되겠다 싶으면 미리 애드빌 두 알을 먹어 두었지만 삼십 대에 들어서서는 이 조차도 별 효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진통제를 과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먹지 않으면 그야말로 내 배꼽 아래와 배꼽 위가 분리되고 장기가 탈출해 흩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성인용 요실금 패드를 깔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출혈이 심했다. 나는 온 장기가 찢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피가 샐까 봐 걱정하며 그 패드 위를 벗어나지 않고 잠을 자기 위해 새우잠을 잤다. 그래도 매번 피는 내 속옷을 벗어났고, 나는 뼈마디가 녹는 것 같은 느낌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속옷과 이불 빨래를 했다. 


 내 근종은 자궁 안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은 것이 아니라 자궁 점막 아래를 비집고 자리를 잡은 '자궁 점막하근종'이다. 때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통증과 과다 출혈을 유발했다. 대부분 자궁근종은 증상이 없으면 그냥 지켜보기만 해도 되는, 어찌 보면 무해하다고도 할 수 있는 존재다. 나는 그런 상대적으로 무해한 근종에서 시작해 점막하 근종이 포도송이처럼 생겨났고, 자궁내막 세포가 떠돌다 자궁벽에 붙어 문제를 일으키는 자궁선근증도 함께 동반했다. 


 진통제로 통증을 어떻게든 줄여본다 하더라도 더 큰 문제는 과다출혈이었다. 일반적인 월경의 양이라고 표현하기엔 사람마다 그 양이 모두 재각각이지만, 어쨌든 나의 월경량은 월경의 범위를 한참 넘어서고도 남았다. 월경을 시작하고 3일 정도는 움직이기 어려운 정도로 피가 쏟아졌다. 산모용 오로 패드를 쓰더라도 2시간을 넘기면 안 됐다. 어느 순간부터 출혈 시작후 이틀은 휴가를 내지 않으면 안 됐다. 휴가가 어려우면 재택근무라도 해야 했다. 그나마 운이 좋아서 내 매니저와 팀원들은 모두 여성이었고 내가 유연근무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한 번은 팀원과 매니저와 함께 외근을 다녀오는 길에 식당에서 밥을 먹다 월경이 시작된 적이 있었다. 식당 바닥에 나는 그야말로 피를 쏟아버렸다. 동료 중 한 명은 나를 화장실로 데리고 갔고, 한 명은 바닥과 의자의 피를 처리한 뒤 편의점에 가 새 속옷과 물티슈, 생리대를 사다 줬다. 그 와중에 식당 주인에게 사과하는 것도 잊지 않았고, 수치심과 충격에 휩싸여 말을 잃은 나에게 별 일 아니라며 위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누구 하나 '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같은 즉각적인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예상이나 한 듯이, 위기상황 시나리오를 써 두기나 한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나는 그때 같이 있던 동료들의 빠른 대처가 없었더라면 아마 수치심에 괴로워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피의 연대'였다. 생리대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적이든, 원수든, 심지어는 좀비든 생리대는 빌려준다는 여성들끼리의 우스갯소리가 나는 진심이라는 것을 안다. 


 과다출혈로 인해 나는 늘 악성빈혈에 시달렸다. 성인 여성의 헤모글로빈 정상 수치는 12 이상이지만 매 달 월경을 하는 경우 10-12 사이에 들어오면 병원에서도 아주 크게 걱정을 하지는 않는다. 나는 일주일 동안 피를 쏟아내고 나면 헤모글로빈이 5.0, 심하면 4.8까지도 내려갔다. 직장 건강검진을 받고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돌아와서 수혈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를 몇 번 들었다. 일주일 간 피를 쏟아내고 나면 나머지 3주간 일주일에 한, 두 번 병원에 방문해 정맥 철분 주사를 맞아야 했다. 경구용 철분제를 먹는 것으로 해결해보려고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베노훼럼'주사는 건강보험 적용 약제라 비용 부담이 덜했다. '페린젝트'는 베노훼럼에 비해 4배 정도 더 빨리 철분 수치를 높여주긴 하지만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한 번 맞는데 약 20만 원 정도 비용이 들었다. 두 달 정도 한 달에 40만 원씩을 쓰다 그만뒀다. 그간 내 직업은 환자들이 비싼 약값 때문에 치료를 포기해서야 되겠냐며 정부에 건강보험을 촉구하는 일이었는데 막상 내 일이 되니 자꾸만 움츠러들고 포기가 빨라지기만 했다. 


 시간이 나는 대로, 없는 시간을 굳이 만들어서라도 베노훼럼을 일주일에 두 번씩 맞았지만 내 빈혈 수치는 8 이상 오른 적이 없다. 대부분 7에서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했고, 생리를 하고 나면 5로 내려갔다. 나는 심한 빈혈의 상태로 수년을 살았다. 문제는 내가 이런 내 몸의 상태에 익숙해져 버렸다는 것이다. 매일 피곤한 것은 현대사회를 사는 젊은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것이라 생각했다. 등산을 하기 어렵거나 유산소 운동이 힘든 것은 그냥 내가 운동이 부족하고 살이 쪄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내 입술색은 점점 핏기를 잃어 어두운 베이지색이 되어갔고 내 눈 밑 점막은 새하얗게 바래져 갔다. 나는 한 때 붉으스름했던 내 눈 밑 점막과 입술색의 존재조차 잊은 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얘, 립스틱 좀 발라. 아파 보인다"라고 했을 때, 나는 '아직도 저렇게 시대에 뒤처진 말을 한다고?'라고 생각하기만 했지 내가 진짜 심각하게 아프다고 생각을 '안 했다.' 못한 게 아니라 정말 안 한 것이다. 주사를 맞으면 되니까, 약을 먹으면서 주사를 동시에 맞으면 괜찮으니까, 통증이 심하면 휴가를 내면 되니까, 나는 정말로  내가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가 만약 역류성 식도염이 심해서 매일같이 고통을 느낀다면 어땠을까? 위염이나 관절이 아픈 병이었다면? 메니에르나 이명이었다면? 그래도 나는 내 병을 외면했을까? 내 악성 빈혈의 원인이 자궁이기 때문에, 그리고 적출 외에 별 다른 치료법이 없다고 하니 나는 그냥 없는 일처럼 지낸 것이었을까? 내가 빈혈이 심하다고 주변 친구들이나 회사 사람들에게 털어놓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죽을병이 걸린 것처럼 심각하게 얘기를 하지 않아서일까? 돌아온 반응은 '아, 그래?' 정도가 대부분. 그 와중에 '네가? 비련의 여주인공이야?' 정도의 반응도 있었다. 어쨌든 나도 그렇고 듣는 이도 그렇고 헤모글로빈 수치 5 정도의 빈혈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왔다. 


 내가 베노훼럼을 맞으러 다니던 동네 병원의 의사는 빈혈 주사를 맞기 시작한 지 3년이 넘어가자 나에게 최종 선고를 내렸다. 

 "오늘까지 주사 처방하고, 다음부터는 못 놔드려요. 의사의 양심에 어긋납니다."

 나에게 애드빌과 함께 생명줄과 같았던 빈혈 주사를 놓지 않겠다니. 이 의사는 제정신인 건가? 놀란 나는 되물었다.

 "왜요?"

 "분명한 원인이 있는 걸 아는데, 터진 댐을 제가 계속 손바닥으로 막아주고 있는 거잖아요. 지금 이대로 가면 심장에 무리 와서 심장마비로 내일 쓰러진다 해도 이상할 게 없어요. 산부인과 가세요. 이젠 정말 가셔야 돼요."

 동네병원 가정의학과 의사는 나를 앉혀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울어야 할 사람은 난데, 오히려 눈시울이 붉어진 건 선생님이었다. 당장 다음 주부터 주사를 못 맞는다는 생각에 난 경황이 없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생명의 은인이다. 진료실에서 나와 마지막 주사를 맞고 집에 들어간 뒤, 그 진료실에서의 짧은 대화가 내 안에서 자꾸 나를 괴롭혔다. 내가 뭔데 의사의 양심을 팔게 했는가, 그 사람은 뭐가 아쉬워서 돈벌이를 마다하고 나를 큰 병원에 보내려는가. 내 댐은 정말 터져버린 건가. 나는 왜 터진 댐을 손바닥으로 움켜쥐고 있는가... 결국 나는 산부인과 의원을 거쳐 대학병원에 가게 됐다. 


 월경통으로 그렇게 고통받으면서도, 생리 휴가가 멀쩡하게 있는 회사를 다녔으면서도 나는 한 번도 생리휴가를 쓴 적이 없다. 연차는 그냥 웹사이트에서 신청하면 그뿐이었지만, 생리휴가는 별도의 신청서에 매니저 서명을 받아야 했다. 귀찮은 것은 잘 못하는 성격이라 한 번도 쓴 적이 없긴 했지만, 왜 웹사이트 휴가 신청 카테고리에 생리휴가를 추가하지 못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그리고 그냥 매니저 서명을 받으면 그뿐인 일을, 왜 또 움츠러들고 괜히 위축됐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른 이유로 휴가를 써야 할 때는 팀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상의를 하다가, 왜 생리 때문에 쉬어야 할 때는 자리 가까이로 가서 귀에다 대고 속삭여야 했는지도. 


 그나마 나는 운이 좋아 여성 동료들과 일을 해 왔지만, 보수적인 분위기의 회사에 남자 상사를 두고 있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처참하다. '생리 참았다가 화장실 가서 하면 안 돼?'라는 말을 남자 친구에게 들었다는 유명한 이야기까진 아니더라도, '약 먹어' '매달 날짜가 바뀌는 것 같아' '이래서 여자는...'같은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은 월경통 앞에 떳떳할 수 없다.  화가 나고 억울하지만 이를 악물고 참는 편이 된다. '거봐, 참을 정도의 고통이잖아.'라고 말하고 싶은가? 실제로 생리 곤란증이 있는 여성이 생리를 할 때 자궁 수축 압력이 150~180mmHg라고 한다. 분만 시 자궁수축의 압력이 120mmHg인 것에 비해 더 극 심한 통증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통증의 발생 간격이 분만시 10분에 세네 번인 반면 생리 곤란 여성의 경우 10분에 네다섯 번이다. 크기도 간격도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다. 모든 생리하는 여성의 통증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처럼 질병이 있어서 생리 중 통증이 심한 경우는 매달 분만할 때 느낄 정도의 통증을 느끼는 것이었다. (출처: 니나 브로크만, 엘렌 스퇴겐 달 <질의응답>) 이렇게 생리 중 자궁의 움직임을 파악하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코로나가 발생한 지 1년쯤 지나 백신이 개발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여성 생식기 건강에 있어서 만큼은 언제나 연구가 턱없이 부족하다. 20세기까지 생리통을 비롯한 생식기 건강과 관련한 다양한 통증과 증상들은 의학계에서 조차 '건강 염려증이 있는 여성의 히스테리'로 해석됐다. 


 히스테리가 아니다. 참을 수 있을 만큼의 고통도 아니다. 초콜렛 케익을 먹는다고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몇 년을 참았지만 참을 수 있는 고통은 절대 아니다. 매달 반복되는 고통이기에 만성화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내 삶을 갉아먹는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나는 그나마 운이 좋아 회사 동료의 배려를 받았고, 동네 의사의 단호한 판단이 있었으며, 이후 수술을 결단하게 된 또 다른 의사의 말들이 있었다. 출혈양이 늘고 고통이 심해졌으면서,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됐으면서, 한 달에 한 주는 피를 쏟느라, 나머지 날들은 그 피를 보충하느라 써야만 했던 젊은 시절의 나를 요즘 매일 보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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