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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Jun 09. 2021

신비롭지 않고 건강하고 싶습니다

처녀막은 막이 아니라질 주름이에요

성관계 경험 있으세요?

 산부인과 진료를 받으면서 가장 많이 들어야 했던 말이 아닐까 싶다. '많이 힘드셨겠어요.' 같은 공감은 물론 아니고, '이 병의 원인은 이 것입니다.'도 명확한 원인 규명도 아니요, '앞으로는 이런 걸 한번 해보세요' 같은 생활습관 개선의 권고도 아니다. 오히려 병원을 다니면서 이런 말들은 듣지 못했다. 성관계 경험의 여부가 뭐 그리 큰 대수냐 싶을 수도 있지만, 경험이 있어도 없어도 어쩐지 불편하고 쑥스럽게 느껴지는 질문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때문에 물어보는 간호사도 굳이 더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어야 하는 애를 써야 하고, 그 질문을 받으면 대답을 얼른 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것은 환자 측도 마찬가지다. 대학병원의 남자 교수에게 진료를 받을 때는 세 명쯤 되는 레지던트나 인턴들이 옆자리에 앉아있는 앞에서 쩌렁쩌렁하게 “성관계 경험 있으세요?”라고 묻는 질문에 "네!!"하고 얼른 대답했어야 했다. 여전히 많은 여성들은 이 상황이 불편해서라도 산부인과에 가는 것을 꺼리는 경우도 있다. 네이버 지식인이나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엄마랑 같이 산부인과를 가야 하는데 이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어 산부인과 가기를 미루고 있다는 글도 종종 볼 수 있다.  


 병원에서 성관계 경험 여부를 묻는 의도는 분명하다. 성관계 경험이 없으면 질 초음파 검사처럼 질을 통해서 하는 검사나 의료처치에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질 초음파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질 입구에 자리 잡은 '처녀막'이 손상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접수할 때 한 번, 검사 전에 한 번 꼭 문진을 한다. 성관계 여부를 묻는 질문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곧 '질 삽입을 통한 성관계 경험'을 뜻하게 된다. 기타 다른 방식의 성관계 경험은 산부인과에서 문진할때 만큼은 중요하지 않다. 


 '처녀막'이라는 명칭 때문에 이 신체조직이 음식을 보관할 때 쓰는 플라스틱 랩처럼 막처럼 생겨 질을 막고 있다거나 성관계 경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징표인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성관계 경험이 없는 여성의 질을 막이 막고있다면 도대체 월경혈은 어떻게 몸 밖으로 배출되는 것일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다면 이런 쓸데없는 오해는 방지할 수 있다. 또한, 한 번만 제대로 검색을 해보면 '처녀막'이라는 조직이 사람마다 생긴 모양도 크기도 모두 다르며, 애초에 없는 사람도, 성관계를 포함한 외부의 자극에도 출혈이 없는 사람도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승마나 자전거 타기를 포함한 운동이나 외부 자극으로 충분히 손상될 수 있기도 하다. 21세기로 들어선 지 한참이나 지난 지금, 첫 성관계 때 처녀막이 '뽕' 또는 '딱' 소리를 내면서 찢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제 제발 부디 없었으면 좋겠다. 여성의 몸은 새로 산 통조림이 아니다. 처녀막이 있다고 해서 신비하고 손상됐다고 해서 신비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몸은 그냥 몸이다. '막'이 아닌 질 입구에 있는 '주름'의 형태인 점을 감안해 '질 주름'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면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공식 명칭이 '처녀막'이라는 점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어쨌든 이놈의 '처녀막'이 뭐라고, 환자가 처녀막 손상 여부와 상관없이 질 초음파를 원한다는데도 병원은 거부한다. 병원의 의사결정 과정은 매우 보수적이다. 병원 측의 과실로 문제가 생기는 일을 하나도 만들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우리나라는 환자와 병원의 정보 비대칭이 매우 심한 구조이고 의사의 권위가 매우 높기도해서 의료소송에서 환자가 승소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은 본인들의 과실을 만들거나, 적어도 그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물론 이 과정이 잘못됐다 생각하지는 않는다. 신체 일부가 사소하게라도 다칠 위험이 있다면 더 안전한 쪽으로 의료행위를 시행하는 것도 병원이 해야 할 당연한 의무다. 다만, 환자가 원한다는데도 질 초음파를 안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성경험이 없는 환자가 초음파 검사가 필요할 경우 복부 초음파 또는 항문 초음파를 시행하게 된다. 복부 초음파는 정밀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의사가 항문 초음파를 권유한다. 항문 초음파는 질 초음파보다는 조금 정확도가 떨어질 수 있지만 복부 초음파보다는 정확도가 높다고 한다. 지인 중 한 명은 성관계 경험이 없지만 생리 컵을 오래 사용해 왔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질 초음파는 안되고 항문 초음파를 하자고 했다고 한다. 도대체 왜? 질은 안되고 항문은 되는 이유는 뭘까? 항문 초음파 과정에서 항문의 손상은 가능성이 전혀 없는가? 항문이 질에 비해 신비롭거나 신성하지 않은가? 무엇보다 환자 본인이 괜찮다는데? 환자 본인이 가장 정확한 진단이 가능한 방법을 원하고, 이에 수반되는 위험을 감수하겠다는데 무엇이 문제라는 걸까? 의료 과실을 입증하기 둘째가라면 서러운 우리나라지만, 실제로 질 초음파 과정에서 처녀막 손상이 의료 과실로 인정돼 피해보상을 한 사례가 있다고 한다. 그 중 한 사례는 환자가 검사 과정에서 처녀막 손상이 있어도 괜찮다는 동의서를 쓰고 진행했지만 이후 가족이 소송을 한 사례라고한다. 이쯤 되면 '처녀막' 사수가 질병 진단의 정확도에 우선하는 것인가 하는 내 의심이 오히려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산부인과 치료를 받으면서, 그리고 이 사실을 주변인들과 공유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여성 스스로도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처녀막에 대한 신화인지 오해인지 모를 덧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그리고 본인의 몸을 오히려 남보다도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사람마다 다르고 시대도 바뀌어 요즘의 10대, 20대 사람들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또래나 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그런 경향성은 다분하다. 의지를 가지고 관찰하지 않으면 볼 일이 없는 내 신체부위기에 나보다 남이 더 많이 보고 많이 안다. 그리고 이 몸속 신체기관의 있지도 않은 '신비함'을 지키기 위해 월경 중에도 신체 활동하는데 불편함이 적은 탐폰이나 생리컵 사용을 주저하기도 한다. 마찬가지 이유로 성관계 경험이 없는 여성들은 산부인과 방문을 미루거나 꺼리고, 그 높은 문턱을 넘고서도 최선의 정확도가 확인된 방법으로 검사를 받지 않거나 받지 못한다. 


 무엇이 중요한가. 정말 무엇이 중한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내 건강과 관련된 의사결정은 내 건강을 가장 우선에 두고 내려야 한다. 있지도 않은 '처녀막'에 대한 환상이나 생기지도 않은 아이를 지켜낼 일이 아니라 정작 지켜야 할 것은 내 모든 장기의 건강이다. 자궁적출을 했으니 이제 늦은 거 아니냐고? 나에겐 아직 지켜야 할 건강한 난소와 질, 유방이 있다. 잘 몰라서, 적극적으로 알아보지 못해서, 또 교육받지 못해서 최선이 아닌 판단을 했던 과거를 기록하며 앞으로의 건강을 지켜내는데 사력을 다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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