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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Jun 30. 2021

아이를 낳을때까지치료를 미루라고?

산부인과치료의 제1목표는 아이를낳을 수 있는 몸을 만드는 것인가?

 동네 산부인과에서 자궁근종을 진단받은 이후 큰 대학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시작했을 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아이를 낳을 몸'이 되어있었다. 당시 나를 담당하던 교수는 난임 분야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교수님이었다. 당시 대학병원 산부인과 과장이었기 때문에 난임 환자만 보는 것은 아니었고 모든 산부인과 질환에 전문성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세가 있었다. 하지만 난임 전문가라서 그랬을까? 첫 진료에서 교수님은 나에게 "일단 있어보자"라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내가 어떻게든 애 낳게 해 줄게. 나만 믿어라."


 몸의 어딘가가 아파서 병원 치료를 받을 때, 그 치료의 목적은 환자 생명의 연장과 삶의 질 개선에 있다. 미용을 목적으로 하는 성형수술이나 피부과 치료 같은 것들을 제외하면 그렇다. 환자 당사자가 이 질병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잠재적인 건강상의 위험이나 삶의 질 저하를 개선하는데 눈부시게 발전한 현대의학이 역할을 톡톡히 한다. 


 현대 의학은 고도로 발전됐다. 이제는 암을 치료하는 약제들이 암세포만을 타깃 하는 것에서 한참을 지나, 암세포에 직접 독성 약물을 작용시켜 암세포를 사멸시키거나 몸속에 면역체계를 바꿔서 내 몸의 면역 세포들이 암세포를 죽일 수 있도록 작용하기에 이르렀다. 암의 종류는 고도로 세분화되어 유방암, 대장암처럼 암 원발부위의 명칭을 따서 이름 짓는 것에서 벗어나 어떤 유전자 변이로 인해 생긴 암인지를 설명하는 이름을 갖게 됐다. 


 하지만 이 눈부신 현대의학의 발전 속도에 가장 못 미치는 분야 중 하나가 산부인과 질환이다. 우리나라 35세 이상 여성의 40-50%에서 자궁근종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자궁근종'을 적응증으로 하는 약제는 하나도 없다. 내가 처음 대학병원에서 자궁근종을 진단받았을 때, 자궁근종을 적응증으로 하는 경구약제가 있었다. 나는 그 약제의 시판 후 조사 프로그램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아 9개월간 약물치료를 하며 조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시판 후 조사 프로그램은 환자에게 이익을 주는 것은 전혀 없고, 그냥 그 약제가 임상연구결과에서 보인 대로 효과적이고 안전한 지를 추가로 살펴보기 위한, 제약사의 보고의무에 따라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다. 나는 가뜩이나 기다림의 연속인 대학병원 치료를 받으면서 추가로 시판 후 조사 보고를 위해 병동을 옮겨 또 한 번의 기다림과 1분 상담을 거쳐야 하는 수고를 기꺼이 했다. 담당 교수의 권유였기 때문이다. 해당 약제는 나에게 아무런 효과를 가져다주지 않았고, 다행히 치료기간 동안 다른 이상반응도 없었다. 그러나 해당 약제는 결국 심각한 간독성 부작용으로 인해 허가가 취소됐고 세상에서 영영 사라졌다. 


 그 이후로 7-8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자궁근종'을 치료하기 위한 약제는 없다. 호르몬을 조절하는 피임약이나 호르몬을 직접 주사하는 것으로 대신 치료하고 있긴 하지만, 나에게는 역시 아무런 효과가 없거나 오히려 근종의 크기를 키우기만 했다. 자궁근종뿐 아니라 다낭성 난소증후군, 자궁선근증, 자궁내막증 등 대부분의 산부인과 질환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결국 자궁이나 난소 질병의 치료가 자궁적출이나 문제가 되는 부위를 제거하는 수술법이 대부분이다. 문제 부위만 똑하고 떼어낼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적출이나 자궁벽 손상이 많이 예상되는 수술일 경우 수술을 하자고 제안하는 것도 들어보기 힘들다. 미혼이거나 가임기 여성의 나이 범위 안에 있으면 수술을 제안하기보다 우선 일 년에 한 번 질병의 진행상황을 지켜보자고 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인다. 


애를 낳고 나면 괜찮아질 수도 있다.

 네? 진짜로요? 진짜로 애를 낳으면 괜찮아지는 건가요? 15센티가 넘는 자궁근종이 뿅! 하고 사라지기라도 하는 건가요? 무엇보다도, 제 자궁이 이 상태인데 임신이 가능하긴 한가요? 괜찮아 질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미래의 가능성과 낳고 싶지도 않은 아이에 제 현재 건강을 담보해야 하는 건가요? 진료실에서 쏟아냈어야 할 말들은 삼키고 삼켜져 쓴 침이 되어 내려갔다. '애 낳고 나면 괜찮아진다'는 말은 비단 나만 의사에게 들은 말이 아니다. 생리통이 있거나 산부인과 질환이 있는 사람들, 그리고 유방에 낭종이나 암이 있는 경우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말이다. '출산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은 곧 '스트레스가 병의 원인이다'는 말과 비슷하게 들린다. 현대 의학으로 더 이상 원인을 찾아 줄 수도, 해결책을 줄 수도 없을 때 한다는 그 말 말이다. 


 자궁근종이나 난소종양이 아무런 통증을 일으키지 않고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킬 확률도 낮다면 수술이 필요 없지만, 나처럼 매달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의사로부터 자궁 적출 수술을 제안받기까지 8년이 걸렸다. 내가 아이를 낳을 계획이 내 인생에서 없다는 것을 밝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나중에 되면 또 생각이 바뀔 수 있으니까', '그래도 애는 하나 낳아야지', '그래도...', '그래도...'. 의사를 포함해 부모님과 주변인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스스로 조차 '그래도'라는 말에 나를 가뒀다. 8년간 나는 '그래도' 안에서 피를 흘리고 빈혈 주사를 맞았다. 늘 피곤했고 짜증이 났고, 피가 지워지지 않는 옷과 침구를 내다 버렸다. 숱하게 보내버린 지치고 짜증 나는 시간, 내 심장 건강을 담보로 했던 시간들은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애 낳을 때까지 지켜보자'거나 '애를 낳고 나면 괜찮아진다'거나 '애를 안 낳아서 이런 병이 걸렸다'는 말을 의사에게 듣고 싶지 않다. 출산 경험 여부를 병의 원인으로 설명하게 된 것은 자궁이나 유방에 생기는 문제들이 여성호르몬의 과다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임신과 모유수유 기간 동안 생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즉, 그 기간 동안 여성호르몬 분비가 줄어들어 문제 되는 질병 발생의 위험을 낮출 수 있다는 것. 이런 현상을 두고 보통 단순하게 '애를 안 낳아서 그렇다'는 말로 설명이 된다. 그런데 그런 질환의 발생을 고작 2년 정도의 생리를 안 하는 것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화학적인 호르몬 조절(약이나 주사제)로 왜 이 효과를 얻을 수 없는가? 임신, 출산이 여성의 몸에 주는 부정적인 영향은 왜 종합적으로 고려되지 않는가? 아이 셋을 출산하고 나서 자궁근종이 생긴 경우는 어떻게 설명이 되는가? 임신과 출산은 심장마비나 우울증, 근골격계 건강을 위협한다. 미국에서의 임신과 관련된 사망률은 계속해서 증가세를 보이며, 그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CDC, Pregnancy Mortality Surveillance System). 임신 출산 과정에서 건강에 이상이 생기는 것도,  불균형한 호르몬으로 인해 여성질환이 생기는 것도 모호한 확률에 의한 것인데, 생식기 질병과 출산을 함께 다루는 산부인과에서 조차 왜 나는 많은 것이 생략된 채 '아이를 낳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느니 '아이를 낳을 때까지 (건강을 담보로) 기다리라'는 얘기를 듣는 것일까. 왜 여성의 몸이 아직까지도 출산을 기준으로 설명되고 진단되며 치료되는 걸까. 임신과 모유수유가 호르몬 불균형을 일시 멈춰줄 수 있다면, 애초에 그 불균형의 원인은 무엇인가? 남성의 경우는 어떤가? 남성 호르몬 불균형이 성욕이 아닌 출산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서 논의되는가?


 진단과 수술 후 나는 나에게 왜 이런 이상하고도 괴기한 병이 생겼는지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나는 내 또래들도 출산 경험이 없던 나이에 진단받았다. 과체중이긴 했지만 비만은 아니었으며, 담배는 피우지 않았고 술도 몸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레토르트 식품을 입에도 안 댄 것은 아니었지만 집에서 건강한 요리를 해 먹는 것을 즐겼고, 편식하지 않았다. 회사를 다니며 스트레스를 받긴 했지만, 금방 풀어냈고 일상생활을 문제없이 했던 편이다. 호르몬 불균형과 자궁근종의 원인을 아무리 뒤지고 찾아봐도 이렇다 할 이유 하나 찾지 못했다. 그러다 또 어느 날은 기사나 논문에서 보이는 모든 작은 요인들이 다 내 얘기 같아 괴로운 날들도 있었다. 그때 내가 컵라면을 먹어서 그런가? 야근을 너무 많이 했나? 플라스틱 컵에 담긴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나? 살이 너무 쪄서 그런가? 고민의 끝엔 늘 답이 없었다. 여러 명의 의사를 거치는 동안도 마찬가지였다. 


 여성 생식기에 대한 의학적 연구는 19세기 미국 흑인 노예의 희생에서 시작됐다. 당시 여성 노예의 '생산성 관리', 즉 최대한 더 많은 자녀를 출산해 노예를 생산해내는 몸을 만드는 데 목적을 두고 백인 남성들에 의해 연구된 것이 산부인과 연구의 시작이었다. 여성 생식기와 관련한 의학적 연구가 더딘 이유로 의료계나 연구를 지원하는 업계의 의사결정자들이 남성이었다는 점이 지적된다. 나는 자궁을 적출했기 때문에 앞으로 자궁에 병이 생길 확률이 0퍼센트가 됐다. 내 난소는 제기능을 하고 있다. 더 이상 임신에 대비해 자궁벽을 두껍게 만들었다 허물었다를 반복하지 않아도 돼 여러 면에서 위험 부담은 줄었다. 그러나 또 어떤 이유로 다시 호르몬에 불균형이 생겨 난소나 유방에 문제가 생긴다면, 나는 또 결혼을 하지 않고 출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유수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을 의사에게 듣게 될까? 흑인 노예의 가임력 유지를 위해 의료연구를 한 지 한 세기도 훨씬 더 지난 지금, 낙태가 더 이상 죄가 아닌 정상 사회에서, 여성들이 진료실에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 사람으로만 설명되는 것은 이제 정말 곤란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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