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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Jul 07. 2021

전신마취 수술 앞에서,1인 가구 올림

수술동의서는 사실 본인이쓰는 거다. 보호자는필요 없다.

 동네 산부인과 의사의 반 강제적인 대학병원 외래 진료 예약에 못 이기는 척 큰 병원으로 갔다. 진료 이력과 이전 병원에서의 초음파 자료를 보고, 그날 바로 MRI를 찍었다. 한 주 뒤 외래를 예약하고 다시 진료실 책상 앞에 의사와 마주 앉았다. 의사는 큰 모니터에 내 MRI 결과를 띄웠다. 그리고 눈썹을 찡그리고, 말을 하려다 말고 한숨을 길게 쉬었다. 

 "이게 지금 MRI 결과인데요, 하..."

 말을 쉽게 잇지 못하는 의사 뒤로 내 하복부 MRI 사진이 보였다. 흑백으로 된, 뭐가 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는 추상화 같은 사진이었지만 비전문가인 내 눈에도 '아 이건 아니다'싶었다. 의사는 MRI 결과를 설명했다. 

 "지금 수술을 해야 되는데, 수술을 그냥 혹 제거만 하는 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이고... 어차피 여기 자궁 내벽 안에 이렇게 들어가 있고, 크기가 워낙 크고... 위치가 이래 가지고... 하이푸도 해달라고 하면 할 수는 있는데 어차피 자궁벽이 다 손상될 거라 가지고..."

 "선생님 생각에 가장 좋은 옵션이 뭔가요."

 "자궁 적출이죠. 지금 솔직히 그 방법 밖엔 없어요."

 "폐경이 얼마나 빨리 오나요"

 "1년이요. 여자를 여자답게 하는 건 자궁이 아니에요."

 "해주세요. 적출."


 나는 이미 8년 전 대학병원에 갔을 때부터 혹만 제거할 수 없는 부위에 근종이 생겼다는 것을 들었던 터라 결정을 빨리 내릴 수 있었다. 아이를 낳으면 괜찮아질 수도 있다는 말에 8년의 세월을 갖다 바친 것이 억울해서라도 나는 가능한 한 빨리 수술 날짜를 잡아달라고 했다. '여자를 여자답게 하는 것은 자궁이 아니다.' 나는 이 명료하고도 당연한 이야기를 왜 알면서도 믿지 않았을까. 왜 의사 가운을 입은 사람이 나에게 그 말을 해줄 때까지 기다렸던 걸까. 


 수술 날짜를 잡고 수술에 필요한 것들을 상의하기 위해 수술 상담실로 갔다. 외래진료실이 줄지어있는 복도 끝방은 수술 상담실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수술 전에 해야 할 일들과 수술에 필요한 것들, 수술 날짜 조율 등 수술과 관련한 준비과정을 도와주는 선생님이 따로 있었다. 수술에 필요한 것들을 정리한 리플릿을 주면서 담당 선생님은 나에게 원하는 수술일정과 그전까지 해야 할 일들을 차분히 설명해줬다. 병원 내에서 전신마취에 대한 교육도 듣고, 기본적인 피검사도 다시 해야 하고, 몇 가지 엑스레이도 찍어두어야 한다. 전신마취 수술을 하기에 내 몸이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그중에 몇 가지는 수술 날짜에 임박해서 해야 하는 것들이 있고, 어떤 것들은 미리 해두어도 되는 것들이 있다. 스케줄은 최대한 개인 사정에 맞춰 조율해줬다. 


 "가장 빠른 수술 날짜는 아마 이 날이 될 거예요. 근데 지금 환자분 빈혈 수치가 5 정도인데, 이게 10을 넘어야 수술이 가능하거든요. 12까지 되면 제일 좋고요. 우선은 이걸 좀 목표로 내원을 해서 주사 치료를 받으셔야 되고요... 이게 10까지 안되면 수술이 안될 수 있거든요..."

 수년간 빈혈 주사를 맞으며 내 양쪽 팔과 손목의 핏줄은 잘 잡히지도 않는 지경이 됐다. 매번 주사를 맞거나 건강검진에서 채혈을 할 때 간호사 선생님들은 없는 핏줄에 주삿바늘을 꽂느라 몇 번이고 진땀을 흘려야 했다. 간호사도 나도 잘못한 건 없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늘 미안하고 곤란한 상황이었다. 나는 이 난감한 일을 이 멀고 복잡한 곳에 와서, 그것도 짧은 기간 내에 여러 번을 겪고 싶지 않았다. 집 앞에 가던 1차 의료기관에서 주사치료를 하겠다고 했고, 검사 결과를 수술 2일 전까지 확인해서 전달하겠다고 합의했다. 가정의학과 선생님에게 수술 날짜와 목표를 설명했다. 의사와 간호사는 수술을 결심한 것에 대해 함께 기뻐하며 최선을 다해 컨디션을 만들어보자고 했다. 팔꿈치 아래로는 도저히 주사가 안 들어가서 팔뚝 깊숙한 곳에 바늘을 찔러 넣어야 했다. 결국 내 빈혈 수치는 12까지는 가지 못했고 9 정도에서 그쳤다. 가정의학과 선생님은 나에게 '어차피 수혈해줄 거니까 겁먹지 말고 가서 그냥 수술해달라고 하세요.'라고 했다. 뭐든 안 되는 건 없는데, 나는 병원에서 시킨 모든 것을 완벽히 해 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던 것 같다. 12라는 숫자에 집착해서, 내가 이걸 달성하지 못하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선생님의 말처럼 빈혈 수치는 9에서 그쳤지만 수술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가장 이상적인 수치가 12인 것이지 그 이하여도 가능은 하다. 수술 도중 출혈이 많은 경우를 대비해 수혈에 대한 동의도 미리 해 둔다. 


 두 번째 문제는 역시 수술동의서의 작성과 보호자 동반 여부였다. 드라마 같은 데서 얼핏 본 걸로는 수술동의서를 작성할 보호자를 동반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처럼 일정을 미리 잡고 수술을 하는 경우 환자 본인이 수술동의서에 서명을 하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의료법 제24조에서는 사람의 생명 또는 신체에 중대한 위해를 발생하게 할 우려가 있는 수술 등을 하는 경우, 환자(환자에 의사결정 능력이 없는 경우 환자의 법정대리인)에 설명하고 서명으로 동의를 구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수술동의서를 누가 작성하는지, 그리고 이 내용을 누구에서 설명하는지는 법령이 아닌 각 병원의 내규에 따른다. 대부분의 병원은 환자가 성인의 경우, 그리고 인지능력에 문제가 없는 경우, 날짜를 미리 정해두고 수술을 하는 경우 환자 본인에게 수술동의서 내용을 설명하고 서명을 받는다. 이때 보호자가 함께 수술 동의서의 내용을 듣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환자 본인의 동의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만일을 대비하자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환자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거나, 수술 후 인지장애가 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던지 하는 경우를 고려한 것이다. 본인이 수술동의서 내용을 인지하고 서명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계가족 보호자가 수술동의서를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술을 포함한 의료행위를 거부하는 것은 의료법 15조에 의거, 진료거부 금지에 해당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환자가 되면 병원과 의사 앞에서 약해진다. 그냥 마냥 을이 되는 기분이다. 가족을 데리고 오라는데, 거기서 바득바득 싸우면서 나 혼자 또는 내 친구를 대리인으로 세우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쉽사리 뱉어지지 않는다. 수술받으려면 부모님 모시고 오라는데 거기서 내가 의료법 24조니 15조니를 어떻게 외치겠는가. 


 나는 혼자 나와서 산지 15년이 된 비혼 1인 가구의 가장이다. 내 보호자는 나 스스로라고 생각하고 산지 10년쯤 된 것 같다. 우리 가족이 누가 봐도 너무 화목하고 팀워크로 똘똘 뭉친 대단한 가족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이나 형제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경제적, 정서적으로 독립한 이후에 가족들에게 딱히 무언가를 크게 부탁해 본일도 없었다. 나는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자립해 스스로의 삶을 꾸리고 싶었고, 무엇보다 부모님을 걱정시키는 일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떨어져 살다 보면 더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내가 감기에 걸려 목이 잠긴 목소리만 들어도 세상 근심 걱정을 다 짊어지고 사는 것 같은 부모님을 보면 아프다는 소리는 입 밖으로 떨어지지가 않았다. 다 큰 자식이 감기몸살 걸린 정도로 부모님께 앓는 소리를 하는 것도 그냥 싫었다. 


 엄마는 8년 전, 내가 자궁에 혹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 대상포진으로 고생을 했다고 했다. 객관적으로 두 가지 일의 상관관계가 어떻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나 때문에 걱정이 많아진 엄마가 면역력이 떨어져 병에 걸린 것만 같았다. '아니 그러길래 대상포진 백신은 왜 안 맞아?' 하면서도 '아 그냥 말하지 말걸'하는 마음이 컸다. 나는 엄마가 몸살에 걸려 누워있다고 하는 날에는 내려가서 약이라도 챙겨드리지는 않으면서 괜히 신경이 쓰여 일에 집중을 못했다. 엄마와 나는 같은 마음이었겠지. 나는 엄마가 이렇게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을 때 나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면, 자괴감에 괴로워 어쩔 줄을 몰라할 것이다. 십년 전 쯤, 엄마가 눈에 이상이 생겨 시야가 흐릿해졌을 때, 아빠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병원을 찾아다니며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치료가 다 끝나고 난 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데 나는 퇴근길에 그 전화를 받으며 망원 시장 앞에 주저앉아 한참을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렸다. 막상 그때 엄마가 당장 병원에 나를 데리고 가달라고 했더라면, 나는 아마 회사에 휴가 일정을 조정해야 하니 기다리라고 했을지 모른다. 그래도 그 전화를 받는 동안은 병원이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겁 많은 엄마가 혼자 여기저기 물어보며 치료를 다녔을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득해졌다. 나는 그때 나에게도, 가까이에 있던 오빠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 혼자서 모든 걸 해치운 엄마가 원망스럽고 답답했다. 그런데 나도 엄마 딸이었다. 엄마를 쏙 빼닮은.


 멀리 시골에 있는 엄마가 서울에 온다는 것만으로도 엄마도 나도 스트레스였다. 혼자서는 기차를 타본 적도, 택시를 타본 적도 없는 사람이, 복잡한 대형병원에서 딸의 보호자 노릇을 한다는 게 상상이 안됐다. 이 와중에 아빠는 보호자의 옵션으로 생각도 안 한다는 사실에 또 화가 났다. 무엇보다 나이 든 부모님에게 이런 일을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 허탈하고 난감했다. 엄마와 딸의 관계는 도대체 왜 이렇게 복잡해야만 하는 것일까. 알고 보면 서로를 제일 많이 걱정하고 위해주는데, 서로를 자꾸만 보호하려고 하다가 아무것도 보호하지 못하고 마는 바보 같은 관계. 엄마는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온갖 드라마틱한 시집살이와 남의 조상에 효도하는 일들을 하느라고, 그저 치열하게 살아내는데만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나는 그런 엄마가 가여워 자꾸만 보호해야 할 사람으로 생각하려고 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엄마에게 내가 자궁적출을 하게 됐으니 와서 내 병시중을 들어달라 말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강한 사람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세상 제일가는 드라마 퀸에 눈물도 걱정도 항상 맥시멀로하는 우주 최고 맥시멀리스트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걱정거리를 안겨줄 수가 없었다. 수술 상담실 선생님에게 다른 옵션을 달라고 했다. 원가족이 서울에 오기 어려운 상황이니 다른 옵션을 달라고.

 "가족이 오시기 어려우세요? 근데 하루는 오셔야 되는데... 동의서는 직접 쓰시면 되는데, 전신마취 수술은 응급상황이 생길 수가 있어서..."

 거듭 되묻는 나에게 거듭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파트너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딱히 다른 옵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만나던 사람이 있었지만 법적 위임장을 써서 병원을 설득할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보호자가 올 수 없는 게 지금 제일 문제이신 거예요? 입원기간 동안은 다른 사람이 오셔도 돼요. 수술 하루만 와계시면 되는데..."


 일단은 연락해보겠다고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두 시간쯤 병원에 있다 왔는데 온 몸에 기운이 빠졌다. 침대에 누웠는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왜 도대체 멀쩡한 부모형제에게 부탁이란 걸 못해 이러고 있는가, 자괴감이 몰려왔다. 나이 들어서도 캥거루 비혼으로 사는 사람도 많고, 독립해서 혼자서 잘 살면서도 필요할 때 원가족에게 온갖 부탁을 다 할 수도 있고, 삶의 형태와 방식은 다양한데 왜 나는 혼자서 '독립병'에 걸려 이 난리인 것인지 짜증이 치밀었다. '나 때문에' 힘든 부모님이 싫고 '나 때문에' 일과 아이들 육아 일정을 바꿔야 하는 오빠가 싫었다. 어떠한 '민폐'도 안 끼치고 살고 싶었는데, 기어이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차라리 내가 선택한 가족이 있었더라면, 그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든 '황선우-김하나'작가님처럼 서로를 가족 구성원으로 여기는 친구가 되었든, 누구라도 있었더라면 나는 그 사람을 내 법적 대리인으로 위임하고 이를 받아줄 것을 병원에 요구했을까? 사실 내가 이런 요구를 한다고 했을 때, 병원이 이를 받아주지 않는 것 또한 법적으로 위법한 사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딱히 대리인으로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냥 지금 혼자였고, 그런 삶은 내가 선택한 삶이었다. 


 1인 가구가 늘어가는 것에 비해 제도는 변화의 속도에 맞추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법은 느슨한데, 병원에서 혹시 모를 소송에 대비해 몸을 사린다. 병원마다 조금씩 내규가 다른 것도 혼란스럽다. 어느 병원은 반드시 부모님이어야 한다는 곳도 있다고 하고, 어느 곳은 형제 중에서도 남자 형제여야 한다는 후기도 있다. 인터넷을 뒤져 찾은 흩어진 정보들에 수술을 앞둔 환자들은 압도될 수밖에 없다. '혼자의 삶'을 택한 나는 부모에게서 남편으로 승계되지 않으면 비빌 언덕이 없는 현실에 마음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오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1월 22일-23일 시간 돼? 수술하게 됐는데 보호자가 필요하데"

 "아마 될걸?"

 "아마는 안돼. 오빠가 안된다고 하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되니까 회사랑 얘기해보고 확실하게 알려줘."

 "휴가 내면 되지 뭐. 무슨 수술?"

 "자궁수술"

 "22일에 가면 돼?"

 "응. 병원 입구로 와서 전화해."

 경상도 남매의 대화는 간결했다. 고민한 시간이 민망해지게 오빠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캐묻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걱정이나 위로의 말 한마디 없는 것도 우스웠다. 도대체 무슨 수술인 건지, 엄마한테 얘기는 했는지, 몸은 괜찮은지를 묻고 싶었겠지만 그냥 알겠다로 끝내준 오빠가 고마웠다. 이렇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알겠다고 해줄 혈육을 두고 망설이기만 했던 시간들이, 고민만 하던 내가 가여웠다. 오빠는 일정에 맞춰 서울로 왔고, 나는 오빠와 2박 3일의 입원기간을 보냈다. 병원은 이 사람이 내 친오빠인지, 남편인지 확인하지 않았다. 그저 보호자와의 관계란에 형제라고 쓰면 그런 줄 알았다. 퇴원할 때까지 엄마는 나의 수술 사실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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